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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로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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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로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

[親Book]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미로의 시련>

젊은 날, 앎에 대한 갈증에 시달릴 때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건네준 책이 여럿 있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와 <성과 속>도 그런 경우다.

특별히 엘리아데의 표현에 빗대어 말한다면, '역사의 공포'의 연대를 지나는 궁핍한 청년에게, 그의 책은 태곳적부터 함께한 위대한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었다. 나에게 육체의 어미 자궁 속에 있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엘리아데가 다시 이어준 탯줄을 따라 우주 창조의 자궁 속으로 기어들어가던 느낌은 여전하다. 엘리아데는 신화, 우주, 재생이라는 낱말로 더 웅숭깊고 더 넓은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엘리아데로 시작한 책 읽기는 조셉 캠벨을 만나면서 더 흥미로워졌다. 엘리아데가 멍석을 펼치고 캠벨이 재주를 노는 셈이었다. 이윤기를 일찌감치 주목한 것도 다 이들 덕이다. 신화를 아니 문학과 예술이 새로 보였고, 삶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지식을 추구하다 지혜를 만났을 적에 느꼈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아쉬웠던 것은 엘리아데의 개인사를 도통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고 미국에서 오랫동안 대학 교수를 지냈다는 것이 저자 소개란에 나오는 공통점이었다. 사전식 정보로는 그의 삶을 복기할 수 없었다. 단, 그가 유목민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그것이 그의 학문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만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다 이번에 엘리아데 '신도'들이 환호작약할 책을 만났다. 클로드-앙리 로케가 묻고 엘리아데가 대답한 내용을 기록한 <미로의 시련>(김종서 옮김, 북코리아 펴냄)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장 엘리아데 개인사에 대한 정보가 그득 담겨 있어 흥미롭다. 엘리아데는 자신의 일기를 발췌해 두 권의 책을 낸 바 있는데, 묻는 이가 이를 바탕으로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는 식으로 대담이 진행되고 있는 덕이다. 그는 자서전도 펴냈으나,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지라, 당분간 이 책이 국내 독자들에게 엘리아데 인생 행보를 엿보는 데 가장 좋은 책이 될 성싶다.

▲ <미로의 시련>(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김종서 옮김, 북코리아 펴냄). ⓒ북코리아

내가 그러했듯 국내의 많은 독자는 엘리아데의 인도 생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다루는 신화와 상징의 세계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다. 다른 책들은 여전히 서점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에 반해 그의 박사 논문인 <요가>는 절판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도 경험이 엘리아데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내용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큰 보람을 느꼈다.

엘리아데가 인도로 가 요가를 연구하기로 한 것은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로마에 있을 적에 학교 도서관에서 다스쿱타의 <인도 철학사>를 만났던 것이다. "앞으로 비교 철학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철학, 특히 요가를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다스굽타와 그의 후원자인 마하라자에게 보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답신을 받고 인도로 갔으니, 엘리아데는 행운아이기도 하다.

엘리아데는 인도에서 깨달은 바를 세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의 신화론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들이 삶을 누리고 동시에 컨트롤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정신생리적인 테크닉에 대한 지식이 인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밝힌다. 오랫동안 요가를 수련하면서 어떤 의례를 하게 되면 인간 생활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를 그는 어떤 "테크닉에 의해, 또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도 삶을 재성화(再聖化)하고, 자연을 재성화할 수 있음"이라 정리한다. 의례를 통한 재생은 엘리아데가 주목하는 현상임을 기억한다면 이를 인도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상징을 '보는 것'의 가능성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이미지와 상징에 의해 종교적으로 감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는 뜻이다. 벵갈의 한 마을에서 남근의 상징인 링감을 소녀와 부인들이 만지작거리며 장식하는 장면을 보며 깨달은 바라고 회상한다. 다른 식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마리아상을 신심어린 눈으로 본다는 것은 단자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동정녀 마리아나 신의 어머니 또는 여신 소피아, 그리고 신성한 지혜 등속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신화 세계에 나타나는 풍요로운 상징을 유연하게 해석하는 엘리아데의 내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 듯싶다. 엘리아데 신화의 고갱이가 여기에 담겨 있지 않나 싶어서다. 그는 신석기인을 발견했노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상징들은 매우 고대적인, 신석기의 기반을 갖고" 있다.

