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내가 만들고 있었던 건 '폐허'라는 이름의 아무도 안 들을 것 같은 어두운 음악이었다. 따라서 나를 보자고 한 이는 분명 '오타쿠'처럼 생긴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신천역에 모습을 보인 건 긴 생머리에 올리비아 허시(줄리엣!)를 닮은 미남 청년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당시 열일곱 살의 어린 나는 과장을 조금 섞어 세상에 이보다 유식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저 지시대명사 사이를 헤매는 나의 대답에도, 그는 손에 잡힐 듯한 설명으로 되받아쳤으며 그 눈빛 또한 또렷해 가짜 같지 않았다. 어린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고 유머 감각도 보통 이상으로 뛰어났으니, 주변에 아는 어른이라곤 '학교 선생님'밖에 없었던 내게 충격적이기까지 한 존재였다.
▲ <결국, 음악>(나도원 지음, 북노마드 펴냄). ⓒ북노마드 |
음악 비평은 현 시대의 음악을 기록하고 평가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다. 아무렇게나 써놓고 음악 비평이라고 해도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청음을 즐기는 이들을 향해 '제대로'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노련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낱 노랫가락에 불과할 수도 있는 소리에 맥락을 엮어내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것저것 개념도 끌어다 쓸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엔 예리한 통찰력, 필자만의 관점이라는 타고난 능력은 물론 부지런함이라는 후천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수많은 청자들이 놓인 사회적 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대를 외면하는 평론은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작업을 하는 사람을 평론가라고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아마 오늘도 <나는 가수다>나 <위대한 탄생> 유의 TV 프로그램부터 인터넷에만 음원을 올리는 무명 뮤지션까지 두루 훑으며 '어떤 것이 의미가 있나' 고민하고, 청자/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마감'임에 틀림없고.
어쨌든 나는 이들 중 한 명인 저자 덕분에 '혼자 컴퓨터 질로 이상한 허섭스레기나 만드는 중학생'에서 '뮤지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셈이다. 그것도 아주 얼떨결에.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도원이 지금은 음악 비평계에서 상당히 대표성 있는 평론가가 되었기에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혼자만 몰래 좋아하며 쾌감을 느끼던 밴드가 유명해져서 앨범을 낸 느낌이랄까?
두 가지 '검증'
음악을 만들어 놨어도 알릴 방법이 없다면, 더 많은 사람이 들어주길 원하는 음악가와 보다 많은 음악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답답할 따름이다.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을 최대한 열심히 들어주는 누군가를 만나 기록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부여받게 되며, 마찬가지로 청자들도 좀 더 괜찮은 음악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뮤지션이 그저 자기 땅 밑을 본다면, 누군가는 그 전후좌우까지 보아야 한다. 여기서 '검증된' 평론가가 필요해진다.
'검증'이라는 말을 썼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그 의미는 아니다. 음악가와 청자 사이의, 평론가와 독자 사이의 신뢰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무슨 국가 고시 자격증처럼 일정한 시험을 거쳐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음악 관련 작업을 꾸준히 지켜보는 훈련에서만 자격 비슷한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려면, 뮤지션이 공연을 하듯 글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나도원이 10년 넘도록 쓴 글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추리고 추려내 460쪽에 담아낸 <결국, 음악>에는 두 가지 검증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첫 번째는 저자가 동시대의 대중음악을 자기 눈으로 '검증한' 역사다. 두 번째는 그의 글이 독자 사이에서 어떻게 신뢰를 구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검증 받은' 역사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산울림과 소녀시대, 장기하와 서태지를 넘나드는 수많은 음악 현장 속을 헤집는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안내서이기도 하면서, "나도원의 음악 얘기를 한 번쯤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설득시키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특히 2장 '인디' 편에서, 그가 독자들의 '검증'을 어떻게 따내게 되었는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사실 소녀시대에 대해서는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인디 씬에선 관련 기사 하나조차 흔치 않은 일이다. (써봤자 읽는 사람도 적다.) 게다가 좁은 '홍대 바닥'에서 직접 마주칠 일도 다반사다. 결국 국내 인디 음악에 대해 쓴다는 것은 효율 면에서도 떨어지고, 누군가와 의 상할 위험도 생기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이 산문집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장 전체를 활용해 인디 씬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장의 서문 격에 해당하는 '왜 인디를 말하는가'에서는 "대형 농장에선 나올 수 없는 작물의 소중함, 그리고 저택의 정원에선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며 인디 씬의 운동적인 측면을 주목했다. 그리고 나의 원맨 프로젝트 '폐허' 같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 뮤지션부터 인디 레이블의 대표까지 찾아다니며 인터뷰했다. 현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작업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저자의 발자취가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뮤지션이 비평을 읽으려면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음악 비평의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평을 거의 읽지 않는다. 어떤 음악에 대해 심미적으로 비평한 글은 특히나 읽지 않는다.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판단은, 특히 음악에 적용하기엔 너무 세밀하고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큰 이유는 비평을 읽을 시간에 음악을 찾아 듣지 왜 남의 감상을 읽느냐는 '실용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원의 글은 굳이 찾아 읽는다'라는 내용이 다음에 와야 할 것 같지만, 그의 글이 내겐 좀처럼 맞질 않는다. 그의 문장은 유려한 것이 특징인데, 내겐 읽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물론 이런 특징이 분명 나와 독서 취향이 다른 많은 독자들에겐 매력 요소일 것이다.
예전보다 더욱 음악 비평을 보지 않는 나로선 한국 음악 비평의 미래에 두 가지를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싶다. 하나는 '비평을 찾아 읽는 시간에 음악이나 하나 더 듣지'라는 생각이 안 드는 글을 많이 써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실용성' 있는 글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외국 뮤지션에 대한 글일 경우 검색으론 쉽게 알 수 없는 알짜배기 정보가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읽을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요새는 밴드가 직접 운영하는 트위터 같은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정보 자체보다는 기존에 아는 음악에 대한 글이라 하더라도 끌어들일 수 있는 완성도와 가치가 중요할 것 이다. 소재가 어찌 됐든 잘 쓴 글을 보게 되는 것처럼.
아이돌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도록 음악 생태계가 다양해져야 하는 이치와 똑같이, 비평 생태계도 다양해졌으면 한다. 앞서 유려한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현재 많은 국내 음악 비평문, 에세이들은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면'이라는 설명에 치중한다. 몇 줄의 설명과 감상으로도 충분한 얘기를 장문으로 늘여놓기 때문에 답답하다.
두 번째로 인디 씬에서 친분이 있는 뮤지션을 띄워주는 관례나, 소위 '주례사 비평' 같은 하나마나한 것은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는 사람이니까 억지로라도 한 번 써준다는 식의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결국, 음악>의 저자 나도원이 갖는 미덕이기도 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밴드 '밤섬해적단'에 대해 쓸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별로 쓸 생각이 없어보였고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평론가 스스로 쓸 얘기나 감흥이 없다면 쓰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주례사 비평'은 아닌지 모르겠다. 평론가가 음악가의 음반 얘기를 하는 것과 정반대로, 음악가가 평론가의 책을 얘기한다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에서 이 서평이 내게 맡겨졌다고 들었다. 그런 기획일 뿐이니 이 글은 보너스 트랙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음악>을 직접 읽고 독자 분들이 평가해 주길 바란다.
CD 시절 함께 호황을 누렸던 음악 잡지의 시대도 저물고, 인터넷 음악 웹진의 힘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음악"을 얘기하는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참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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