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밝힌 범인이 진짜 진범일까? 아니야! 추리 소설 작가와 탐정은 범인을 지목할 때 종종 오류를 범해. 그들의 수사가 치밀하지 못한 탓에, 진짜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작가도 모르게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안 믿겨진다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은 푸아로가 밝힌 그 사람이 아니야!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세계 3대 추리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개>는 어떻고? 명탐정이라고 칭송 받는 셜록 홈즈는 범인을 잡기는커녕 완전 범죄에 이용당했어! (<셜록 홈즈가 틀렸다>)"
"흔히 우리는 후대 작가들만 선대 작가들의 작품을 '표절'한다고 얘기해. 과연 그럴까? 문학사, 예술사의 많은 사례는 선대 작가들이 후대 작가들의 작품을 베끼는 깜짝 놀랄 일이 빈번하게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 안 믿겨진다고? 그런 사례는 한둘이 아니어서 책 한 권 분량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고! (<예상 표절>)"
여기까지 읽었으면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미치도록 궁금할 것이다. 최근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프랑스 파리8대학 피에르 바야르(57)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정신분석학자 바야르 교수는 '개입 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 방법을 제안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
국내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을 포함해 '추리 비평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셜록 홈즈가 틀렸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 <햄릿을 수사한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와 <예상 표절>(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 소개되었다.
바야르 교수는 이밖에도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과 같은 귀가 솔깃할 책을 펴냈다. 최근에는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거릿 미첼 지음)를, 카프카가 <이방인>(알베르 카뮈 지음)을, 프루스트가 <제르미날>(에밀 졸라 지음)을 썼다고 가정한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을 펴내 또 한 번 독자를 놀라게 했다.
지난 4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봉래동1가의 프랑스문화원에서 바야르 교수를 만났다. 그는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다음은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은 되어 보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바야르 교수와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프랑스 파리8대학 피에르 바야르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니까!"
프레시안 : 한국의 책벌레들 사이에서 당신의 책은 필독서 중 하나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인터뷰를 하려니 걱정이 앞선다. 2007년 11월, 뉴욕 퍼블릭 도서관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했던 대담에서 당신은 이렇게 충고하지 않았었나?
"첫째, 저자에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하고 칭찬을 하라. 두 번째,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저자를 칭찬하면서도 (저자가 실망할 수 있으니) 책의 내용에 대해 너무 꼼꼼히 언급하지는 말아라."
혹시 인터뷰 과정에서 당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질문이 쏟아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이어지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당신은 '개입 비평'을 강조한다. 이런 비평은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된 독서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책을 읽은 독자야말로 역설적으로 당신의 개입 비평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닌가?
바야르 : 정확히 그렇다. 내 의도대로 책을 읽지 않아도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게 바로 내가 강조했던 창조적인 책읽기니까. 혹시 내가 원하는 대로 읽지 않았어도, 나는 비판하지 않겠다. (웃음) 설사 내 책을 읽지 않아도 비판하지 않겠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말했던 대로. (웃음)
프레시안 : 불행히도 나는 국내에 소개된 당신의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바야르 : 그건 내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닌데…. (웃음) 그런데 보통 저자 앞에서 책을 다 읽었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야말로, 전혀 읽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은가? 당신도 그런 경우이길 바란다. (웃음)
프레시안 : 이 인터뷰를 위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여러 독자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 중 열다섯 개 정도를 추렸다. 물론 그 독자들 중에는 당신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독자들도 끼어 있다.
바야르 :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내가 원하는 독자들이다.
프레시안 :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이 이렇게 주목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야르 : 사실은 제목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실용서로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다. 이 책은 모든 독자에게 저자의 권위에 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많은 독자들은 당신의 기대와 달리 이 책을 일종의 '실용적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나 역시 그게 이 책이 많이 팔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 독자는 이런 걱정도 던졌다.
"당신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통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열정적이고 창조적인 대화가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독서의 목적이자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야르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비록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책을 집었더라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그때부터 책을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서 정말로 책읽기를 멈춘 독자가 있다면, 그는 이 책을 진짜로 읽지 않은 독자라고 생각한다.
"당신 앞에 다섯 명의 바야르가 있다!"
