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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유령들…그들을 못 보는 당신도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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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유령들…그들을 못 보는 당신도 괴물이다!"

월요일 새벽, 학교 셔틀버스를 타고 원주로 내려가며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카이스트(KAIST)에서 네 번째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후였다.

사태 자체도 심란하였지만 원주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 사건을 토론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 학기에 학생들과 함께 주로 토론하고 있는 주제가 '동시대인과 동료'였다. 어떤 사건을 보며 우리가 동시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다면 왜 발견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학기 초부터 생각을 나눠왔다.

학생들은 카이스트 사태에 대해서 어떤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목숨을 끊은 친구들을 동시대인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 토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애써 감추고 있던 마음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만 같았다. 만약 학생들이 "그게 저희와 무슨 상관이에요?" 하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예 냉소적인 침묵을 날린다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밤새 이걸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하자고 결정을 봤지만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네 번째 자살이 있고 난 다음 언론이건 트위터에는 카이스트에 대한 글이 넘쳐나고 있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온갖 비판과 대책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두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슬픔이 묻어나는 글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남표를 공격하고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을 성토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읽는 내내 어떤 찝찝함 같은 것들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건 단지 정서의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사건에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예감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글은 아무리 날카롭다고 하더라도 동시대인의 글은 아닌 셈이다.

다른 하나는 이 수많은 글들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한 진보 논객이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가끔 우리는 우리글을 읽지 않아도 이미 우리 편인 사람들을 향해서 말을 한다. 일종의 팬들에게 말을 거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 자기 동아리 안에서 맴돌다 소비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글은 읽지 않아도 될 사람과 유대감을 재확인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을 동시대인으로, 동료로 초대하는 행위가 아닌가. 글이란 결국 동시대인을 동료로 초대하는 정치적 행위이며, 그 정치적 행위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교실에서 만나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꿈꾸는 것은 그들과 내가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다.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너와 나의 운명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논평만이 아니라 그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공명해야한다. 각자의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는 사건이란 사건으로서 무의미하며,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어주지 못하는 글이란 글로서 가치가 없다.

비판하고 성토하는 수많은 글에서 바로 이런 '초대'를 느낄 수 없었다. 비상한 주장은 많았지만 누구를 초대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떤가? 교실에서 나는 학생들을 어떻게 초대할 것인가? 그 언어가 나에게는 있는가?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 토론을 통해서 나는 학생들과 어떤 기억을 서로 꺼내고 연결함으로써 비로소 이 사건을 사건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일단 부딪쳐야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 도착하고 나서, 약속된 학생 세 명을 만나 아침을 같이 먹었다. 학교 다니는 고충이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카이스트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학생이 먼저 불쑥 대답하였다. "우리 학교에서도 2~3년에 한 명이 자살하는데……."

먹먹했다. 카이스트라서 특별하게 다뤄지는 것 아니냐는 반응인가 싶었다. 몇 년 전에 원주 캠퍼스에서도 학생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사건은 지역 신문에 아주 조그맣게 실렸다고 한다. 소속도, 이름도 그냥 아무개 대학생이라고. 죽어서도 이름을 얻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불쌍하죠. 우리도 등록금 때문에 고생 많이 하고 경쟁도 치열하고 하니까요. 뭐, 카이스트 학생이라 더 알려지는 것도 있겠지만 이걸로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같이 밥을 먹은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평균이 의미 없는 무한 경쟁

▲ <문화의 해석>(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문옥표 옮김, 까치 펴냄). ⓒ까치
수업을 시작하며 학생들에게 이 죽음이 동시대인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지, 동료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나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지에 대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나랑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의외로 몇 명 되지 않았다. 동시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고, 몇 명은 동료의 죽음으로까지 여기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있었던 상지대학교와 다음 날 덕성여자대학교에서도 이 비율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수의 학생들은 이 죽음에서 아주 강한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죽음과 자신들이 어떤 강도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벌 중심 사회 그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인가? 죽기 살기로 공부와 경쟁을 해야 한다. 포기는 곧 패배자다. 어렸을 때부터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가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배워왔다. 배움보단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 '1등1등1등1등1등1등1등1등1등1등!'을 해서 최고를 향해 올라간다. 1등을 향해 갈수록 주위엔 낙오자가 생기고 점점 외로운 길로 간다. 나중에 뒤 돌아 보았을 때 그들은 전쟁터에서 혼자 살아남은 1인이 돼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는 한국 교육이라고 본다.

