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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버린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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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버린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프레시안 books] <천년의 기도>·<골드 보이, 에메랄드 걸>

중국어를 버린(?) 천재

태어나서 처음 익힘으로써 자신 속에 생겨버리는 근원적인 언어, 모어(母語)를 뛰어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재일 조선인 서경식은 일본어가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모어라는 괴리에 몸부림친다. 동유럽 부코비나 태생의 파울 첼란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었지만, 평생 독일어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국가주의의 폭력 속에 놓인 '비국민'이 마주치는 모순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맨 먼저 이식되는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강한지 잘 보여준다.

여기 '모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제 몸에 담는 것이 가능했던 작가가 있다. 맘먹는다고 버려지는 게 아닌 만큼 정말로 흔치 않은 극복이다. 그는 모국을 핍박한 나라의 언어를 몸부림치며 떨쳐낸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완전히 새로운 제2의 언어를 이식받았다. 게다가 그는 이제 그는 모어이자 모국어인 중국어로는 소설을 쓸 수조차 없다. 대부분의 사고가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이윤 리. 올해 39세인 그는 15년 전인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처음 미국에 간 나이가 스물셋이라니 놀랍다. 게다가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그의 소설은 매우 뛰어나다. 천재성을 지닌 이들에게만 준다는 창작 기금 '맥아더 펠로'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중국 사회'를 해부하고 싶은 사람들

▲ <골드 보이, 에메랄드 걸>(이윤 리 지음, 송경아 옮김, 학고재 펴냄). ⓒ학고재

이윤 리의 단편 소설집 두 권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단편 소설로서는 최고의 영예라는 프랭크 오코너 상, 헤밍웨이 상을 잇달아 수상한 2005년 데뷔작 <천년의 기도>(송경아 옮김, 학고재 펴냄)와 최근의 단편을 묶은 2010년 작 <골드 보이, 에메랄드 걸>(송경아 옮김, 학고재 펴냄).

<천년의 기도>가 앞서 2006년 번역된 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관심은 남다르다. 여러 이유 가운데,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자란 탓이 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중국을 떠나 중국어를 버리고, 중국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라니…. '미국'과 '중국'이 대표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기대.

두 권에 실린 19편 가운데 일부는 미국 속 중국인의 모습을 그리면서 실제로 이런 가치 충돌의 문제를 파고든다. 특히 <천년의 기도>에 실린 '천년의 기도'와 '네브레스카의 연인들'이 웨인 왕 감독에 의해 스크린에 옮겨지면서, 그의 소설은 더 확고하게 '다민족 미국 사회 속 중국인'을 표상하는 지위를 획득했다.

웨인 왕이 누구인가. <조이럭 클럽>(1994년)으로 미국 사회 속 중국인 여성의 갈등을 세밀하게 그린 바 있는 홍콩계 미국인 감독이다. 실제로 슬쩍 두 영화의 트레일러는 과연, 다분히 '중국계 미국인'스러웠다. 눈 찢어진 주인공들이 미국적인 환경 속에서 생소한 즐거움을 느끼거나 방황하는 모습을, 매우 미국적인 감각의 편집으로 소화하는 영상.

현재 중국이 겪고 있는 거대한 변혁에 대한 문학적인 증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며, 이 독특한 이력과 정체성을 가진 작가에게 한 줄의 답을 기대하는 심리도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 "그 어떤 고발의 의도도 없"으며 "소설 속 상황들은 중국인들이나 중국만의 특수한 문제들처럼 보이지만, 역사를 보면 끔찍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될까봐 걱정하는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그건 문학을 바라보는 매우 좁은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 독자들을 감동시킨 만큼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독자도 끌어들일 만한 통찰력이 빛나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무도 보아 줄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아픔들을 건져 올려, 우리가 견딘 쓸쓸함과 공명하게 해 준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 준비해 놓은 모든 실망을 견디고 살아남는"('그 같은 남자') 사람들이며 "그 생명을 빚었던 사랑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정도로 끈질긴"('쑤 씨의 이중생활') 사람들이다. 고독한 몸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금세 사라질 줄 알면서도 타인의 온기를 좇거나 기억하는 이라면 어디에 있더라도 이 쓸쓸한 세계에 깊이 감명하고 말 것이다.