프레시안 : 계속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비평을 일종의 "이론적 픽션"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당신의 책 속의 "나"는 피에르 바야르가 아니라 당신의 일부가 투영된 가상의 화자다. 즉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처럼 실제로 당신이 책을 전혀 읽지 않고 강의를 하는 교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바야르 : 그렇다. 내 모든 책은 '이론적 픽션' 그러니까 허구와 이론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내 책에 나온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허구적 화자다. 인문학 서적에서 화자는 으레 저자와 동일시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금도 당신 앞에 한 다섯 명의 바야르가 앉아 있는데 혹시 보이나? (웃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첫 쪽에서 화자는 자신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강의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렇다면 대충 훑어봐도 많은 독서에 기반을 둔 이 책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나? 그러나 이렇게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내 안에는 책을 읽기 싫은, 읽지 않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정체성이 분명히 있다.
내 안의 많은 정체성 중에서 바로 그런 정체성 하나를 선택해 이 책에서 가상의 화자로 선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은 범죄자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책을 죽여 놓고 안 죽였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추리 소설에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범인과 같은.
프레시안 : 그런 하나의 정체성이 투영된 가상의 화자를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왜 비평에서 그런 전략이 필요한가?
바야르 : 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외에도 다른 작품에서 매번 각기 다른 화자를 내세운다. 각 작품에 가장 적합한 정체성을 가진 화자를 내세울 때, 독자가 해당 주제를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구나 이렇게 쓰인 '이론적 픽션'은 한 편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자체로 독자에게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니까.
다만 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자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다 아주 강박적이라는 것이다. (웃음) 그나저나 이렇게 '가상의 화자'를 내세우는 전략에 주목한 이들은 거의 없어서 아쉬웠던 참인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반갑다.
"나의 관심사는 망친 세상을 개선하는 법!"
ⓒ프레시안(손문상) |
바야르 : 예를 들어 내가 쓴 책 중에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이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나는 일단 모든 존재하는 것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 진리와 정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현실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스탈린과 같은 인물의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20세기 초의 러시아와 세계를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했던 이상 자체에는 공감한다. 방금 내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화자가 모두 다 강박적이라고 했었는데, 보통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강박적이기 마련이다.
프레시안 : 놀랍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많은 (창작가, 비평가를 포함한) 작가는 '문학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와 정의 같은 것이 있기는 한가?' 혹은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르 : 자,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다. 내가 25일 강연에서 그런 얘기를 하긴 했지만, 또 방금 그것을 부연하긴 했지만, 그것은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화자'가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진리와 정의라는 이상을 좇아 문학 세계를 개선하려는 것"을 개입 비평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이는 바야르가 아니라 그 때의 '가상의 화자'다. (웃음)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다면…"
프레시안 : 가장 최근의 작업은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오히려 하나의 작가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 혹은 정체성을 하나로 환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다고 가정할 때, 필연적으로 톨스토이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카프카가 <이방인>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바야르 :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굉장히 많은 정체성을 가진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내가 작품마다 한 가지 정체성을 가진 화자를 내세우는 것처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각 작품마다 맞춤한 중심 화자를 내세웠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개입 비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기존에 썼던 작품을 비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새로운 작품을 썼다면 어떻게 활약했을까?' 이렇게 가정하고 작업을 해볼 수가 있을 테니까.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에서 내세운 톨스토이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릿 오하라의 불같은 성격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카프카의 <이방인>을 읽어 보면, 이 소설이 자신을 짓누르는 정치 체제와 갈등하는 시민을 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가능성을 열어두면, 앞으로 우리는 수많은 톨스토이와 카프카의 새로운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아주 멋지지 않은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불량 사회"
프레시안 : 실제로 당신은 개입 비평 혹은 '창조 비평'을 통해서 끊임없이 분석 대상을 '재창조(re-creation)'한다. 그러나 정작 이 때문에 당신은 그런 작업을 하나의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으로 즐기는 듯하다. 작업에서 일종의 편집광적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바야르 : 당연하다. 나는 아주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나한테는 글쓰기가 레크리에이션이다. 그리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경우에는, 프루스트를 연구해야 하는데 그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그 책을 통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도움을 주는 일도 내게는 레크리에이션이다. (웃음)
프레시안 :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돌아가 보자. 방금 학생들의 '죄책감'을 얘기했는데,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수치심(shame)'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독서를 권유하는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수치심이라는 사실은 이율배반처럼 여겨진다.