주위를 바라보는 것, 잠시 쉬었다 가는 것, 다함께 할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평균 소득 2만 달러가 넘었다고 얼마 전에 들었다. 하지만 평균이다. 이미 소득이라는 시소는 균형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기울려져 있다. 평균 소득 2만 달러는 개뿔! 이제 점점 균형을 맞춰야 생각한다. 1인이 아닌 다함께 성장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씀보, 상지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비록 그들이 영재 교육을 받고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궤도를 걸어온 친구들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에 시달려왔다는 것은 일등이나 꼴등이나 '딱 중간'이나 매한가지였다. 이 사태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경쟁의 강도와 목표와 방향이 달랐을 뿐, 한 명만 살아남는 그 외롭고 지옥 같은 경쟁을 통과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씀보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평균'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이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고 삶을 지배하는 것은 서바이벌 게임의 규칙이다. 카이스트와 상지대는 수능 서열 체제로 본다면 아주 먼 거리에 위치하였지만 그곳이나 여기나 서바이벌 게임장인 것은 매한가지인 것이고, 이것이 학생들이 공유하는 동시대성이었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그의 책 <문화의 해석>(문옥표 옮김, 까치 펴냄)에서 동시대인과 동료를 이렇게 설명한다. 동료란 시간과 공간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의 무리이다. 이들은 적어도 조금씩은 서로의 생활사에 포함되어 있고 개인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면서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은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회적 관계는 가지고 있지만 통상적으로 만날 일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동시대인은 적어도 시간에 대한 감각은 공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장치란 무엇인가?>(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에 수록되어 있는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인의 의미를 동료에 아주 가깝게 몰아간다. 그는 동시대성이란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히려 시대와 "너무 완전히 일치하는 자들, 모든 점에서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는 자들이 동시대인이 아닌" 것이 된다. 그들은 시대를 보지 못하고, 시대의 어둠을 보지 못한다.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둠'을 보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씀보는 시대의 어둠을 본 동시대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GDP 2만 달러를 회복했다는 것에 환호하고 그 선전에 농락당하고 있을 때 씀보는 "개뿔!"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런 '평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아무 의미도 없다. 평균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어둠을 이렇게 명료하게 직시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실 평균은 의미가 있다. 평균은 바로 탈락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이번 카이스트 사태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이 징벌적 장학금이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학점이 3.0 이하가 되면 0.01씩 떨어질 때마다 2010년 기준으로 약 6만 원을 다음 학기 시작 전에 내야한다. 2.0 밑으로 떨어지면 최대 600만원이다.

이 제도는 2008년에 서남표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 하에 시작했다. 학점 3.0. 평균 학점 B이다. 고등학교라면 '우'에 해당한다. 아마 평균에 가까운 학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평균'은 '중간은 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균은 곧 탈락을 의미하고, 탈락은 징벌로 이어진다.

탈락에 대한 공포, 모욕 주는 사회

그렇게 한국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의대, 약대, 한의대 등등을 포기하면서 자기가 배우고 싶은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이렇게 학교에 왔지만 패자는 확실하게 짓밟히는……. 이미 학교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 제도가 확실히 그렇다.

▲ <장치란 무엇인가?>(조르지오 아감벤 지음, 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

이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 제도는 패자에게는 일말의 기회가 없는. 아니 기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에게 모독과 치욕감을 준다. 패자에게 박수? 그런 건 없다 무조건 학점 3.0이 넘지 않으면 카이스트란 집단 안에서는 무조건 패자가 되는 사회. 한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만약에 우리 학교에서 징벌적 등록금 제도가 생겨서 등록금을 내라고 하면 ('아니, 자살하지 말고 그냥 자퇴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바로 그만둘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경국, 상지대)


이 징벌을 당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모욕감이다. 연세대 원주 캠퍼스, 상지대 그리고 덕성여대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해 동시대성을 느낀다고 말한 친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자살한 학생은 자신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늘 칭찬을 듣고 1등만 하던 아이들이 모욕을 당했을 때 그 상처를 회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욕 주는 사회, 모욕이 제도화된 사회. 이것이 학생들이 이 카이스트 사태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동시대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모독은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1등, 꼴등을 정해놓고 비교를 해놓으면서 선의의 경쟁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경쟁이 아닌 모욕으로 변질이 된다. 내가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이다. 한참 사춘기로 민감한 시기일 때였는데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담임선생님은 자리를 나누어 버리셨다.