이윤 리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어떻게 지구 반대편에서,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중국을 떠나 온 이후 중국인들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표면에서 이뤄졌다"며 "설사 수많은 겹이 있더라도 (…) 그 표면을 넘어서는 것을 다룬다"고 답했다. '중국 사회의 단면'이라는 틀에 너무 매몰되면, 이윤 리 소설 읽기는 피상에 머무르고 말지도 모른다.

고향에는 닿지 않는 소설

▲ <천년의 기도>(이윤 리 지음, 송경아 옮김, 학고재 펴냄). ⓒ학고재
그런데 이윤 리가 유독 자기 소설의 중국어 번역 출판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는 <천년의 기도>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중국 출판사의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2의 언어인 영어로 쓴 책을 나 자신이 번역하건 다른 사람이 번역하건 모국어인 중국어로 번역하기를 바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지만, 이건 이유가 아니라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의 소설이 미국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가 혼재하는 자장 속에서 벌어지는 '톈안먼 세대'의 고백으로 읽힐 수는 있지만, 저자 스스로 밝혔듯 어떤 것을 고발하려는 의도는 없다. 중국의 일반 독자들의 화를 돋울 만한 내용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아시아에서 처음 나오는 번역판인 한국어판 출간이 매우 신기하다"고 말하는데, 그 다음에 붙는 문장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귀향에 가깝지만, 그저 가깝다는 얘기일 뿐 진정한 의미의 귀향은 아니다."

서양 언론은 이윤 리의 소설을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중국의 목소리"라고 추켜세우지만, 중국인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중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마오쩌둥을 닮은 한 남자의 비참한 인생으로 그려내는 단편이나('독재자를 닮은 아이'), 이혼, 동성애, 가난, 계급차가 수시로 등장하는 그의 소설은 그 자체로 외면받기 좋은 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소설의 중국 출간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이런 것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어느 순간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다시 태어난 뒤의 자신은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 결심의 계기는, '작가의 말' 일부에 쓴 1년의 군 복무 경험에서 더듬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톈안먼 사태 이후 정부의 세뇌 교육을 받기 위해 군에 들어가야 했고, 소등 후 창고에서 죽도록 영어 공부를 하는 소녀들 옆에서 눈이 안 보일 때까지 글을 썼다. 우연히 워크맨을 통해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를 들은 날, 작가는 "내가 바라지 않았음에도 왔고 떠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장소에 있는 나의 꿈과 공포, 고독"을 느끼며 마루에 엎드려 펑펑 운다.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윤 리는 그렇게 어느 순간 생겨버린 상처와 불화를, 억지로 거스를 수 없다고 여겼거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이미 지난 때를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소설엔 극적인 재회나 화해가 없다. 또 무언가를 억지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더 나은 가족"을 위해 아이를 갖거나 대리모를 들이며 분투하지만, 번번이 또 다른 불행으로 빠져든다.

작가의 군 복무 경험이 반영된 듯한 '여름의 마지막 장미'의 화자 모얀 역시 23년 전 군에서 만난 웨이 중위의 부고를 받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웨이 중위는 소녀 모얀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바꿔주고 싶어 했고, 시간이 흘러서도 만나길 바랐지만 모얀은 그것을 차단하고 다만 "(웨이 중위의) 친절에 빚을 졌다"고 기억할 뿐이다.

우리 인생은 비극과 상처를 예기치 않는 것처럼, 다시 만날 '때'도 가르쳐 주지 않으므로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프고 이상한 사람들끼리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는 '골드 보이, 에메랄드 걸'이나, 남녀가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과거 감정의 간극을 메워가는 '황혼의 사랑'처럼 작가는 언젠가 조심스레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암시한다.

이윤 리는 아주 천천히, 헤어진 과거와 다시 만나는 법을 아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결코, '때'를 직접 찾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말해준다. 누군가와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인연엔 300년의 기도가 필요하고, 아버지와 딸의 인연으로 만나려면 '천년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고사('천년의 기도')처럼, 불가해한 운명이 바로 인생인 것이라고.

"그것(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은 귀향에 가깝지만, 그저 가깝다는 얘기일 뿐 진정한 의미의 귀향은 아니다."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지금 그의 작가 인생에 '진정한 의미의 귀향'을 캐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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