정작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해방된 사람은 애초에 수치심 따위는 없을 테니까.
바야르 : 한 미국의 친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고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 "책을 읽지 않아서 부끄러워하는 일은, 미국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구성원들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회야말로 좋은 사회가 아닐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 같다. 질문에 대답이 되었나? (웃음)
프레시안 : 충분히 되었다. 한 독자가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이 책에서 소개된 '모욕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책을 딱 한 권만 고르라면?"
(모욕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은 읽지 않았지만 널리 알려진 책을 한 권을 정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이 내세운 책을 읽었다고 할 때마다 1점을 얻는다.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읽었으나 자신은 읽지 않은 책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교양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 없음을 내세워야 승리할 수 있어서, 이름이 모욕 게임이다.)
바야르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일동 웃음)
"우울할 땐 내 책을 읽으라니까"
프레시안 : 당신의 작품에는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당신의 비평에 프로이트는 어떤 영향을 주었나?
바야르 : 잘 알다시피, 나는 정신분석학자다. 그래서 당연히 프로이트를 연구했고, 내 작품 곳곳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얘기했듯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수치심이 중요한 주제다. 프로이트도 무의식의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중요한 주제로 연구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과 프로이트는 서로 통한다.
한 가지 팁을 알려주자면, 기분이 안 좋고 우울할 때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하기가 번거롭고 비싸다면, 내 책을 읽으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똑같은 처방을 받을 수 있다. 내 책을 일주일에 한두 권만 사도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는 비용보다는 훨씬 쌀 것 같은데….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
"지금 <오이디푸스>, <햄릿>을 다시 써야 한다!"
프레시안 : 텍스트의 유동성이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드라마와 같은 상업적인 텍스트들이다. 드라마의 경우는, 제작비 문제로 중간에 있던 인물이 빠지기도 하고, 독자들의 반대 때문에 결말이 뒤집혀지기도 하니까. 그런데 당신은 고집스럽게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고전적인 문학 텍스트만 주로 다룬다.
왜 상업 텍스트는 다루지 않은가? 이 상업 텍스트야말로 개입 비평이 필요한 대상이 아닐까? 당연히 책도 훨씬 더 많이 팔릴 것이라 확신한다. (웃음)
바야르 : 첫째, 일단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작품은 독자들이 다 아는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면 독자들이 화자의 주장을 따라올 수 있다. 둘째, 나는 지금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데, 드라마 작가처럼 살아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각종 소송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는 게 어려워지지 않을까? (일동 웃음)
셋째, 물론 드라마, 영화와 같은 상업 텍스트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드라마는 지금의 시청자들이 개입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고전은 대개는 단 하나의 해석만이 옳은 것처럼 간주된다. 그러니 오히려 그런 작품이 고정돼 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이 얘기하는 평행 우주와 비슷한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작가들의 작품 역시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미처 그들이 주목하거나 부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숨을 불어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은 당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폴리네시아에서 금발 미녀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다른 세계가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바로 우리가 대가라 부르는 작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에서 이런 다른 가능성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프레시안 : 금발 미녀가 아니어서 미안하다. (웃음)
바야르 : 끝나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 금발 미녀의 전화번호를 못 받은 대신 당신의 전화번호라도 받아야 덜 억울할 것 같다. (일동 웃음) 참, 방금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은 비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다룬 적이 있으니까. 덧붙이자면, 에코는 그 부분을 호평했었다. (웃음)
"출판사 편집자도 어쩌지 못한 작품을 고치려면…"
프레시안 : 당신은 <주제에서 벗어나기>,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과 같은 책에서 개입 비평 중 하나인 '개선 비평'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불필요한 여담을 제거함으로써 훨씬 더 짧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개선 비평이란 사실 출판 현장에서 늘 행해지는 것이다. 저자의 초고에서 일관성이 없는 요소를 들어내고, 취약한 인물을 수정하고, 문장과 문체를 수정하고, 제목을 바꾸는 등…. 현실에서 편집자의 손으로 이뤄지는 에디팅과 개입 비평 사이의 경계는 무엇일까?
