반면에 가난한 나라의 상황은 다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국민 소득이 늘어날수록 뚜렷하게 국민의 행복감도 높아졌다. 가난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조금만 소득이 늘어나도 큰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미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 형편이 나아질수록 그 행복감은 점점 감소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대부분이 국민 소득 2만 달러가 넘어서면서부터 국민 소득이 아무리 올라도 행복지수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역설에 빠져 있다.
오히려 2000년 미국의 연간 이혼율은 1960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고, 혼외 자녀 출생률은 6배 이상, 한 부모 가정 비율은 3배로 늘어났다. 우울증 환자 수도 몇 배나 큰 폭으로 증가했고, 알코올 중독자 수는 마약 중독자 수보다 많아졌다. 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선진국 역시 자살률이 늘어났고, 범죄율도 급증했다.
1960년에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56퍼센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2000년에는 33퍼센트의 미국인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정직한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1952년에는 51퍼센트였으나 1998년에는 단지 27퍼센트에 그쳤다.
영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어드는 1970년대를 분기점으로 경제 성장이 더 이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통계를 들이대며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경제 성장 지상주의에 매달려온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도 근본에서부터 물음표를 던진다.
▲ <행복의 함정>(리처드 레이어드 지음, 정은아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
레이어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성장과 번영이 경제학자와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그도 국내총생산(GDP)의 증가와 더불어 일상생활에서 최저 빈곤선을 탈출해 성장의 풍요를 누릴 때까지는 국민의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레이어드는 풍요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대체로 2만 달러를 넘으면 국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철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그는 수십 년 동안 선진국의 경제 정책과 분배 정책, 이를 떠받치고 있던 주류 경제학 이론과 신자유주의는 실패라고 단언한다.
레이어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이라는 홉스의 생각을 잘못된 이론의 표본으로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류가 처음부터 사회적인 동물이었으며 협동, 공동선, 공정성, 도덕성이야말로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사람의 본성이라는 점을 다양한 사례와 연구 등을 들어 알기 쉽게 논증한다.
레이어드가 예를 드는 많은 연구를 보면, 개인주의의 만연과 경쟁 논리 강조는 결국 가족 해체와 신뢰성 붕괴로 인한 인간관계의 해체,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했을 뿐이다. 예컨대 성과급이 가져다주는 생산성은 협동함으로써 얻는 결과보다 못하며 거꾸로 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증가시키고 인간관계만 깨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해고와 노동자의 이동성 증가는 지역 사회의 안정성도 해친다.
경제학자로서 레이어드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낡고도 썩어빠진 관성에 대해 발상의 전환을 호소한다. 그는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개인 심리학. 정부 정책, 종교적 명상 등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던진다. 그리고 이제는 생각을 바꾸고 정부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윈의 적자생존과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신화는 이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레이어드는 150만 원을 버는 차상위 빈곤층에게 50만 원의 추가 소득은 엄청난 행복감을 가져다주지만 1억 원을 버는 최상위층에게 50만 원의 추가 소득은 전혀 아무런 행복감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정부의 할 일이란 국민의 세금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며, 그것도 최하위 빈곤층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최하위 빈곤층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최대다수의 행복을 늘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레이어드는 정치의 목표는 사람들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 유격 훈련장처럼 전쟁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부유한 사람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레이어드는 자신의 행복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바탕으로 영국과 유럽에서 행복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북돋고, 더 많은 성장과 더 많은 돈이 삶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가치라고 강조하는 사회 운동이다.
레이어드가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는 대한민국을 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집권 내내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주고 일반 서민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둬 자신을 비롯한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부자들과 재벌들의 금고에 채워 넣는 행태를 본다면…. 또 정작 서구에서는 용도 폐기되는 적자생존과 보이지 않는 손에 근거한 경쟁 신화가 모든 사회에 내면화된 모습을 본다면….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이 잇따르고, 해고와 구조 조정이 지진 해일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덮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레이어드의 책은 우리에게 다시 근본을 돌아보도록 권유한다.
이처럼 레이어드의 행복 경제학은 나름의 설득력으로 일독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부유한 선진국 경제학자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갇혀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좀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가족 해체. 우울증의 증가, 공동체의 해체 등을 가져온 원인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레이어드가 꿈꾸는 협동과 신뢰에 기반을 둔 사회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결코 실현 불가능하지 않을까? 더구나 레이어드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고갈과 곧 닥쳐올 식량 위기를 자신의 행복 경제학의 틀 안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전혀 문제의식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다.
복지 국가, 불평등, 불공정 등이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중요한 열쇳말이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레이어드의 책을 염두에 두고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무조건적인 성장을 전제로 한 복지 국가는 마치 서구의 복지 국가가 그랬듯이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감과는 무관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새로운 사회 정책과 국가 이론까지 구미에서 수입하는 한국에서 행복 경제학과 이에 바탕을 둔 새로운 복지국가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서구의 현실과는 그 역사, 문화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먼저 전제하고 한국의 실정에 맞는 복지 국가를 구상하지 않으면 이는 또 다른 흉내 내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마지막에 딴죽을 걸었지만, 레이어드의 발상을 읽는 것은 즐겁고 새롭다. 다른 한국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둔 새로운 행복 경제학을 구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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