반 등수대로 일등부터 가운데 줄에 앉게 하고 나머지 성적은 양쪽으로 나누어서 자리에서 성적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짓궂은 친구들은 성적을 말 안 해주더니 왜 그런지 알겠다면서 놀리기 시작한다. 이런 불만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담임선생님은 그런 모욕이 싫으면 공부를 해서 다음 시험 때 성적을 높여서 자리를 바꾸라고 하신다.

가운데 자리를 빼놓고 양쪽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의 마음의 상처는 이미 크게 벌어져 버려서 "공부도 못한다고 나눠서 앉힐 거면 공부 못하면 안 나오면 되겠네" 하며 쉽게 포기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오히려 약 아닌 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카이스트 사건도 마찬가지다.

경쟁을 통하여 학생들을 더더욱 분발시키려 하였지만 그로인한 스트레스와 모욕감이 아이들을 벼랑으로 밀고 있는 것 이었다. 카이스트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미래의 아까운 인재를 하늘로 보내고야 만 것이다. (주섭, 상지대)


아비샤이 마갈릿은 그의 저서 <품위 있는 사회>(신성림 옮김, 동녘 펴냄)에서 바로 이 모욕을 다루고 있다. 모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다른 이를 모욕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는 경우이다. 마갈릿은 전자가 없는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라고 부르고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품위(decent) 있는 사회'라고 부른다.

품위라고 하면 교양과 도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decent'에는 '기준에 맞는', '예의바른', '상당한'이란 뜻이 있다. 'decent salary'는 상당한 보수라는 뜻이고, 'decent work'은 인간이 할 말한, 인권이나 노동권 등 다른 기준으로 보더라도 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과 같은 것은 전혀 'decent work'가 아닌 것이다.

마갈릿은 모욕을 "자존감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 행동이나 조건"이라고 규정한다. 모욕은 인간의 명예나 자존감에 심각한 훼손을 가한다. 자존감은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다. 마갈릿은 자존감이 없으면 가치에 대한 인식도, 인생은 의미 있다는 인식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인생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제도적 모욕이란 이런 모욕이 문자 그대로 제도화되어 있는 사회이다. 예를 들어 민권 운동 이전 미국 남부의 흑인 차별 정책이 바로 그런 제도적 모욕이다.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들의 자리가 비어 있어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반면 백인들은 언제든지 흑인에게 자리를 비킬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흑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도 전혀 '환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마다 깨닫고 치욕감을 느껴야한다. 이게 바로 제도적 모욕이다. 주섭이 학교에서 당한 모욕이 바로 이런 제도적 모욕이다. 내가 어느 자리에 앉는지가 내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취급을 교실에서 당해야 하는지 훤히 다 말해준다.

고등학교 때뿐만이 아니다. 학점에 따른 이런 징벌 제도는 많은 대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덕성여대에서는 2.5 밑으로 학점을 받게 되면 다음 학기에 수강 학점에 제한이 가해진다. 너는 그만큼 많은 공부를 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제도적 모욕이 인간에게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이것이 제도적으로 정당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서도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마갈릿은 버나드 쇼의 "구시대의 처벌 방식보다 현대의 처벌 방식이 더 모욕적"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모욕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구시대의 처벌은 피해자의 고통을 숨기기보다는 공개함으로써 한편에서는 구경거리로 삼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처벌은 범죄자를 대중으로부터 숨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감옥을 경험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고통에 절대 공감할 수가 없게 된다.

유령이라는 동시대인

▲ <품위 있는 사회>(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제도화된 모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절대 공개적으로 공감을 받을 수가 없는 모욕이다. 제도가 이미 모욕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등록금을 징벌로 내야 하는 학생이 아주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공감을 얻어내기는 힘들다.

아마 대부분 학교의 제도를 탓하기보다는 '네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냐?' 하는 핀잔이나 듣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제도적 모욕은 가장 고통스러운 모욕, 모욕스러운 고통이 된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없는 인간,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 없는 인간, 그런 인간은 마치 자신이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처럼 자신을 숨기고서야 비로소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숨겨야 사회에 '포괄'될 수 있는 인간, 이 인간이 바로 투명인간, 유령이 아닌가?

