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글을 쉽게 쓰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인문계가 보기에 이공계의 글은 어법에 맞더라도 도무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이공계를 위한 글쓰기 강좌를 기획하는 친절을 베풀고, 딱딱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연구에 매달리다 지친 이공계는 시를 쓰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음악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과학자들이 그렇다. 그래서 말년의 이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꿈꿨던 바이올린에 심취했고, 은퇴하자마자 지필묵부터 챙기려는 과학자도 우리나라에 있다.
답답한 이공계를 위해 일부 인문계가 소통을 제안할 수 있는 건,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이공계가 더러 있기 때문일 텐데, 이공계는 인문계를 도울 준비를 하기 어렵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이공계는 있어도 열역학을 알고자 하는 인문계는 거의 없는 탓이다. 그래서 인문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이 인문주의자를 향해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 하고 제안했다. 인문을 모르는 이공계의 허튼소리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으려면 과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테니까. 과학을 모르니 이공계가 그린 화려한 청사진에 덮어놓고 정신줄부터 놓는 인문주의자들이 생기고, 그들이 정책 결정자가 되어 도 넘게 장단을 맞출 경우, 위험 사회는 증폭될 수 있다. 황우석 사태가 그랬고, 시방 4대강 사업이 그렇다.
최성일은 출판평론가다.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품질까지 살피며 관련된 출판계의 흐름을 두루 분석해 저자와 출판사의 진정성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그의 글은 흔히 만나는 서평과 다르다. 최성일의 평론에서 공력을 얻는 독자들은 어떤 책부터 왜 찾아서 읽어야 하는지 덕분에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서점을 방문하게 된다. 인문주의자라는 호칭을 달가워하는 그는 과학을 모르는 시민들을 열광으로 몰고 갈 의도를 가진 이공계의 편견과 오만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인문주의자에게 오로지 인문 관련 책의 평론을 청탁하는 분위기에서 평소 과학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이다.
▲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최성일 지음, 연암서가 펴냄). ⓒ연암서가 |
약국에 처박혀있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던 아버지에게 강소천 동화집부터 받았던 이공계인 나는 초등학교 내내 띄엄띄엄 읽었을 따름인데, 초등학생 최성일은 <소년소녀발명발견과학전집>을 아버지를 졸라 구하고 나서 단박에 읽은 모양이다. 중학생 때 읽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과학책의 세계로 빠져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여긴 최성일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홍욱희·홍동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읽고 과학 에세이의 진면목에 전율했다. 이후 이어지는 '과학 애호가' 최성일의 책읽기는 양과 질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과학도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인문주의자가 과학책만 다룬 출판 평론집을 냈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연암서가 펴냄)가 그것이다.
우수한 과학책일수록 인문적이라는 걸 경험으로 터득한 최성일은 우주의 탄생과 질서를 입이 딱 벌어지게 펼쳐내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처음 펼친다. 어릴 적부터 별들이 수수께끼였던 세이건에게 사람들은 그저 "별은 하늘의 빛"이라 대꾸했다. 수수께끼를 풀 수 없던 세이건이 도서관에 갔더니 사서는 대뜸 할리우드 스타에 대한 책을 내주는 게 아닌가. 항의를 하고 받아든 책은 어린 세이건에게 황홀한 세계였다. 처음 만난 과학책다운 <코스모스>는 중학생에게 꽤 까다로웠지만, 작은 활자의 500쪽을 오기로 완독한 최성일은 2006년 12월에 출간한 <코스모스> 특별판에서 명왕성을 태양계의 일원으로 버젓이 등장시켰다는 걸 집어냈다. 그해 여름 행성 지위를 박탈당해 134340번의 외소행성으로 분류되었다는 게 아닌가.
