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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를 울린 그 여인, 내 어머니 春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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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를 울린 그 여인, 내 어머니 春子!

[프레시안 books] 강상중의 <어머니>

재일 동포(在日 同胞). 요즘엔 그냥 '자이니치(在日)'로만 주로 호칭되는 존재. 자이니치는 원래 말 그대로 일본에 있다거나 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이니치 외국인, 자이니치 미군처럼 본디 일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일본에 있거나 살고 있는 존재들 앞에 붙어 그것을 수식하는 이 말이 주로 한국·조선계 재일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데는 나름의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왜 자이니치 한국인, 자이니치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자이니치라고만 쓸까? 그냥 쓰기 편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누가 '축소 지향형 일본'이라고도 했듯이 모든 걸 축약해버리는 일본적 풍토를 분명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자이니치 뒤에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붙이면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심지어 손해 보거나 위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생기고, 이어서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가 생기기 전에, 즉 한반도가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쪼개지기 전까지 일본에 살던 한반도계 사람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 시절에 강제 동원 당하거나 살기 위해 그 땅으로 이주한 한반도 사람들은 그냥 조선인(조센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사실상의 미국-일본 단독 모략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까지는 자이니치 외국인이 아니라 조선계 일본인이었다. 그 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자신들이 강제로 또는 사실상 강제로 끌고 간 조선 사람들의 일본 국적을 아무 책임감도 없이 일방적으로 박탈해버렸다.

1965년 한-일 국교 수립이 이뤄지기 전까지 그들은 그냥 자이니치 조선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대다수는 국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이니치 조선인의 대다수는 무국적자들이었다. 조선인은 결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국교도 없는 이른바 '북한' 국적을 취할 수도 없었거니와 조선인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들이 한반도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조선인으로 존재했다.

1965년 이후 원해서든, 먹고 살기 위해서든 다수의 자이니치 조선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자이니치 한국인이 됐다. 지금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등록된 자이니치 한국·조선인들은 모두 약 58만 명. 이 가운데 특별영주권을 지닌 오래전부터의 자이니치 한국·조선인 수는 40만 남짓이고 18만 정도는 비교적 최근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유학, 사업 목적의 재일 포함, 이른바 '뉴커머')이다. 그리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한국·조선계 일본인들이 약 30만인데 이들까지 합하면 자이니치는 90만 안팎이 된다.

원 자이니치('올드 커머') 40여만 중에 한국적을 뺀 '조선적'은 3~4만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 조선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취득자가 아니라 한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원래 조선인들로 사실상 무국적자들이다. '조선적'이란 실질이 없는 임시방편적 기호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 걸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분단 이전의 원래 조선, 하나였던 한반도 소속임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어머니>(강상중 지음, 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1998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국·조선계 자이니치로는 처음으로 도쿄 대학 정교수가 된 강상중(61) 정보학연구소(대학원) 교수이자 도쿄 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한국적 자이니치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남도 창원, 어머니는 진해 출신이다. 경상남도 출신이니까 당연히 한국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해다.

자이니치 한국·조선인들 전체의 약 50%가 경상도 출신이고 16% 남짓이 제주도 출신이며, 휴전선 이북 출신은 0.5%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조선적'도 거의 대부분이 한반도 남부 출신이다. 한국적이 많은 것은 1965년 한-일 국교 수립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보장해줄(사실 제대로 보장해 준 적도 없지만) 나라가 처음으로 등장해 다수가 그쪽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취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시부야 쪽에 '씨네콰논'이라는 영화 제작·배급사를 차리고 최양일 감독과 함께 영화도 만들고 <쉬리>, <서편제> 등을 일본에서 흥행시키기도 했던 이봉우 씨는 조선총련이 운영하는 이른바 민족학교 출신으로 조선적 자이니치였으나 결국 한국적을 취득했다. 조선적이라는 모호한 신분으로는 일본이란 나라를 드나들기가 너무 힘들고 외국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즈니스 차원에서도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적으로는 일본에서 나갈 때도 제출해야 하는 서류 등 조건들이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서울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언제든 들어오라고 허가해주는 나라도 흔치 않았고, 일본으로 재입국하는 절차도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이러다간 사업 망치겠다고 생각한 이봉우 씨는 결국 한국적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강상중 교수 부모는 한국적을 취득했으나, 그의 어머니 우순남(일본명 나가노 하루코. 한 세대 앞 한국 여성들 이름으로 그 흔했던 '춘자(春子)'가 역시 흔해빠졌던 일본 이름 하루코였다) 씨는 1941년 16살 나이에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딱 한 번 맞선을 본 당시 26살의 강대우(나가노 게이야) 씨를 찾아 도쿄로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울며 헤어졌던 그리운 어머니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국적 때문이 아니라 살기 어려워서, 조국이 분단되고 전쟁까지 나는 바람에 돌아갈 곳도 없어서 일본에 눌러앉았다. 도쿄가 아니라 멀리 남쪽 섬 규슈 구마모토 외진 곳까지 흘러들어갔다. "함석지붕에 조악한 널빤지를 덕지덕지 이어붙인,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좁은 언덕길에는 푸르스름하고 노란 색깔이 섞인 분뇨나 배수가 배어나오고 코를 찌를 듯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취락 지구 여기저기에 돼지우리가 만들어져 돼지들이 분뇨처리 역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뇨에 범벅이 된 돼지들은 암거래로 만드는 막걸리 냄새를 지워주기에 안성맞춤인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도 했다"던 그곳에서 나가노 게이야, 하루코 씨는 차별과 싸우며 돼지도 키우고 막걸리 밀조와 암거래로 입에 풀칠을 하면서 두 아들(장남은 어릴 때 못 먹어 영양실조로 죽었다)을 키웠다. 그리고 고철·폐품 수집상(고물상)을 하면서 정말 억척스레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막내 나가노 데쓰오를 와세다 대학에 보내고 독일 뉘른베르크로 유학까지 보냈다.

그 억척스러웠던 강대우, 우순남 씨가 바로 자이니치 1세들이다. 그들은 일본에서도 조국에서도 한 번도 제대로 조명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흔적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돈 좀 있는 '반쪽바리'로 경멸 내지 경원 당했고, 일본에서는 제삼국인으로 차별받고 천대받았으며 경계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자이니치들은 일제의 죄과를 입증해주는 강제 동원 대상자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비참했던 과거와 일본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기억해내야 할 때나 거론되는 존재들이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들을 잘 모른다.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주인공 삼아 그려낸 그들 자이니치 1세의 역사이자 존재 증명이다. 처참한 수난사이되 그것만이 아닌, 그것을 딛고 억척스레 일어서는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1972년 22살 나이에 처음으로 조국을 찾은 뒤 사춘기의 방황, 자신의 정체성 혼돈에서 해방돼 본명 강상중을 되찾은 자이니치 2세 강 교수의 성장 소설이며, 도망치려고만 했던, 두려움과 수치와 혐오와 사랑과 연대가 뒤섞인 어머니의 세계와의 화해이자 합일이며 부모 세대에 대한 애틋한 헌사다.

일본에서 지난해 6월 출간돼 10개월 만에 33만 부나 팔렸다. 그 독자의 대다수가 일본인이라고 출판사 슈에이샤(집영사) 담당 편집자도 저자 강 교수도 얘기했다. 일본인들 마음을 움직인 그 무엇이 한국에서도 통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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