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4월 8일
괴상망측한 모습의 경찰이 남반부 조선에 나타나는 상황을 어제까지 몇 차례 그려보았다. 공권력의 다른 담당자인 검찰과 법원은 경찰보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키는 편이었다는 사실을 학병동맹사건 처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장택상이 미군정 간부를 끼고 박흥식을 석방시켰을 때 검찰과 법원 관계자들의 반응을 3월 2일자 일기에서 소개했는데, 거기에서도 법원과 검찰이 경찰처럼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고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 김용무 서울법원장의 "이 사건의 발단은 소위 영어 마디나 하는 자의 중간 모략으로 군정을 모독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 발언은 공직자로서 당당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3월 11자 일기에서는 바로 그 김용무가 김계조 사건의 담당 판사 오승근을 다른 부서로 전임시켜 오승근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는 장면을 소개했다. 김용무는 1945년 10월 서울법원장(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법원의 중립을 위해 한국민주당(한민당)을 탈당했지만 그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2월 25일 재판소 현직 판·검사 전원의 8할 이상의 연명으로써 대법원장 불신임안을 법무부 당국에 제출한 바 있었는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개월이 가깝도록 대법원장과 법무당국으로부터 아무런 태도 명시가 없으므로 다시 이 문제를 촉진시키고자 22일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재판소 회의실에 판·검사 40여 명이 모여 그간의 중간 보고와 목적 관철을 위한 중대 토의를 하였는바, 대법원장 불신임의 이유는 일전 모지에 발표된 바와 같은 정치적 관련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대법원장 개인이 신성한 사법권을 그르치게 한 중대 이유라 하며 유야무야로 해결될 경우엔 총사직까지도 결행할 단호한 각오를 가지고 있으나 건국도상의 치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직장을 사수하고 끝까지 공명정대한 사법권 독립을 위하여 불신임 문제를 관철하고자 하는 바 앞으로 결과가 극히 주목된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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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무는 4월 3일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5월 16일 러치 군정장관이 사직서를 반환하고 그를 유임시켰다. 그리고 이틀 후 오승근 판사가 장흥지원으로 발령받고 바로 사직했다. 그 직후 오승근이 정판사 사건 변호인단에 들어가 활약한 것을 보면 좌익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고, 김용무의 진퇴를 둘러싼 갈등은 좌우익 간의 알력이 투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법원이 경찰처럼 철저히 타락하지는 않았어도 정치 투쟁에 휘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법원 분위기를 보여주는 기사 하나를 붙인다.
서울 3법원 판·검사의 대법원장 金用茂에 대한 불신임 문제에 관하여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는데, 2일 휴직 중이던 김용무의 재등청에 따라서 문제는 또다시 급진적 전환을 보이고 있다. 즉 이 김용무 불신임안 제출에 앞장을 선 판·검사의 좌천설과 아울러 사법부 요직과 또한 중요한 판·검사의 자리에 모 정당의 요인들의 기용설 등이 떠돌고 있어, 사법부 내의 공기는 심히 미묘할 뿐만 아니라 세간의 이에 대한 유언이 구구한 이때에 문제의 초점이 되어 있는 인사 관계에 대하여 사법부 총무국장 姜仲仁은 6일 오전 10시 경 법조기자단과 다음과 같은 1문 1답을 하였다.
(問) 근일 중에 사법부에 인사 이동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答)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미리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거니와 요즈음 신문 지상에 말썽이 되어 있는 상부층의 인사 이동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총무국에 인사과가 엄존한 이상 그 기구를 거치지 않는 암흑 인사가 있을 리 없다.
(問) 그러나 항간에는 모 정당 요인들이 사법부 요직을 대부분 차지하게 된다는 풍설이 있는데?
(答) 그것은 억측이다. 만약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앞두고 하는 반동 세력의 모략일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가증하게 생각하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의 정당 정치 시대에 있어서도 정당 세력이 사법부 내에 침투한 사실이 없거늘, 장차 3권 분립 제도가 가장 확립되고 따라서 사법권 독립을 어느 나라 보다 존중하는 미국 군정 하에 있어서 사법부를 일개 정당에 내맡길 리가 없지 않은가
(問) 그러면 얼마 전 판·검사 6·7명이 모 기관의 조사를 받았고 그들이 이번 이동에 좌천된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가?
