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일인당 국민소득일 것이다. 이것만큼 빈번히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나타나는 숫자는 없을 것이다.
그 숫자 변화로 우리가 실적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다른 나라와 비교도 하여 등수도 매기고, 그에 따라 국가의 선진성과 후진성을 이야기기하기도 한다. 그 서열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목표다. 그 숫자의 증가에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녹아있고, 더 높이 더 빨리 그 숫자를 늘리는데 그들의 소망이 집결되어 있다.
4만 불을 위하여
국민소득 2만 불 달성은 2007년에 이루었고, 이제는 우리의 대통령은 국민소득 4만 불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대통령뿐만이 아니고 여러 정치하는 사람들, 학계 사람들도 모두 한 입처럼 국민소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마치 국민소득 올리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었다. 국민소득 4만 불이 되면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오르고, 우리의 모든 문제는 4만 불이라는 숫자만 채워지면 해결될 것 같다.
국민소득의 증가는 그 국가의 경제 성장의 정도를 나타내며, 한 나라의 물질적 풍요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인다. 단일 수치로는 이만큼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정치인들 역시 그에 부응하고, 선거 때마다 대통령 후보들은 자신이 바로 그것을 올리는데 적임자임을 강조하곤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어느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0년 내에 선진 일류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데 5년 동안 기초를 잘 세우면 10년 내에 국민소득을 4만 달러로 만들 수 있다." 그전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기간이었던 2007년 신년사에서 아주 비슷한 발언을 했다. "새해에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고 선진국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자."
그러면 국민소득은 뭘 측정하는 것일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국민소득은 한 나라의 사람들이 1년 동안 생산한 모든 것을 미화인 달러로 환산했다고 보면 된다. 4만 불이라는 수치는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그 나라의 총생산 가치를 전체 인구수로 나눈 수치이다. 대체로 한 해 동안 국가 전체의 경제 활동의 강도를 측정하는 것으로, 물질적 복지 수준을 나타내는 지수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국민소득(GDP 또는 GNP)의 측정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년)가 1940년경에 처음으로 고안하여 미국 정부가 이를 최초로 사용했다. 쿠즈네츠는 자신이 고안한 GDP 지수의 한계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지수가 한 국가의 발전이나 복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반대했다. 그는 "한 국가의 복지는 국민소득 수치로 측정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GDP에다 정부 지출을 포함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특히 그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전시였기에 폭탄 하나가 투하될 때마다 그 가격만큼 정부 지출이 늘고, 또 그만큼 국민소득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상상해보자. 전쟁에서 정부 지출에 비례해 사상자도 늘 것이며, 또 그와 비례해서 고통도 늘 것이다. 그가 또 하나 반대한 것은 가정에서의 생산이 GDP 계산에서 제외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여성의 가사 활동은 제외되었다. 쿠즈네츠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경제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국민소득은 한 국가의 1년 동안 경제 활동의 가치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수치가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나타내지 못하는가는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그 수치가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만 비로소 상황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국민소득이 2만 불이다, 4만 불이다 하는 숫자는 한 국가의 국민의 복지를 대표하기에는 너무나 문제점이 많다.
또 그 숫자가 과연 한 국가의 선진성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국민소득이라는 것은 과연 한 국가의 국민의 복지 수준을 잘 나타내는 것일까? 아래 몇 가지 사례를 통하여 문제점을 알아보도록 하자.
자선 사업은 국민소득의 독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만약에 정부가 서울 남산을 여의도 남쪽으로 옮겼다가, 국민의 반대로 다시 원상태로 복구했다고 치자. 그 비용으로 10조의 재정 지출이 증가하게 되었다면, 그해 국민소득은 10조가 증가하게 된다. 이에 따른 경제적 파급 효과가 없다는 가정 하에 실제로 생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낭비였지만, 숫자상으로는 국민 총생산이 10조가 증가한다.
둘째, 어느 독재자가 모든 국민을 노예처럼 부려서, 현재 하던 일의 50%를 더하도록 했고, 그 결과로 국민소득이 50% 늘어났다고 하자. 만약 이전의 국민소득이 2만 불이라면, 이제 그 국민의 소득은 3만 불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국민소득 3만 불이 그 구성원의 복지 수준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셋째, 국민소득을 올리려면 자선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과학자가 간염 예방 백신을 발견해서 특허를 얻고, 그것을 팔아 100억 원의 수익을 얻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해 국민소득은 100억 원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학자가 공익을 위해 그 백신을 모든 한국인에게 무료로 제공했다면, 국민소득 증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백신이 공짜일 때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것이고, 그래서 복지가 증가하지만, 국민소득에는 오히려 빠지게 된다.
