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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합작' 꿈꿨던 하지의 진심은?

[해방일기] 1946년 6월 14일

1946년 6월 14일

5월 28일 민주의원 중도파 의원 원세훈이 기자 회견에서 사흘 전 있었던 좌우 합작 모임을 설명했다. (<동아일보> 1946년 5월 29일자)

우리 일을 가장 걱정하는 외인(外人)이 여운형, 허헌 양씨와 나와 김규식 박사가 회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이 회견의 요청이 여, 허 양인으로부터 온 것인가, 혹은 당신이 거중 알선하는 것인가 함에 대하여 여, 허 양씨의 요청이라면 요청이나 나의 알선이라면 알선이라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회견의 필요는 물론 시국 타개의 방안을 협의하자는 데 있었다. 따라서 회견은 개인적 사회견이요 공적 회견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두었다.

이리하여 회견의 기회가 한두 차례에 X하였으나 결국 지난 25일 오후에 모처에서 뻐-취, 아편설라 양씨와 김 박사 및 나와 여(운형), 황(진남) 등 6인이 회합하였는데, 뻐취 씨가 먼저 개회사 비슷이 "이것은 당신네들 일이니 당신네들 맘대로 잘 타협하시오."

원(세훈) "나는 당신이 부끄럽소. 우리 일을 우리가 못하고 외인의 알선으로 이같이 함은 대단 미안하오. 우리가 여지껏 한 일은 다 덮어놓읍시다. 그리고 다만 완전 독립에 좋은 안이 있으면 말하시오."
상대방 "합작의 안이 없다."
원 "아-무 안이 없이 만나면 무엇하는가." 하고 이편 안을 피력하였다.
원 " 다 같이 완전 독립한다면 합작할 수 있다."
김(규식) "전적으로 즉시 독립을 목적한다면 합작할 수 있다."
여 "독립이야 다 원하는 바이나 탁치라는 말을 해석해 보자." 하며 해석하였다.
원 "탁치에 대한 해석을 하러 온 게 아니다."
이리하여 김 박사가 38 이북의 악실정을 언급하니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 양씨는 퇴장하고 말았다.


1946년 좌우 합작 노력의 제일 첫 모습을 보여주는 발표였다. 6월 14일 오후에 김규식, 여운형, 허헌, 원세훈과 옵서버 몇 사람이 참석한 모임이 다시 열렸고, 원세훈은 이 모임에 관한 개인 담화를 며칠 후에 발표했다. (<조선일보> 1946년 6월 19일자)

나는 金奎植 박사와 같이 14일 시내 모처에서 呂運亨 許憲 씨 외 옵서버 수인과 함께 화기애애한 가운데 회합하여 장시간 동안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구체적으로 완전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좌우 합작 문제에 대하여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어 세 가지 점으로 완전히 의견의 일치점을 얻게 되었고 시일과 장소는 작정하지 않았으나 우리들은 확실히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당일 회합에서 일치된 의견 합치점은 다음 세 가지다.

1) 대내 대외에 관한 기본 원칙으로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채선(採選)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불편부당한 선린 외교 정책이라야 할 것.
1) 좌우를 막론하고 진실한 애국자며 진정한 혁명가라면 절대로 배격이나 중상을 금하고 이를 절대로 옹호하여야 될 것.
1) 남북 합작은 북조선에 있어서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제외하고 언론 집회 사상 자유가 허여된 후에야 비로소 합작이 가능할 것.


원세훈이 말한 "시내 모처"란 군정청 고문인 버치 중위의 사택이었다. 앞의 담화에서 "우리 일을 가장 걱정하는 외인"도 버치 중위를 가리킨 말이다. 레너드 버치는 원세훈만이 아니라 많은 조선 정치인들의 신뢰를 모으며 좌우 합작 노력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일개 중위로서 이런 특출한 역할을 맡은 버치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브루스 커밍스는 1973년 5월 19일 버치와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회고를 얻어내고 버치의 이력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534쪽에 간략히 정리해 놓았다.

버치는 오하이오 주 애크런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변호사로서 자기표현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지체 높은 육군 중위"가 된 사람이다. 1946년 초에 한국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특정한 임무를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그저 "샌프란시스코의 서점 하나를 몽땅 뒤져서" 한국에 조금이라도 관련되는 자료를 끌어 모으고 한국까지의 항해 중에 그 자료를 모두 읽은 것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군정청에서 한국의 정치와 인물을 제일 잘 아는 미국인이 되어 아놀드의(그리고 하지의) 정치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곧 한국 좌우익 중요한 정치지도자 대부분과 개인적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커밍스는 버치를 언급할 때마다 아주 강한 신뢰, 때로는 존경심까지 보여준다. 하지, 아놀드, 러치 등 미군정 지도자들에 비하면 뛰어난 교양인이 분명하고, 그가 관여한 좌우 합작 노력에서는 수준 높은 전략 마인드도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인물이 군정청에 더 많았다면, 그리고 더 큰 영향력을 가졌다면 군정의 폐해가 훨씬 덜했을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좌우 합작 노력에 대해서도 민족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길로 높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치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상식 차원에서 중도파가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민족의 역사가 덜 폭력적인 길로 향할 수 있었던 기회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좌우 합작 과정의 검토에서는 냉정한 태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려 한다. 버치에 대해서도 좌우 합작에 대해서도 당시 현실적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실제로 벌어진 진행과 대비해서 지나치게 미화하고 싶은 충동을 나 자신 느끼기 때문이다.

좌우 합작을 "중간파와 하지의 동상이몽"으로 규정한 정용욱의 설명이 냉정한 검토를 위한 좋은 출발점으로 보인다.

미국이 추구한 목적은 개혁 그 자체는 아니었다. 미국 측 개혁 추진자들은 일정한 개혁이야말로 좌익에 대항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개혁 조치는 반공정책의 일환이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 미국 측 당국자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을 중도 정책이라 불렀지만 이러한 정책은 중간파와 별로 관련이 없었다. 하지는 중간파가 제안한 사회 경제적 개혁을 그 내용 그대로 실시하는 것을 계속 거부하였다. 미국은 대신 개혁 조치를 개량화시킴으로써 우익과의 연합을 강화하고, 대중적 인기를 만회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미국이 표방한 개혁 정책은 '반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 일종의 개량주의적 개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중심 펴냄), 132~133쪽)


미군정을 구성한 인물 중에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이 많았으리라는 것은 그 기능 수행의 여러 측면에서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인 집단이라면 더러 현명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버치 한 사람만이 독야청청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정용욱은 좌우 합작을 지지, 지원한 미군정 인사로 하지의 경제 고문 아서 번스, 정치 고문 윌리엄 랭던, 노동 고문 스튜어트 미챔 등 "중간파 정책 추진자" 그룹을 지적했다. 이들에 반대하는 극우파의 대표로는 러치 군정장관을 지목했다. 하지 자신은 개인적 성향으로는 격렬한 반소-반공주의자였지만, 사령관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중도 노선의 필요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중적 입장으로 설명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135~145쪽)

중도파 조선 정치인들과 하지 사이에만 "동상이몽"이 아니었다. 좌우 합작 노력에 참여한 여러 중도파 정치인들 사이에도 서로 어울리기 힘든 많은 꿈이 있었다. 그 꿈들 하나하나에 살펴볼 만한 의미가 있겠지만, 좌우 합작 노력의 흐름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역시 칼자루를 쥔 하지의 꿈이었다. 좌우 합작 움직임을 더듬어보기에 앞서 하지의 꿈 해몽부터 시작해야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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