바야르 : 현실에서 편집자가 원고에 개입하는 것과 내가 하는 개선 비평은 같은 행위다. 단지 나의 개선 비평은 시간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나는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작품으로 개선한다. 그런데 편집자는 지금 진행 중인 혹은 미래에 등장할 작품을 개선한다. 그런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행위다.
"저자의 권력에서 해방을 선언하라!"
프레시안 : 한 독자가 이렇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당신의 시각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독자들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의 국어 교육은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야르 : 바로 그런 독자의 반응이야말로 내게 큰 용기를 준다. 아주 좋은 지적이고, 이 자리를 빌려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프레시안 : 계속되는 질문이다. 또 다른 독자는 이렇게 물었다.
"프랑스 사회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당신의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지금 자신의 작업이 있게 했던 독서 교육은 무엇인가?"
바야르 : 사실 내가 받았던 프랑스 교육도, 한국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이렇게 단순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한국 교육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등에서 강조했던 내용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오히려 이런 고립이야말로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 힘이 되었으니까. (웃음)
프레시안 : 그렇다면, 당신의 학생한테는 어떻게 독서 교육을 하는가?
바야르 : 다만 최근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교사가 되려면 봐야하는 시험이 있는데, 그 시험에서 내 책 <예상 표절>이 문제로 출제되었다. 이런 비주류의 주장이 국가시험에서 채택되는 걸 보면서, 교수로서 '이런 시각을 좀 더 강조하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질문에 답하면, 교육자로서 걱정이다. 한국도 비슷하겠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독서가 지겨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창조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이 좀 더 책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독자들이 주로 찾는 책은 주로 실용서, 처세술 책이다. 당신의 독서법이 그런 독자들한테도 통할 수 있을까?
바야르 : 내가 '책'이라고 말할 때의 책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들, 그러니까 문학적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실용서, 처세술 책만 읽는 독자들이 꼭 문학적 텍스트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내 책이 그들이 문학적 텍스트와 같은 진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만 잘 팔리란 법 있어?"
ⓒ프레시안(손문상) |
바야르 : 일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알기는 하는데, 읽지 않아서 평가를 하기는 그렇다. 프랑스에서도 많이 팔린 작가라서 질투가 나는 건 사실이다. (웃음) 내 책을 꾸준히 한국에 소개하는 여름언덕의 대표를 위해서라도 내 책도 한국에서 베르베르처럼 많이 팔려야 하는데…. (웃음)
프레시안 : 유독 한국의 독자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열광하는 것도 의미 부여가 가능하지 않을까?
바야르 : (주저하다가) 솔직히 말하면, 베르베르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의 판매량이 작품의 우수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국의 독자들이 베르베르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지만. 아까 평행 세계를 말하지 않았나? 또 다른 세계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베르베르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을까? (웃음)
프레시안 : 베르베르는 한국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등, 한국의 팬을 의식한 서비스(?)를 해왔다. 혹시 한국 작가가 쓴 작품을 다룰 생각은 없는가? (웃음)
바야르 :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나라의 작품을 많이 넣었는데, 이번에 방문한 한국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 한국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참, 폴리네시아에서 만날 금발 미녀도 오늘 생각해냈기 때문에 그녀도 꼭 책에 넣을 것이다. (일동 웃음)
프레시안 : 비평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가 있을 텐데….
바야르 : 물론이다. <제인 에어 납치 사건>(송경아 옮김, 북하우스 펴냄)을 쓴 재스퍼 포드를 좋아한다.
프레시안 : 그는 한국에도 소개가 된 작가다.
바야르 : 혹시 인기가 많은가?
프레시안 : 안타깝게도 그의 소설 몇 편이 소개되었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는 있다.
바야르 : 그의 작품도 좋았지만, 한 행사에서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나랑 세상을 보는 시각도 비슷했다. 그래서 '신이 우리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했다. (웃음) 내가 세상에 가능성만으로 남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처럼, 그 역시 새로운 세상을 작품 속에서 구현한다. 비슷한 작업이다.
프레시안 : 혹시 한국의 작가, 작품 중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있나?
바야르 : 27일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리는 좌담회에서 만날 김연수의 단편 소설을 읽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김연수를 직접 만나게 되어서 설렌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중요한 것은 텍스트!"
