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0일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가 출범한 후 이북 각지의 농민조합이 임시인위에 토지 개혁 청원을 제출했다.
3월 3일 결성된 농민조합의 연합체 농민동맹은 토지 개혁안을 제출했고, 임시인위는 이를 채택해서 3월 5일에 공포했다. 이에 따라 3월 중에 100만여 정보의 토지가 몰수되어 70여만 가구에게 분배되었다. 몰수 대상 토지는 과거 일본인과 민족 반역자 또는 친일파의 소유 토지, 부재 지주와 종교 단체의 토지, 그리고 자작 지주의 토지 중 5정보를 넘는 초과분이었다.
시행 준비가 여간 잘 되어 있지 않고는 이 거대한 사업이 한 달 미만의 기간에 완료될 수 없었을 것이다. 토지 개혁이 해방 조선의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과제라는 사실은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조차 "토지 소유의 합리적 개혁"을 기본 정책의 하나로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개혁의 구체적 방법이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하고 있는 동안 이북에서는 성공적으로 실행해 낸 것이었다.
미국 측도 토지 개혁의 의미를 모르고 있을 수 없었다. 찰스 암스트롱은 <북조선 탄생>에서 이 무렵 미 국무부의 문서 하나를 소개했다. (127~128쪽)
절반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이 새로운 정권하에서 유형의 이익을 얻었으며 동시에 북한 정부는 남한에 대한 선전에 있어서 커다란 무기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농지 개혁이 시작되고 있을 때 미 군정청은 일본인 재산의 방매 방침을 발표하고 있었다.
일인 소유의 농지-주택 등 조선인에게 방매 결정
일본이 조선에서 약탈하고 있던 8할의 경지와 대소의 산업 시설, 주택 등은 일본이 패망한 오늘 당연히 조선의 재산으로 반환될 것이지마는 그 구체적인 귀속에 대하여는 아직 아무런 법령이 없었는데, 7일 미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 발표를 통하여 일인이 소유하던 농지와 주택과 소규모의 산업 기관을 빈농과 적당한 운영자에게 일정한 방법으로 방매한다는 법령을 불원중 발포할 것을 명시하였다.
[군정청 특별 발표] 조선 군정장관 아처 러취 소장은 조선 내에 있는 이전 일본인 소유의 모종 재산을 조선인에게 방매를 허가하는 법령을 발포한 것이라고 금일 발표하였다. 농지 소유자는 농지를 경작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금번 조치는 장래의 부재 지주로 인한 많은 폐해를 제외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 대가는 농작물로서 적당히 지불할 수 있는 것이다. 토지가 소수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방침을 취함으로써 다수의 소작농이 자작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자유신문> 1946년 3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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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재산 처분에 관한 미군정의 방침은 혼란스러웠다. 1월 5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재산관리과장 냅슬리 중령의 기자 회견 기사를 보면 전년 9월 25일의 일반지령 제2호는 민간의 매매를 인정하였으나 12월 6일 발포한 일반지령 33호는 금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북의 농지 개혁이 시작된 이제 '자작농 육성'을 앞세워 매각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한 민전의 3월 10일자 담화문에는 이 방침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 있다.
