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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공포에 떨며 사는 이남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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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공포에 떨며 사는 이남 주민들

[해방일기] 1946년 3월 25일

1946년 3월 25일

3월 24일에 두 건의 조직 범죄단이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마포서에서는 위조 지폐단을 검거했고, 본정서에서는 강도단을 검거했다.

경인간을 횡행하고 여학생을 노리던 대담무쌍한 27인 강도단이 체포되었다. 작년 11월부터 금년 2월 말까지 경인간에 횡행하여 잔악무도한 수단으로 주민을 노리던 27인 강도단이 체포하려는 인천서원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서울 시내에 잠복하였다는 정보를 접한 시내 본정서에서는 사법주임 지휘 하에 무장경관대가 그들이 잠복하고 있는 사헌정 71번지를 습격하고 27인 중 수괴 전과 6범 姜彩錫(34) 외 19명을 일대 격투 끝에 일망타진하여 취조 중인데, 그들은 총 범죄 건수 74건으로 강도한 총금액이 1000만 원이나 되고 특히 서울 시내에서는 모 여학교 학생을 잡아 4명이 강간한 것을 비롯하여 여학생과 가정 부녀에게 가해를 한 사실이 많다. 그런데 이들 범인을 체포한 동서 金成煥 형사부장은 바른편 팔에 범인들이 쏜 탄환을 맞았으나 용감하게 추격하여 체포한 것이라 한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4일자)

얼마 전에 120만 원 지폐 위조단을 검거한 마포보안서에서는 계속하여 활동을 개시하여 이번에 또 다시 60만 원의 지폐 위조단을 체포하였는데, 범인은 시내 봉래정 金然成(42 가명), 신당정 安景國(28 가명), 평정 尹楨彰(35 가명) 외 6명으로서 이들은 작년 12월 초순부터 지난 하순에 걸쳐 전기 윤정창의 집 2층에서 100원 지폐 2호 68만 원을 위조하여 소비하는 한편 그 중 22만 원은 38도 이북으로 비밀히 반출하였다. 이 사건은 인천, 수원 등을 비롯하여 각지에까지 확대될 모양이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4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또 하나 위조 지폐단의 검거는 3월 16일에 있었다.

통화 팽창의 인플레를 더욱 악화시키는 위조 지폐단 일당이 서울 마포서에 검거되었다. 시내 마포서에서는 위조 지폐단 일당의 보고를 탐지하고서 약 20일 전부터 극비밀리에 맹활동을 계속 중이던 바, 16일 밤 도 경찰부의 협력을 얻어 한강통 3정목 151번지에 거주하는 위조 지폐단의 수괴 金在基(41)를 비롯하여 金炳熙(28, 공덕정 9의 52), 崔麟集(돈암정 153의 100), 金桂吉(본정 2정목) 등 4명을 체포하고 안암정 100번지의 6호에 있는 김계길의 별가에서 석판으로 만든 위조 지폐기, 약품 다수, 현금 1000여 원을 압수하였는데 이들의 자백에 의하면 수개월 전부터 지폐 120여만 원을 인쇄하여 유흥에 소비한 것이 판명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1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지폐 위조가 중요한 범죄 현상으로 부각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5월 15일 터질 조선정판사 사건의 배경으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탄압의 출발점이 되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나중에 세밀히 살펴볼 것인데, 중요한 사건인 만큼 언급하는 김에 사건 개요를 담은 기사를 우선 소개해 둔다.

300만 원 이상의 위조 지폐로써 남조선 일대를 교란하던 지폐 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되었다고 조선 경찰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 씨가 발표하였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이 지폐 위조단에는 16명의 인물이 관련되었는데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라고 한다.

이 지폐 위조단의 소굴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빌딩은 조선공산당본부이다. 이 근택빌딩에서 지폐를 위조하였는데 상기 공산당 간부 2명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으나 이미 체포장이 발포되어 있는 중이며 그들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의 李觀述(40세)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해방일보사장 權五稷(45세)이다.

(…) 경찰 당국의 말에 의하면 이 위조단은 절취한 조선은행권 평판을 사용하여 위조 지폐를 인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지폐를 인쇄한 용지도 일본 것으로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이와 동일한 용지가 위조 지폐가 최초로 출판하기 전에 인천부두에서 도난을 입었다고 한다.

이 평판은 작년 9월에 100원 지폐를 인쇄하기 위하여 조선은행으로부터 조선정판사에 이전되었는데, 기후 은행에서는 그 평판을 조선도서주식회사에 이관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이 평판을 이전하는 중에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경찰에서는 분실되었던 평판 9개를 발견하였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해 위조지폐 300만 원의 대부분은 근택빌딩 지하실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한다. 경찰은 평판의 잔해인 듯한 철재와 지폐 인쇄에 사용되는 평판초크 염료·잉크·기타 제 재료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6년 5월 16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편, 맨 위의 기사에서 잔인하고 악랄한 조직 폭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개 조직의 강도액이 1000만 원이라니, 조선정판사의 (경찰이 부풀린 것이 분명한) 위조 액수와 맞먹는 규모다. 이 시기 범죄단 중에는 '치안 유지'를 앞세워 조직 활동을 벌인 경우도 많았다. 3월 8일 검거된 '돈암청년단 사건'이 그런 예다.