프레시안 : 혹시 아마존의 '킨들'과 같은 휴대가 가능한 전자책(e-book) 기기를 이용하고 있는가?
바야르 : 아직까지 사용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조만간 사용하고 싶다. 책을 많이 읽는 독서가 입장에서, 그런 전자책 기기는 가볍기 때문이다. 요즘 그런 얘기가 많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위협한다고. 하지만 나는 전자책을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텍스트가 중요한 것이지 플랫폼은 중요하지 않다.
프레시안 : 최근 전자책과 관련된 서비스 중에는 다른 사람이 그은 밑줄을 참조할 수 있는 등 새로운 것이 많다. 창조적 읽기라는 측면에서 이런 서비스의 등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바야르 : 아주 흥미롭다. 그것이 내가 말한 창조적인 책 읽기의 한 모습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책과 삶은 하나다!"
프레시안 : 책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의 책벌레 중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른바 '은둔형 책읽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바야르 : 프랑스 상황은 반대다. 책과 삶은 전혀 괴리되어 있지 않다. 책을 많이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접하는 사람일수록, 불만스러운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에게 책(독서)이란 어떤 의미(존재)인가?
바야르 :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라서 한 마디로 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그냥 당신 마음대로 써라. (웃음)
프레시안 : 끝까지 대답을 안 하면, '밥벌이'라고 쓰겠다.
여러 차례의 재촉에도 바야르 교수는 끝까지 대답을 피했다. 그 대신 내가 떠올린 답변은 이렇다. "내게 책(독서)의 의미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긴, 이런 규정 자체가 바야르 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남은 질문들 인터뷰의 말미에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중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것들을 잇달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프레시안 :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대 한국에서 강탈해간 책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침략해서 가져간 책들을 돌려주는 법'은? 바야르 : 과거 프랑스가 타국으로부터 가져온 문화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것도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강탈한 문화재를 하루 빨리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프레시안 : 앞으로 비평을 준비하는 다른 추리 소설이 있는가? (바야르는 개입 비평의 한 형태로 추리 비평을 내세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내에 소개된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는 틀렸다>, <햄릿을 수사한다>는 이른바 '추리 비평 3부작'이다.) 바야르 : 다음 작품은 추리 비평은 아니다. 하지만 추리 비평도 준비 중인데, 대상 작품은 비밀이다. 실제 사건과 연관되는 작품이라서 더욱더 말하기 어렵다. (웃음) 프레시안 : 혹시 직접 추리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가? 바야르 : 지금까지 해온 '이론적 픽션'이 내게 맞는 스타일이다. 앞으로도 가능한 한 이런 식의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내 책을 사면, 추리 소설과 그것을 비평하는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사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도 즐겁고, 독자의 주머니 사정에도 좋다. (웃음) 프레시안 : 창작의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는가? 또 다른 독서, 여행, 교육, 대화 등…. 바야르 : 나는 여가를 즐기지 않고 거의 일만 한다. 읽고 쓰고 읽고…. 그러니 또 다른 독서? 프레시안 : 특별히 독서를 하는 장소가 있는가? 책을 읽으면서 듣는 음악은? {#8990985773#}
프레시안 : 평생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나? 바야르 : 굉장히 많이 읽었다. 더구나 나는 아까 강조했듯이 '여러 사람'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을 정도다. 프레시안 : '살아 보지 않은' 한국에 대해서 얘기하면? 바야르 :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한 번도 자기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으면서 세계의 다른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며칠 동안 경험을 했기 때문에 '살아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웃음) 한국에서의 얘기는 앞으로 낼 책에서 자세히 써볼 생각이다. |
이 인터뷰에는 '프레시안 books'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서 신청한 독자의 질문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출판사 여름언덕에서 바야르 교수가 직접 서명한 책을 보내드립니다. 질문이 채택된 독자의 명단(ID)은 아래와 같습니다. @sveinoz, @stoneswitheyes, @daekeunlee, @bookrws, @rookieu, @zcorn, @ascreamk 도서관여행자, 산호섬, 보보, shkim6664, 휴먼이당, 비밀, NaUjuin, 열시에산다, 물음표, mira-da (이상 17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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