농지 방매, 주택과 소규모 산업 기관의 방매는 일부 자본가의 모리행동을 조장할 뿐이요, 토지 없는 조선 농민으로 하여금 토지를 갖게 하는 방법은 오직 무상으로 적당히 분배하기를 바랄 뿐이고 일정한 수입이 없는 노동자와 근로 소시민에게 주택을 방매 운운은 전연 공언에 불과하다. 이것은 일부 자본가 간상배들의 모리행동을 조장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해결될 것으로 확신하며 임시정부 수립을 미구에 앞두고 이러한 정책을 실시할 필요는 없다고 우리는 명언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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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신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3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일인 재산 처분 문제"의 뒷부분에서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주택의 처분과 소규모 산업 기관의 매도에 있어서도 우리가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될 점은 8월 15일 해방 이후에 일본인의 주택이나 산업 기관이 어떻게 점유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은 모리배의 준동으로 말미암아 집이 없는 자에게 집이 얻어지지 않고 진정으로 운영하려는 자에게 산업 기관이 제공되지 못하였다. 선량한 시민은 민족의 체면을 앞세우는 동안에 모리배는 어떻게 도량하였던가? 그 타기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서는 오늘까지도 증오심을 버릴 수 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법망만을 피하여서 많은 주택과 산업 기관을 점유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서 이에 대한 엄중한 경계를 하지 않는다면 집 없는 자에게 집을 주고 적정한 운영자에게 산업 기관을 주겠다는 군정당국의 성의는 모리배로 말미암아 성색만 좋은 것이 되고 말 우려가 없지 않나니 그 실시에 있어서 먼저 모리배의 준동을 봉쇄할 대책이 서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요컨대 일본인 재산의 처리 문제는 졸속에 흘러서는 아니된다. 이상에 논급한 제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그것이 우리의 자율적인 방촌에서 과히 어그러지지 않도록 노력할 뿐더러 대중의 복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도록 운용에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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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청은 행정 인력이 넉넉지 못할 뿐 아니라 기강도 잘 잡혀 있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인 재산에 대한 방침마저 오락가락하니, 의지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재산 확보를 위해 온갖 재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북의 토지 개혁 실시에 임해 일본인 소유 농지라도 농민들에게 방매하겠다고 나섰지만, 주택과 산업체도 함께 방매할 방침을 내놓음으로써 의구심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3월 13일에는 전농도 방매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내놓았다. 전농은 농지뿐 아니라 주택도 판매 대신 수요자에게 무상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전 일인 소유의 토지는 전선적으로 85만 에이커나 되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처분은 수립될 자주 정권의 주요한 과제로 그 기준은 빈농 중심으로 귀환 동포에게도 무상 분배할 것을 우리 전농은 주장한다. 연부상환 자작농 창정은 과거 일제 시대에 너무나 오래 기만된 문제이다. 주택은 전재 동포, 노동자, 도시 세궁민에게 적절한 배정은 하되 자유 판매는 반대한다. (<조선일보> 1946년 0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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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방면에서 비판이 쏟아지자 3월 15일 러치 군정장관이 나서서 일본인 소유 농지 방매 방침을 다시 밝혔다. 이번 발표에서는 농지를 획득한 영세농이 농지를 도로 잃지 않도록 15년간 전매 금지 방침을 내놓은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군정장관과 농무국장이 그 15년 동안 농지가 누구 소유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구체적 시행 방법은커녕 정책의 기본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남의 군정청이 이북의 토지개혁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는 모습이다.
객년 8월 15일에 조선이 일본의 기반을 이탈한 후 조선 내에 존재한 일본인 소유 재산의 귀추는 조선 민중의 일대 관심사였다. 미군정 실시 직후 일시는 군정청으로서 동 일인 재산을 전면적으로 조선인에게 방매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바 있었고 그 성문법령도 미구에 발포될 듯이 관측되었었다.
그런데 군정청에서는 돌연히 법령 제33호로서 일인 재산 불매 방침을 성문화하여서 일인 재산을 전면적으로 군정청 관리 하에 두고 조선인 사용자에게서 그 사용료를 징수하기로 결정한 후 대행기관 조흥은행의 손으로 착착 준비를 진보 중에 있던 바 또다시 군정청의 일인 재산 처리에 관한 근본 방침은 일대전환을 보게 되었다. 즉 지난 7일에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일인 재산 중 대기업을 제하고는 전적으로 조선인에게 방매할 것을 언명하여서 일반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불일간 그 법령이 성문 발표될 것이 예상되었었다. 그런데 다시 군정장관은 15일 다음과 같이 일인 소유 농토 양도에 관한 근본 대강을 발표하였다.