(答) 판·검사 6·7명이 모 기관에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만일 있다고 하면 조사를 받은 그들의 불유쾌와 그 영향을 생각할 때 그 책원지를 알고 싶다. 그들이 좌천된다는 모략선전에 있어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빛이 불의 생명이라면 공명정대는 사법의 생명이다. 사법의 생명인 공명정대 즉 불편부당을 지속하는 데는 사법부 내의 정당색을 일소하는 동시에 판검사의 신분을 보장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 나라 사법권 독립의 나라인 미국의 군정 하에서 아무런 허물도 없이 또 그 허물에 대한 증좌도 없이 판·검사를 좌천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이런 가증스러운 모략선전을 하는 책원지를 추궁하라. 그리하여 사법부를 망치고 조선의 자주 독립을 지연시키는 그들 모략배를 추궁하여야 하는 것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問) 최근 사법부 공기에 대한 소견은 어떤가?
(答) 사법인의 심경은 명경지수에 비할 수 있다. 평시에는 모든 사물이 바로 영상되므로 족하다. 그러나 지수에 돌을 던져 보라. 파동이 일 것이다. 그리고 지수를 교환하여 보라. 노도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 사법인은 언제나 지수의 경지에 머물러 있기를 즐긴다. 그러나 이제 말한 것과 같은 모략의 돌을 우리의 가슴에 던져 온다면 약간의 파동을 느끼는 데 그칠 수 있으나, 그 이상 불측의 사태가 부닥쳐 온다면 우리 가슴에 파사(破邪)의 광풍노도가 일어날 것이다. 나는 최근 음산해진 사법부의 공기에 적지 않은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럴 때마다 창문을 열고 덕수궁의 석조전을 건너다보면서 스스로 자위와 용기를 얻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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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해진 사법부의 공기"에 착잡한 마음을 은근히 표명하던 강중인(1908~?)은 일제 시대의 검사 경력으로 <친일 인명 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이지만, 민전 토지문제 연구위원으로 활동했고 1949년 법조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중 전쟁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월북했다. 법정에서 남로당 가입 동기를 밝힌 진술에서 당시 한 '좌익 법조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일정(日政) 당시에는 내가 내 한 몸을 구하기에 여력이 없었습니다. 8·15 해방을 맞이하자 피고는 이때야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까 함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투쟁하던 위대한 애국자들이 해방된 조국을 찾아 들어옴을 볼 때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 후 피고는 남로당에 가입을 작정하였던 것이며, 법맹에도 초창기부터 가입하였습니다."(<서울신문> 1949년 11월 27일자. <오마이뉴스> 2002년 11월 10일자 "연행 날짜, 수사관, 배후 세력은 알지만 구속한 검사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재인용.)
강중인이 위 인터뷰가 있은 직후 터진 정판사 사건의 변호인단에 오승근과 함께 참여한 것을 보면 총무국장 자리를 그 사이에 그만둔 것 같다. 위 인터뷰에서 부당한 인사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모종의 조사를 받은 판검사 몇 사람의 좌천설을 '모략선전'이라고 부정했는데, 김용무 복귀 직후의 법관 인사를 보고는 물러나는 길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지.
강중인이 말한 '모략선전'의 '책원지'는 좌익이었을 것이다. 한민당이 법원을 말아먹을 것이라는 소문, 좌익에 동정적인 법관들이 숙청될 것이라는 소문을 그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좌익에 반감을 품었을 것이다. 사법부의 공기가 음산해진 것도 그런 무책임한 선동가들 책임으로 여겼을 것이다. 1949년의 법정 진술에서 "해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투쟁하던 위대한 애국자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도 굳이 따지자면 우익 취향이다.