시내 돈암정 산11번지에 있는 돈암청년단은 8월 16일 단원 170여 명으로 결성 조직하여 관내 치안을 유지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해방 후 질서 혼란기를 악용하여 불법 접수, 불법 감금, 고문 등 악독한 행동이 있어 일반의 원성이 자자한 소문이 성북서에 들어와 동서에서는 지난 2월 16일 밤에 청년단 간부 수명을 검거 취조한 결과 주소를 돈암정 177의 9에 둔 단장 朴根性(23)과 돈암정 261에 둔 치안부장 朱東俊(36) 외 6명이 주모가 되어 8월 25일 숭인면 정릉리에 있는 중앙약품회사에서 수은 도난 사건이 있자 범인을 체포하고 물품을 회수케 되는 때에는 상당한 사례금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동회사 고용인 廉用信부부를 불법 체포했다.

11일 내지 16일 동안이나 불법 감금하고 혹독한 고문을 한 사실과 또 이 수은 사건의 용의자로 시내 안암정 142의 2에 사는 운반업 文德模(52) 집에 수은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기 회사의 도난품이라고 추측하여 문덕모와 그의 딸 文成雲(19) 사위 張在賢(24)의 3명을 불법 감금하는 동시에 그 집에 있는 수은 559근과 자동차타이어 6개, 튜브 2개, 현금 2000원 등 합 약 20만 원을 강탈한 다음 일방 전기 사람들을 이틀 내지 사흘 동안 불법 감금과 고문하고 또 문성운은 강간까지 당하여 분통한 나머지 1월4일 음독 자살까지 한 사실이 있으며 8월 말경에 숭인면 미아리 397에 사는 朴元淳이가 쌀 20가마를 운반하는 도중 청년단원이 불법 체포하여 고문을 감행하여 쌀과 현금 8000원을 강탈하였으며 그도 부족하여 그의 집을 수색한 후 쌀 30가마와 양회 3백 부대, 재목 약 만 원가량 등을 불법 압수한 사실 등 이외에 10여건의 범죄사실이 드러나 그 피해는 막대하다.

무기는 일본도 6개가 압수되었으며 부정하게 강탈한 금품 등을 경마, 주색, 잡기 등에 소비하였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조직의 범죄 활동이 해방 직후 시작되어 피해자 자살 등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왔음에도 여러 달 동안 계속된 데는 경찰의 비호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피해자 자살로 여론이 비등하자 검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장자연 씨 자살처럼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던 모양이다.

일본의 퇴각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 속에 나타난 '자율 치안' 움직임 중에는 공익을 위한 건전한 운동도 있고 사익을 노리는 범죄 집단도 있었다. 범죄 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건전한 공익운동도 혼란한 상황에서는 지나친 독단으로 폐단을 일으키기 쉽다.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주민들의 판단에 따라 옥석이 차츰 가려질 수 있다. 소련군이 자치 운동을 존중해준 이북에서는 그런 정화 과정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남에서는 자치운동을 교란하는 외부 작용이 훨씬 더 많았다. 점령군 진주가 이북보다 늦었고, 미군 진주 후에도 일본인의 행정-치안 체제를 지속시켰기 때문에 일본 경찰과 군이 범죄 집단과 결탁하고 건전한 자치 운동을 탄압하는 일이 많았다. 미군도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자치 운동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경향이 있었고, 조병옥과 장택상이 지휘권을 맡은 경찰은 그 경향이 더욱 심했다.

3월 3일 검거된 임념 일당 사건은 일본 헌병대와 결탁한 사례를 보여준다.

8·15 해방을 기화로 일본 헌병 간부와 결탁하여 일확천금을 꿈꾸다 필경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자가 있다. 즉 시내 계동에 주소를 가지고 있는 林稔이란 자는 해방 이전부터 청부업 하야시구미(林組)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내용으로는 아편 밀매를 해 오던 상습자로서 해방이 되자 곧 자기 부하들을 가지고 중구 치안대를 조직하여 자기가 치안대장이 되어 가진 나쁜 짓을 해오던 중 일본 헌병 간부와 결탁하여 동 헌병사령부에 압수해 둔 아편 2트럭 시가 1500만 원어치를 자기 치안대 본부 지하실로 운반해 놓고 밀매하다가 2월 중순경에 용산서원에게 탐문되어 그 일당 대부분이 이미 체포되었으며 아편도 38도 이북으로 밀매한 것 외에는 대부분 압수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방 후 이남 지역의 경찰 인원은 갑절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이남 주민들이 범죄의 공포에 떨며 지내야 했다는 사실은 치안의 효과가 경찰의 힘보다 경찰의 신뢰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익 단체의 폭력도 물론 치안 교란의 큰 요인이었다. 3월 18일 종로서에서 조선건국청년회 본부와 지부를 급습하여 기관총 6정, 장총 133정, 지휘도 189자루를 압수하고 관계자 5명을 검거한 일이 있었다(<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 어쩌다 이런 장면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많은 무기가 서울 시내에 버젓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좌익 행동단체로 몰린 학병동맹에서 권총 한 자루 나온 것과 대조된다.

3월 25일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은 고문을 폐지할 것, 주민을 친절하게 대할 것, 기강을 확립할 것 등 내용을 담은 '경찰잠(箴)'을 만들어 관내 부서에 배포했다. 이튿날 경무국장 조병옥은 경찰관의 반성과 새로운 각오를 촉구하며 공복으로서 의무 이행을 요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경찰의 문제점들은 드러날 만큼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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