"일단 조선인 소농가에게 방매한 전 일본인 소유 농지가 대지주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만반 보호 방침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금일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언명하였다. 이것은 부재지주 시대를 끝막음에 있어서의 일대 조치이다. 농지는 직접 농부에게 소부분으로 방매할 것이다. 법률에 의하여 농지를 실지로 경작하는 사람이 금반에 방매하는 농지를 살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매득한 농지를 다시 전매하는 것은 15년간 허가하지 않을 것이며 소농가가 토지를 확보하게 하기 위한 법률의 목적을 방해하려는 계획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 토지를 장래 조선 정부에 귀속케 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소농가가 그 농지에서 나온 수입으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도록 장기 상환 방법을 취할 것이다. 또 대가를 농작물로 지불하고 농지의 가치에 따라서 대가를 결정하고 군정청 또는 장래에 조선 정부가 수립되면 조선 정부로 하여금 그 농지를 관리하도록 할 계획안도 있다. 상환 기간 중 군정청에서는 군정청 대행 기관과 지방농을 통하여 농부에게 최대의 수익이 있도록 하는 방법을 지시 지도할 것이다. 여하한 부로커 중간상인 또는 대지주도 이 농지 방매에 있어서 분배운영 또는 관리하는데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일본적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농지를 농지경작인의 손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 일대 진보적 조치라고 러취 소장은 부언하였다.
전 일본인 소유의 농지는 직접 조선인 농부 즉 소농가에 방매하기로 되었다는 러취 군정장관의 성명서가 15일 발표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李勳求 농무국장은 다음과 같이 부언해 말한다.
"일인 농지는 소농가에 방매하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15년 동안의 시험 기간을 두어 아무 고장 없이 잘 경작하면 그 경작인에게 그대로 주는 것이다. 즉 농지 소유권은 정부에서 가지고 있고 경작인은 15년 동안 경작권을 법적으로 하가를 받아서 경작하는데 다만 3·7제에 의한 농작물로서의 소작료와 세금, 수리조합비 등을 낼 뿐이고 따로 농지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만약 15년 이내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던지 다른 지방으로 이거하게 되는 경우에는 무효 몰수되고 만다. 그러나 경작자가 사망할 때는 그 상속인에게 계속 경작권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실지로 취급하는 것은 군정대행기관과 농회에서 적당히 지도하는데 원칙적으로 순 소작인에게 주며 자작 겸 소작인에게도 자작경작지 외에 더 경작할 능력이 있다고 충분히 인정되는 경우에 한하여 일부를 주게 된다. 순 자작농이나 지주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약해 말하면 농지는 작인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15년 기한부가 아니고 그대로 무상으로 농부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일반국민에게 이익을 균첨하는 정신에 배치됨으로 누구나 혜택을 입게 하기 위하여 소작료만은 15년간 정부에 바치게 한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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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공사 설립을 위한 2월 21일의 제52호 법령도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3월 11일 민전 사무국에서 동척과 신한공사를 동인도회사에 비유하며 공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3월 10일에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회에서까지 문제를 제기했다. 3월 12일 이훈구 농무국장이 해명에 나섰으나 역부족, 결국 3월 14일 군정청 공보국에서 법령을 개정하겠다는 특별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착취의 아성이던 구 동척의 후신으로 신발족한 신한공사가 법령으로써 조선 정부와는 독립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운영되고 미국인만에 주주 독점, 이에 부수하여 그 추진력을 권력화하려는 외부에 대한 제재 벌칙 등 해방이 공약된 조선에서 도저히 이해키 어려운 세론으로써 군정당국의 재조치를 기대하여 오던 바 저반 동 법령이 오역으로 인하여 본의 아닌 표현이라는 언명에 뒤이어 14일 군정청 공보국에서는 조선인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특별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개정된 동 법령의 원문 내용이 불일 중 정식 발표될 터이다.
[군정청 공보국 특별 발표] 군정장관 러취 소장은 금일 세론이 분분하였던 법령 제52호는 수일 전 발포 당시의 많은 비난을 풀기 위하여 완전히 개정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개정 법령에서는 군정청의 본래 방침을 수행할 것이나 많은 오해를 일으킨 문구는 삭제한다. 이 신법령은 신한공사는 군정청의 종속 대행 기관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군정청이 폐지되면 신한공사는 조선 정부의 종속 대행 기관이 될 것이다. 또 모든 조선인의 불안을 풀기 위하여 벌칙을 규정한 제7조는 완전히 삭제하였다.
미국은 이면에 여하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조선인에게 명백히 하기 위하여 금반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러취 소장은 부언하였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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