그런데 불과 십여 일 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법원 인사가 행해졌다. 그는 3월부터 민전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당시 민전 참여는 좌익만 한 것이 아니었지만 민전 활동을 통해 좌익과의 접점은 많았을 것이다. 정판사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보고 공산당 옹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감에서 변호인단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좌익 법조인'의 딱지가 붙어 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 '법조 프락치'로 몰려 터무니없는 재판을 받다가 전쟁이 터지자 북쪽으로 갔을 것이다.
그때도 법조인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엘리트 의식은 두 갈래로 나타날 수 있다. 강중인처럼 그 동안 "내 한 몸 구하기에 여력이 없던" 세월을 반성하며 사회를 위한 엘리트의 책임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엘리트의 권리를 생각할 수도 있다. 책임을 생각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일만 벌어지는 특권 체제를 견디지 못해 벗어났고, 권리를 생각한 사람들은 후일의 대한민국 법조인들에게 전통을 남겼다.
당시 사법부의 어수선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 하나가 또 터졌다. 경제 사범 한 사람의 불기소 방침을 검사총장이 발표했는데, 담당검사와 형사국장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부터 검사국에서 착수한 趙俊鎬 폭리 사건은 반년이 넘도록 세인의 주목리에 취조가 진행되어 왔었는데 일전에 드디어 취조가 일단락이 되어 기소 여부 결정이 주목되던 중 13일 검사총장으로부터 동 사건을 불기소 처분에 부친다는 다음과 같은 결정 이유를 법조기자단에게 발표하였는바 이 사건 불기소 처분에 대하여 담당 검사는 지금껏 전연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하여 물의가 분분한데 이에 대하여 담당 검사인 朴宗根과 사법부 형사국장 崔宗錫은 별항과 같은 담화를 기자단에게 발표하였다.
◊ 검사총장 李宗聖 담
趙俊鎬 사건은 오늘 불기소 처분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945년 10월부터 46년 2월까지에 섬유품 매매에 총 매입금 8,330,216원, 총 매각금 10,240,598원, 매매이득금 1,910,382원으로 그 이윤 2할 2부에서 매각 비용 즉 구문, 운반비, 인건비, 금리 등을 공제하면 순 이윤은 1할 5부에 가깝다. 이 정도는 폭리 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이다.
2) 8·15 이전 조월(繰越) 상품에 대하여는 과대한 이익이 있었으나 8·15 이후 경제계의 변조로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일반 물가가 대폭등된 시대인 만큼 고려할 필요가 있으므로 폭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4월 11일 모 지상에 李 검사총장 담으로 중간이득 1할 이상 불가라고 한 기사는 오보이다. 검사국에서는 먼저 발표한 도매상에 대하여는 1할 5부 정도의 순이득을 적정이윤으로 본다는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일반은 오해 없기를 바란다.
◊ 담당검사 朴宗根 담
담당 검사인 나는 전연 모르는 일이다. 다만 검사 성질상 장관의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만은 일반은 알아주기 바란다. 그러나 나는 기소 여부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았다.
◊ 崔 형사국장 담
담당 검사가 모르는 사건 처분이 있을 수 없다. 물론 사건 결정권은 상관에게도 있다. 그러나 담당 검사가 불기소처분장에 날인치 않고서 어찌 상관만이 날인하고 결정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사건을 좀 더 규명하여 처리하겠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14일자)
(略) 15일에는 또한 형사국으로부터 이 사건에 대하여 일시 중지를 명령하였다 하며 형사국장 崔宗錫은 이 사건에 관하여 13일부터 우달 사법부장과 상의하고 15일 법조기자단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달 사법부장의 요청으로 이 사건의 상세한 전말 보고서를 작성하여 금명일중 제출할 예정이다. 여하간 이 정도의 사건을 구태여 검사총장이 발표하였다는 것도 부자연한 일이며 또 담당 검사도 모르게 결정하였다는 것은 그 전례가 없다. 그리고 폭리에 대한 검사총장의 견해에도 의문되는 점이 있다. 물론 아직 불기소처분이 미확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신문> 1946년 4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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