"농경의 발명, 이게 참 중요한 결과를 낳았는데, 그것이 특정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 인간이 순환의 관념, 태어나 살고 죽고 재생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우주적 순환 주기에 통합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농경 덕분이었어요. 처음으로 인간의 상황을 꽃이나 식물의 생명에 비교한 것이 신석기 사람이었죠. (…) 인간의 상황은 식물의 운명을, 나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무한한 순환을 공유하게 되었지요."

이 말은 신석기의 유산에 따라 인류는 영적인 통일성과 기층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분석이 범상치 않은 것은, 엘리아데의 신화론이 융의 집단 무의식이나 진화 생물학의 연구 성과와도 상당히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아데가 현대 사회가 신석기 유산을 상당히 훼손하거나 폐기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나, 엘리아데는 최초의 계시라고도 달리 말하는 것이 소멸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도 속(俗)의 세계에서 성의 드러남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라면 엘리아데의 말에 동의할 터이다.

<미로의 시련>을 읽으며 깜짝 놀란 것은 종교학자에게도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전이 현상이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엘리아데는 이를 조심스럽게 유혹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난장판 의례를 일례로 든다. 난장판이 시작되면 규범은 폐지되고 모든 가치가 전도된다. 근친상간과 공격성이 정당성을 띤다.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이런 의례가 벌어지는 것은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한 재생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율법이 폐지되고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황홀경에 홀리지 않기란 좀처럼 어려운 법. 그래서 엘리아데는 말한다. "자신을 사로잡고 유혹할 수 있는 이국적인 형태들과 직면하는 것은 정신적 질서에 위험한 일"이라고. 좀 엉뚱한 말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모험은 책읽기뿐인 모양이다.

국내에 엘리아데의 소설이 몇 권 번역되어 있지만, 대학자의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했다. 일종의 연역이라 본 것이다. 보편성을 깨달았으니, 작품을 통해 그 구체성을 실현하고 싶은 지적 유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보니, 엘리아데는 작가로서 열망이 대단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수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했다고 말한다. "이 세계의 어떤 개념, 종교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개념을 증언하고 사람들이 그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도움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란다.

대담은 그리 길지 않지만, 엘리아데의 삶과 사상을 아는 데는 상당히 유효하다. 지적 성장과정이 잘 드러나 있고 그의 신화론이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신화 열풍이 한풀 꺾였지만, 스스로 더 깊이 그 세계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하다. 단지, 책의 부제로 '엘리아데 입문'이라 되어 있는데 적절치는 않아 보인다.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어서다. 내가 그러했듯, <성과 속>과 <우주와 역사>를 먼저 보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성싶다.

책 말미에 제목을 왜 "미로의 시련"이라 지었는지에 대한 엘리아데의 말이 나온다. 자신의 삶을 율리시스적 모험과 일치하는 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란 중심, 보물, 의미를 지키는 방어 장치로, 때로는 주술적이기도 합니다. 테세우스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미로에 들어서는 것은 통과의례일수도 있지요. 이 상징은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중심을 향해, 자아를 향해, 인도 용어를 쓰자면 아트만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존재의 모델입니다."

신화는 우리 삶의 원형질이다. 신화를 이해하고 그 상징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뭇 삶은 늘 미로 속에 갇힌 듯싶다. 좌절하고 절망할 일이 아니다. 모든 미로는 시련이기도 하다. 거기를 헤쳐 나올 적에 비로소 진정한 것에 이를 수 있으니 말이다. 엘리아데의 삶도 그러했다고 고백한다.

신화를 통해 고통과 방황에 큰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오늘 우리 삶의 누추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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