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속 '픽션(이라고 쓰고 거짓말이라고 읽는다)'을 일부 발췌 소개하노라면 나 역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어떤 정보를 성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서평의 의무에서 탈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담을 하면서 "자, 이제부터 내가 농담(거짓말, 딴소리, 흰소리)을 할 거야"라고 운을 띄우는 것만큼 독자와 청자의 짜증을 유발하는 행위도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보겠다. 둘 중의 어느 쪽을 택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먼저 두 가지 안내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하나는 란다 사브리의 <담화의 놀이들>(이충민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재인용한, 피에르 드 마리보의 <벼락부자가 된 농부> 중 몇 구절이다.
"독자는 내 여담에 미리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여담을 자주 하게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주 할 것이고 어쩌면 자주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체면 차리지 않고 내 전 생애를 이야기할 작정이다. 그런데 만약 내 인생의 이야기 속에 다른 것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피에르 드 마리보, <벼락부자가 된 농부>)
▲ <모나미153연대기>(김영글 지음, 미디어버스 펴냄). ⓒ미디어버스 |
"나는 사물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 사람들이 대상을 어떻게 이름 짓는지, 사물을 둘러싼 사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언어화되는지, 한 줌의 사실과 한 무더기의 소문이 어떻게 서로 몸을 바꾸는지, 나는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
그는 '모나미 153' 볼펜이라는 하얗고 검은 단순한 플라스틱 물체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던 중, "정보 유통이 투명하지 않았던 1960~80년대 권위주의 시대의 축적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중등 교육을 받았던 나 같은 세대에게는 영원히 되풀이되는 일종의 구전 동화"라는 깨달음을 얻고 한국 현대사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악몽 같은 동화들을 모나미 볼펜 역사 이곳저곳에 삽입했다.
놀라운 건 그들이 모두 그럴싸하게 맞물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과장과 생략과 인용과 거짓말로 구성된 너스레의 조각들을 이루었다." 미리 결론. 모나미 153 볼펜은 1963년 한국에 처음 소개되어 기나긴 영욕의 세월을 거쳐 1992년 '단종'된,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나미153연대기>는 1964년 3월 26일, 모나미의 합병 인수 제안 요청을 거절한 왕자화학공업사 '왕자 볼펜'의 서글픈 종말로 시작한다. 다음 장에서 시간은 조금 더 과거로 옮겨간다. 1962년 5월 16일 5·16혁명 1주년 기념 산업 박람회장(요즘은 '혁명' 대신 '군사 정변'으로 표기되는 추세라는 걸 밝혀둔다), 광신화학공업사 사장 송삼석은 일본 기업 우치다요코 직원이 사용하는 '놀라운 하얀 막대기'에 매료된다.
그는 "필기구의 혁명"이라 일컬어진 그 물건, 당시 한국에서 사용되던 연필이나 잉크를 찍어 쓰는 철필과는 완연히 다른 그 필기구를 수입하고자 마음먹는다. 모나미 153 볼펜은 그렇게 한국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153이라는 숫자의 기원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당시 볼펜 한 자루의 가격이 15원, 즉 앞의 15는 15원이라는 뜻이고 뒤의 3은 광신화학공업사가 만든 세 번째 제품"이라 한다. 두 번째 는 흔히 화투판에서 '가보', "패의 숫자를 전부 더했을 때 끝자리 숫자가 9가 되는 수, 행운을 부르는 숫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여있다. 세 번째는 제자를 구하는 예수 덕분에 어부 베드로가 낚아 올린 물고기 153마리….
각설하고, 모나미 153 볼펜은 전영록의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대히트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 문구류 최초로 KS 마크를 획득"하여 "근대화의 척도"인 규격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통사고로 사망한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이균영의 가방 속에, 철거촌 취재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점에서 구입하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처음 쓰기 시작한 작가 조세희의 손에, 1991년 분신 자살한 대학생 김기설과 그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의혹을 받은 동료 강기훈의 손에, 1987년 11월 28일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시킨 테러리스트 하치야 마유미가 볼펜 속 독극물을 삼키려 할 때 그 옆에 존재할 수 있게 됐다. 1992년 몽블랑 만년필의 대중화와 모나미 특유의 '육각형' 모양이 헥사그램의 신비화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종되기까지, 모나미 153 볼펜은 그렇게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온 것이다.
리아 코헨은 일요일 아침 카페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 잔, 자신이 읽고 있던 신문 용지를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며 그 결과물로 <탁자 위의 세계>(하유진 옮김, 지호 펴냄)라는 사랑스런 책을 썼다. 그리고 한국에도 <모나미153연대기>를 통해 비로소 이런 사물의 미시사를 추적하는 역작이 등장했다.
가방 안에, 책상 위에 어디서나 언제나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한국인의 가장 친한 벗' 모나미 153 볼펜(근데 혹시 '모나미'라는 말이 '내 친구'라는 뜻의 불어에서 기인했다는 건 알고 계실지?)이야말로 무언가를 읽고 쓰고 발언하고자 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행적을 끌어오는 데 제격이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삽입되는 온갖 증거 사진과 인용문들, 요약하여 어떤 사물에 얽힌 '여담'만으로도 하나의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산 증거다.
모나미 153 볼펜은 그렇게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말없는 목격자로서 팩트와 소문과 거짓말과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과 취향이 교묘하게 뒤섞인 역사서인 동시에 자서전을 줄줄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모나미153연대기>를 다 읽고 나면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시대 최고의 팩션 소설이다"라고 부르짖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수다와 어림짐작만으로도 이렇게 멋진 책이 나올 수 있는 사실엔 변함없다. 다시 한 번 란다 사브리의 말.
"여담의 운명은 자가당착, 변덕, 경박한 자의성, 허술함, 혹, 주변부, 깜짝쇼, 길 잃은 방황이며, 종종 길 잃은 양, 되찾을 양떼, 수색 작업, 변덕스런 기질의 문제다."
바탕체나 신명조체가 아닌 굴림체로 쓰인 단순한 표지, 갱지로 추정되는 연한 회색 종이 등이 더할 나위 없는 친근감을 안겨준다. 이 책은 153쪽에서 끝맺었지만, 책값은 1530원도 15300원도 아닌 10000원이다. 문제는 2010년 2월 25일 발행된 이 책이 현재 절판 상태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모나미153연대기>를 구입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는 약 올리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하지만, 근처 도서관 같은 데서 빌려보실 수 있다면 꼭 그러길 권하는 바다.
참, 이것도 혹시나 싶어 여담으로 적어둔다. 작가 김영글의 본업인 미술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긴다면, 4월 17일까지 열리는 '2011년 스페이스99 재개관 기념전 :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을 구경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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