넷째, 순이 엄마는 순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가르친다. 철이 엄마 역시 철이를 직접 가르친다. 그런데 어느 날 순이 엄마가 철이 엄마에게 20만 원을 지불하고 과외를 시키고, 철이 엄마는 똑같이 20만 원을 순이 엄마에게 지불하고 철이의 과외를 맡기기로 하고 이를 세무서에 수입으로 신고했다고 하자. 그러면 국민 소득은 40만 원 증가하게 된다. 순이와 철이가 받는 과외의 질이 같다는 가정에서 돈이 오고 갔다는 것 말고는 실제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다섯째, 대기오염이 늘수록 국민소득은 올라간다. 대기오염이 늘어난다는 것은, 차도 늘고, 공장의 가동과 같은 생산 활동의 증대를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기오염이 늘수록, 호흡기 장애로 병원비 지출이 증가하고, 이 역시 국민소득을 늘린다. 예를 들어 철이가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장애가 생겼다고 하자. 그래서 병원 지출비가 한 달에 50만 원씩 늘게 되었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철이 엄마는 옆집 순이를 돌보고 그 대가로 50만 원의 번다고 하자. 그러면 국민소득은 100만 원이 증가하게 된다. 서울의 공해는 국민소득 계정만 고려한다면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여섯째, 한국에 있는 모든 나무를 베어서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가구를 만들거나 하여 발생하는 수익이 10조 원이라 하자. 그러면 그해 국민소득은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나무가 없어져 이듬해부터 홍수 피해가 증가하고 복구 비용으로 정부 지출이 10조 원이 늘었다면 역시 국민소득 증가분으로 포함된다.
일곱째, 사회 비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정부가 갯벌을 막아 주택 용지를 늘리는 것과 같은 토건 비용은 국민소득에 포함되지만 그에 의한 자연 훼손에 따르는 숨은 비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국민소득이 바로 행복인가
국민소득은 한 국가의 경제 활동과 그에 따른 복지 수준을 하나의 숫자로 대표한다. 간단한 숫자 하나로 나타냄으로써 국가 간 비교가 용이하고,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며, 정치가나 학자와 일반인의 시선을 모으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어떤 한 수치로 그들의 복지 수준을 나타내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나누는가가 더 중요하다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2만 불, 4만 불 심지어 40만 불이 된다고 해도 모든 국민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꼭 선진국 또는 일류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아니면 일류 국가와 이류 국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갖는 문제점들은 차치하고라도, 대통령을 위시한 온 사회가 이 국민소득이라는 수치를 강조하는 현재 상황과 다수의 국민이 그런 수치에 현혹되었을 때에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는 것인가를 주목해야만 한다.
첫째, 4만 불 달성을 위해서는 얼마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 4만 불 달성이 주는 물질적 풍요보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가치 상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근래의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국민소득은 훌쩍 올라갔는데, 경쟁의 심화로 인하여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불안하고, 스트레스는 더 늘어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둘째, 일인당 국민소득은 국민총생산을 인구로 나눈 평균치다. 그래서 만약 소득의 분배가 불평등하다면, 일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는 부유층 소득만 증가하고,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소득 분배의 불균형 수치인 지니계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건강, 행복, 범죄율 등으로 나타나는 복지 수준은 소득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절대소득의 증가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상대적 소득 분배가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양극화 현상과 같은 상대 소득의 불균형 증가가 갖는 부정적 효과가 경제성장으로 기대되는 긍정적 효과 보다 사회의 복지에 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득 수준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구성원들의 전반적 행복을 증진 시키는데 성장 보다는 균등 분배를 강조해야 한다. 이제 한국은 떡을 크게 하는 것보다 떡을 어떻게 나누는가를 강조해야 할 단계에 있다.
셋째, 현재 극도의 경쟁 하에서 국민이 감수하는 희생이 과연 4만 불 달성을 위한 경제 성장에 과연 기여를 할 것인가? 아니면 역효과가 커서 결국 경제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성장 잠재력을 잠식할 것인가? 경제 성장과 경쟁의 과도한 강조는 사회 비용 증가를 초래할 뿐더러, 생산성 등 성장 자체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성장을 위해 과도하게 지불되는 사회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성장 자체를 위해서라도 이제 한국은 경쟁의 강화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성장 위주의 현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 건강, 가정, 교육 등 많은 부문에서 문제 악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안정과 구성원의 유대를 위협하는 현 사회 문제들은 결국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끼쳐서 한국이 갖고 있는 정상적 경제 발전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도, 현재와 같은 극도의 경쟁 논리 강화는 자제해야 한다.
이제 성장이 행복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성장은 공짜가 아니라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7% 성장, 국민소득 4만 불 달성, 그리고 7대 강국 진입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747 공약과 같은 슬로건에 더 이상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747 공약의 실패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서라기보다 747이라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숫자들을 목표로 삼았다는데 진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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