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홍빙의 강연은 흥미로웠지만 모든 것을 금융 과두 세력의 음모로 몰아가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주장과 <화폐 전쟁>의 내용들에는 단순히 음모론이라고 치부하여 무시하기 힘든 예리한 지적이나 직관들이 곳곳에 있지만, 그 장점들이 자극적인 내용과 뒤섞여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화폐 전쟁>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더 큰 반응을 얻었고, 그 뒤로 시리즈의 2권(2009년), 3권(2011년 : 한국은 미출간)까지 출판되었으며, 관련 주제를 다루는 비슷비슷한 제목의 책들도 잇따라 출간 중이다. 사실 이 책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랜덤하우스 펴냄)도 중국 관영 CCTV에서 제작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별 기대 없이 들었다.
▲ <화폐전쟁, 진실과 미래>(중국 CCTV 경제 30분팀 지음, 류방승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
이 책은 "국가의 종합적인 국력이야말로 화폐를 움직이는 큰손"(90쪽)이며, "한 국가의 국력이 진정 강성해지면 개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그 국가의 화폐가 자연스럽게 위대한 화폐, 대국의 화폐가 될 수 있다"(104쪽)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각국의 화폐를 주인공으로 국제 화폐 시스템의 측면에서 바라본 강대국 흥망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와 국가를 따라가면서 파운드, 달러, 엔, 유로, 위안이라는 주요 강대국 화폐를 주인공으로 하여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파운드에서는 영국에서 국가가 은행을 매개로 하여 조세를 담보로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통해 군비를 수월하게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영국이 다른 나라를 제치고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파운드화가 최초로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는 내용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2장 달러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이 미국에 세계의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따라서 미국의 달러가 새로운 기축통화가 되고 이후 베트남전쟁, 엔, 마르크 등과의 경쟁, 닷컴 붐과 이라크 전쟁,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에 이르기까지 달러의 흥망성쇠 이야기가 다채롭게 전개된다.
1장, 2장이 다루는 시기는 자본주의가 발생하여 여태까지 진화해온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 국가 간에 패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의 역사로도 설명 가능할 것이다.
"각국의 화폐가 세계 화폐 시스템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는 그 국가의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거꾸로 화폐의 지위를 통해 해당 국가의 경제 발전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계 화폐 시스템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화폐의 정치화'이다. 이러한 화폐 전쟁은 한층 격렬한 방식으로 폭발하기도 하는데, 심한 경우에는 실제 전쟁을 불사하기도 한다." (132~133쪽)
3장 엔, 4장 유로, 5장 위안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각각의 국가 혹은 지역에서의 화폐가 미국이 지배하는 달러 중심의 세계 화폐 시스템과 어떻게 경쟁해왔으며, 또 어떻게 경쟁하고 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으나 냉전이라는 특수한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발판으로 다시 세계에서 제일가는 산업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에 엔은 달러를 위협하는 화폐로 성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 속에 자본 시장을 개방하고 플라자 합의에 서명하면서 엔은 대폭 평가 절상되었고 이에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었다 꺼지면서 결국 일본은 지금까지도 불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엔도 국제화에 실패한 화폐가 되었다.
유럽은 강력한 달러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연합이라는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30여 년이 넘는 지난한 갈등과 협의의 과정을 거쳐 1999년 1월 지역의 초주권 화폐인 유로를 출범시켰으며 유로는 바로 세계 제2의 국제 통화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로 역시 미국의 견제와 압력 속에서 달러의 세계 패권을 더 이상 흔들지 못했으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각국의 재정 위기로 전화하면서 기로에 처해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으로 새롭게 달러의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는 위안의 입장에서 엔과 유로는 하나의 교훈이다. 현재 중국 경제 성장의 양상, 즉 제조업 발전으로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증시 및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고 있으며, 미국의 국채를 다량 보유하고 있고, 환율 평가 절상의 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은 일본의 경로와 유사하다.
저자들은 내수를 키우지 못하여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고 미국의 압력에 쉽게 굴복한 일본의 선례를 중국이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문한다. 한편, 저자들은 달러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점진적으로 위안화의 국제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주장한다.
특히 저자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국이 독점하는 통화 시스템에서 벗어나 범세계적인 기구가 관리하는 초주권 기축통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2009년부터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 인민은행 총재가 주장해온 IMF의 특별인출권(SDR)의 사용 범위를 강화하자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 간의 원만한 정치적 협조를 통해 초주권적인 기축통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중국 일각에서 난무하고 있는 위안화가 앞으로 새로운 기축통화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논리보다 좀 더 냉철하고 차분하게 현실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이 책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가 공들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폐'를 단순하게 투명한 교환의 매개 수단이나 가치 척도라고 기능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권력을 투사하는 사회적 제도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화폐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화폐를 '사회적 관계'로 보고 화폐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여러 사회 세력들의 갈등과 협력이라는 틀로 역사와 제도를 분석하는 책인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은 '화폐'라는 제도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에서와 같이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단순히 세계 화폐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경쟁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군사 부문의 경쟁에서 비롯한 기술 혁신이 산업 부문의 혁신으로 이어지고 이에 고도 금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다면적인 틀로, 그리고 그로 인한 헤게모니 교체의 과정으로 분석하고 있는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도 자본주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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