어려서 읽은 <소년소녀발명발견과학전집>을 수소문한 끝에 다시 잡은 최성일은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이 소개된 1권 우주 편을 펼치며 요하네스 케플러를 생각한다. 위대한 발견을 했지만 말년에 쓸쓸했던 예전의 과학자는 "딸인 점성술이 빵을 벌지 않으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굶어죽는다"는 말을 남겼다는 거다. 연구나 교육보다 용역에 마음을 빼앗기는 요사이 과학자들은 케플러보다 위대한 발견에 시간가는 줄 모를까. 12권 우주여행 편에서 "달 정복"이라 붙인 제목을 터무니없다 여기는 최성일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정복이라 하지 않듯 아폴로 달 착륙은 "유인 달 탐사"로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무렴. 요즘 과학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장헌영 옮김, 승산 펴냄)를 썼다는 걸 진작 알지 못했던 이공계는 갈릴레이가 "학문은 회의를 통해 획득되는 지식"이며 "과학자들이 이기적인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어 오로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 데만 만족한다면 학문은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고 일찍이 제자에게 전했다는 걸 몰랐다. 나치가 핵폭탄을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물러난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 조지프 로트블라트와 달리 끝까지 남았다 결국 못 볼 꼴을 보고 만 미국 출신 물리학자 율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뭐라 했던가. "정부에 대해 지나치게 성찰 없는 충성심을 바친 게 아닌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핵의 평화적 사용으로 핵폭탄의 가공할 위협을 상쇄할 순 없다!"고 공언했건만 요사이 더욱 공허하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핵발전소에서 거듭 일어났건만 핵무기를 염두에 두는 핵 발전 추진론자들은 도대체 숨을 죽이지 않는다.
정치적 메시지가 덧붙은 과학적 오만에 일침을 가하는 굴드의 책을 펼친 최성일은 지금이나 그때나 "과학자들도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의 사회 정치적 제약을 그들의 이론에 반영한다"는 굴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다윈이 가난뱅이의 자손이라 자신의 이론을 펼쳐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생물학은 얼마나 다를까 상상해본다. 황우석 사태를 예견한 듯,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이제이북스 펴냄)를 쓴 이충웅이 "멸종 위기 동물이 개발 계획 지역에 살면 멸종 위기 동물이 아니게 되는 나라에서 생물종의 다양성이 보장될 리 만무하다!"고 한 한탄에 동의하는 최성일은 "논리적 사고와 비판 없는 과학 대중화는 일종의 우민화"일 뿐이라는 이충웅의 주장을 되새긴다.
많은 이는 에드워드 윌슨을 자연주의자로 인식한다. 그도 그럴 게, 생물 다양성 보전을 위해 그가 외친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가. 하지만 그는 사회 현상까지 유전자에 환원시켜, 같은 대학에 있던 굴드를 포함해 많은 생물학자들을 아연케 했다. 생물학자의 틈바구니에 끼어 인문 사회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이 이공계도 마찬가지였는데, 최성일은 "유전자 결정론에 기대어 인간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고,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들을 평하는 자리에서 못 박았다. 내공이 없는 이공계도 감히 반박하기 어려운 윌슨의 주장에 비판의 일설을 가한 최성일. 맑은 정신을 가진 인문주의자이기에 가능했으리라.
한 편의 책을 평가하려고 관련된 숱한 책을 철저하게 살피는 최성일의 자세는 책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쇠진되었을 게 틀림없다. 올해로 10회를 맞을 '환경 책 큰 잔치'를 기획해온 환경단체, 환경정의에서 이 글을 쓰는 이공계와 초기에 함께 활동했던 최성일은 고맙게도 내 스토커라 했는데, 그가 이 글을 읽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 팀이 아르헨티나와 만날 때, 찻집에서 담담히 재발된 뇌종양이 악화되었다고 말하던 그는 자신의 이 책,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마저 펼치지 못했다. 인문에 곁눈도 두지 않은 채 허욕과 탐욕에 눈이 먼 과학자들이 과학을 모르는 인문계를 속이려드는 현실에서, 우리는 이제 과학을 비판할 줄 알았던 인문주의자, 최성일을 기억해야 한다.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