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5일
짤막한 기사 하나를 보며 어리둥절해 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재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李承晩은 시간적 여유와 신병을 이유로 수일 전 동 의원에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였던 바, 동 의원에서는 19일 창덕궁에서 (略) 李 의장의 사표를 접수치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李 박사의 건강이 회복될 기간 李 의장은 휴직하고 동 의원 부의장 金奎植이 의장을 겸섭하게 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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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원 의장직은 이승만이 몇 달 동안의 치밀한 공작으로 쟁취한 성과였다. 이것을 불과 한 달 만에 내놓겠다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 건강이야 자고로 널리 쓰여 온 거취의 핑계이거니와, "시간적 여유"까지 이유로 내놓는다는 것이 별난 일이다. 민주의원 의장직보다 중요한 볼일이 뭐가 있기에? 드러누워 아픈 시늉 할 틈도 없이 사의를 표명해야 할 급박한 사정이 있었나보다.
3월 15일자 기사 하나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AP통신이 전하는 프라우다 지의 李承晩 공격에 대하여 서울 주재 AP특파원 렌스벅은 14일 상오 돈암장을 방문하고 李承晩의 심경을 타진한 바 있었는데 회견석상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석명하였다 한다.
"프라우다 지는 내가 미국 자본 대표자와 연락하여 광산권을 허가하였다는 것은 허위의 보도이며 나는 이런 성질의 교섭을 한 일도 없고 또 장래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소련 기관지가 나의 개인 공격을 한 이유를 이해치 못하는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는 조선 상호 간의 친밀이 필요한 것이며 또 소련은 조선의 우호국이다. 우리는 이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독립 획득 투쟁을 동정하지 않는 어떤 나라와도 우호적 관계를 보유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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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은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개막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하던 1946년 3월 18일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내세워 돌연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이승만이 실각한 원인은 그가 한 미국인에게 광산 채굴권을 팔았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보도의 핵심은 이승만이 사뮤엘 돌베어라는 미국인을 한국의 광산 고문으로 임명하고, 한국 광업권에 대한 광범한 권리를 양여한다는 약속하에 미화 100만 달러를 받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537쪽)
3월 12일 국내 13개 신문이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하는데, 내가 이용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에 제공되는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지적한 <프라우다> 기사는 3월 13일자에 실린 것이었다고 한다. 돌베어와의 거래는 성공할 경우 매국 행위가 되고 실패할 경우 사기 행위가 될 것이었는데, <우남 이승만 연구> 537~548쪽에 그 내용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돌베어는 조선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을 경영하던 동양광업개발(OCMC)의 대리인으로, 1939년 운산금광의 독점권이 만료되었을 때 채굴권을 일본광산회사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한 인물이었다. 매각 대금 817만4000달러 중 227만 달러만을 받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지자 돌베어는 미수금 590만여 달러 회수에 목을 매게 되었다.
곤경에 빠진 돌베어에게 이승만이 접근해 '광산 고문'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광산 이권을 약속해주고 돈을 받았다는 이 스캔들은 재미동포 사회에서 이승만과 대립해 온 한길수가 터뜨린 것이었다. 한길수가 이 정보를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서 스티븐 얼리에게서 얻었고 스캔들이 터졌을 때 미군정의 조사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정병준이 곽림대의 <못 잊어 화려강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볼 때 근거가 분명한 스캔들이다.
역시 정병준이 인용한 1945년 3월 23일자 <Shanghai Evening Post and Mercury> 기사도 이승만과 돌베어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조선 임시정부의 제1차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사무엘 H 돌베어를 조선의 광산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선언하기를 전후 조선의 수다한 광산공업들을 부흥시키며 발전시키며 또는 운전시키는 데 협조하기 위하여 다수의 관산 기사들과 야금학자들이 요구될 것이라고 하였다.
돌베어 씨는 특히 조선 안에서 경험을 가졌던 광산 기사들과 접촉하려고 애쓰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뒤에 실제로 운전하는 데 협조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계획에 취미를 가진 분들은 뉴욕시 존넘버 4 브로드웨이 11번지에 있는 돌베어 씨와 통신하기를 바란다.
한길수는 이 문제를 1945년 4~5월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이승만에게 물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낙을 얻어 돌베어를 광산 고문에 임명했다고 대답했으며, 한길수는 7월에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결산하는 한인 집회에서 이 사실을 폭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6년 1월 23일 민족혁명당 미주 지부 기관지 <독립>에 폭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국내로 흘러들어와 3월 12일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고, 뒤이어 <프라우다> 기사가 나왔다.
이승만은 돈의 힘을 잘 알고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해방 전 재미동포 사회의 분열을 일으킨 것도 늘 돈 문제였다. 1923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 학생들로 구성된 하와이모국방문단의 조선 방문 때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과 교섭해 방문단원들이 일본 여권을 발급받게 한 일도 있었다. 그 대가로 자기 학교 건축비를 지원받았다. 임정 대통령 직함을 가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1945년 10월 귀국 후 제일 먼저 한 일의 하나가 친일파로 몰릴 개연성이 높은 사업가들을 자기 거처인 돈암장으로 불러 모아 경제보국회를 결성한 것이었다. 경제보국회가 한 가장 큰 일이 1946년 4월 30일 이승만과 굿펠로우의 주선으로 2000만 원을 은행으로부터 융자받은 것이었고, 그중 1000만 원은 이승만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승만은 돈에 관해 노골적이었다. 1945년 11월 1일 독촉중협 회의에서 이렇게 공언했다.
미국에서나 군정청에서도 나를 존경하고 내 의사를 존중히 생각합니다. (…) 최후로 한 가지 얘기하랴는 것은 일을 하랴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 있는 부자들께 돈을 많이내도록 합시다. 그러타고 빼앗지는 마시오, 우리들이 불한당이 될 테니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모와놓으면 저네들도 우리의 실력있다는 것을 알 것이요, 그리고 자주독립할 실력이 있구하면 모든 일이 다 일우워질 것이 아니오. (<우남 이승만 연구>, 580~581쪽에서 재인용)
큰돈을 모아놓을 수 있는 것이 이승만에게는 실력의 기준이었다. 재화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집적하는 것을 그는 목표로 했다. 인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안 모아놓은 큰돈으로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조건으로 그는 보았다. 모든 일이 누구를 위해 이뤄진다는 것이었을까?
배금(拜金) 풍조가 대한민국에서 만악(萬惡)의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극화 현상도, 이건희의 단독 사면도, 정치의 퇴행도, 권력의 괴기성도 배금 풍조를 발판으로 이뤄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승만 같은 배금주의자를 '국부'로 십여 년간 받든 사실과 이 풍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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