아픔과 외로움의 이면에는, 그것에 침묵하는 친구들이 있다. 고통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내밀하고 사적인 것'으로 만든 세력들, 그리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침묵을 폭로하는, 또는 그 당사자들에게 그 사실을 인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자살이다.

얼마 전에 카이스트에서 네 명이 자살했다.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내가 조금만 도와줬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내비치고, 그 느낌을 서로 공유했다. 카이스트나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그 후회를 '자살 방지 대책'이라는 좀 더 체계적인 것으로 말하지만, 그 본질은 남겨진 친구의 후회와 비슷했다. '여태까지 듣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듣도록 노력하겠다'가 그 본질이 아닐까.(정섭, 연세대 신촌 캠퍼스에서 원주 캠퍼스로 청강 오는 학생)

학생들이 느끼는 동시대성의 세 번째 국면이 바로 이런 유령으로서의 공유이다. 우리는 모두가 유령인 셈이다. 유령으로서만, 내가 내 상처에 대해서조차도 침묵할 경우에만 비로소 이 사회에서 살아갈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살아있는 존재가 스스로를 유령으로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모욕이 아닌가?

마갈릿은 이것을 "사람이 간과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식민주의자들이 토착민에게 가하던 모욕을 상기시킨다. '훌륭한 아랍 사람은 보이지 않으면서 일해야 한다'는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은 바꾸면 자신들의 눈앞에 토착민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없는 존재로 치겠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로마의 '주인'들은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섹스를 했다. 노예들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수치심 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없는 존재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모욕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카이스트의 문제이기 때문에 카이스트 학생들이 이 사태의 당사자들이며 가장 잘 알 것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오히려 유령들은 내부의 이방인이다. 이 내부의 이방인은 내부인에게 오히려 더 잘 안 보인다. "비록 힘들고 경쟁이 치열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학교가 그렇게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에요" 하고 말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말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들이 동료의 죽음에 대해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존재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유령과 동료가 아닐 뿐이었다.

유령의 속사정, 유령의 고통은 유령이 더 잘 안다. 덕성여대의 토론에서 한 학생은 다른 학생들이 "카이스트와 우리 학교는 다르지만"을 꼭 전제하여 말하자 정말 그렇게 다른가, 누구에게 다른가를 질문하였다. 카이스트보다 덕성여대가 더 자유스럽고 경쟁이 덜하다고 하지만 자기에게는 덕성여대도 숨 막히는 공간이기는 매한가지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걸 공유하고 공감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이 학생에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자기는 카이스트의 사태에 대해서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이 말하는 것처럼 동시대인이란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며 각자의 위치가 무엇이고,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가 동시대인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카이스트의 것은 카이스트에게, 동시대인의 것은 동시대인에게" 돌려줄 줄 아는 지혜이다.

구체성도, 보편성도 없다!

카이스트의 것은 무엇이고, 동시대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카이스트 사태를 카이스트 '제도'와 카이스트 '사건'으로 구분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카이스트에 대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카이스트의 특수한 제도에 대한 이야기에 묻혀있다.

그러나 지금 카이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카이스트의 것과 동시대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카이스트라는 별난 대학에서 벌어진 별난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토론하는 와중에 대단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시대인이라고 생각하다고 하던 학생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유보적인 입장으로 점차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카이스트의 제도를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자살한 학생의 고통이나 삶에 대해서도 짐작만 있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카이스트 학생들에 대한 '르포'들도 하룻밤 휙 내려가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은 것들이 몇 개 있을 뿐 학생들의 심층을 다루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가 자존감에 엄청난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유령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우리 쪽에서의 짐작에 따른 동일시가 있을 뿐이지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사건에서 보편성이 잘 이끌어져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이라는 말로 사건의 보편성을 설명하지만 지나치게 헐렁헐렁한 말이었다. 한 친구의 표현을 빌리면 분명히 우리 일이기도 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일인데 대부분의 기사와 칼럼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가 우리 사회에서 동시대성을, 동시대인의 형성을 방해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어떤 이야기가 카이스트의 것과 동시대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교실을 통하여 동시대인을 꿈꾸는 나에게 학생들이 다시 던진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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