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8월 8일 두통, 귀울림의 증세를 처음 호소하였다. 이듬해(선조 29년) 5월 11일에도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 않아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다"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1604년(선조 37년) 5월 14일에는 귓가에 마비증이 와서 형방패독산을 복용했다. 1606년(선조 39년)에도 이명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선조가 이렇게 이명으로 고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명은 사실 보통 사람에게도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다. 피로가 누적, 수면 부족일 때 이명과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은 많다. 이렇게 나타나는 일시적인 이명 증상은 잠시 쉬면 금방 낫는다. 그러나 피로, 수면 부족이 계속돼 심신의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이면 결국 이명, 현기증이 만성 질환으로 발전된다.
▲ 가수를 꿈꾸는 10대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 <드림하이>의 주인공 송삼동(김수현). ⓒKBS |
예를 들어 밤길에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면 교감 신경이 긴장이 되고 얼굴의 혈관은 수축하여 안색이 파랗게 되고 심장은 두근거리며 입은 마르게 되고 피부에는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자극의 원인이 제거가 되면 긴장 상태는 해소되고 교감 신경의 긴장 역시 이완된다.
그런데 일이나 인간관계가 원인이 되어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경우는 어떨까? 교감 신경이 쭉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는 몸이 몇 개라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경과하면 자동적으로 교감 신경의 긴장을 이완하는 스위치가 작동한다. 대뇌 피질의 대뇌변연계에 바로 이런 브레이크가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강하거나 너무 장시간 지속되면 대뇌 피질의 이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 교감 신경을 이완시키는 스위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교감 신경, 부교감 신경으로 이뤄진 자율 신경의 균형이 깨져 특별한 원인 없이 신체의 이상 증상들이 나타난다.
스트레스와 관계있는 질환으로는 두통, 어깨 결림, 소화성 궤양, 만성 위염, 고혈압증, 자율 신경 실조증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선조는 이런 질환을 평생에 걸쳐서 앓았다.
소화 불량은 청년 시절부터 자주 나타난 질환이었다. 1574년(선조 7년) 1월 7일 선조가 자주 체해서 의관의 진찰을 받은 사실 외에도 양위진식탕, 가미응신산, 생마죽, 생맥산 등의 위장 약의 처방 기록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같은 해 1월 10일의 기록이다.
"유희춘이 비위를 조리하는 법과 식료 단자를 써서 아뢰다."
유희춘이 누구인가. 바로 허준의 평생 후원자이자 허준의 진료를 받은 호남 유림의 거목이다. 선비로 대표되는 유의들이 가진 한의학적 소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젊은 날의 선조는 신하들의 기세에 눌려 소화 불량 증세만 호소할 뿐 본인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끙끙 앓기만 한 듯하다. 본인의 질환을 놓고도 선조는 "심장에 열이 있다", "심병이 생겼다" 등의 표현으로 우회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반면 1604년(선조 37년)에는 꽁꽁 내면에 눌러둔 스트레스를 그대로 표출한다.
"의관에게 내 병은 심증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였더니, 의관도 그렇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국내외의 온갖 문제에 시달린 선조였지만, 평생을 짓누른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바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통성 문제였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선조가 즉위하기까지 선왕의 직계 아들이 아닌 임금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의 아버지는 중종과 창빈 안 씨 사이에서 난 두 번째 아들 덕흥군 이초(중종의 7남)다. 선조의 어머니는 정인지의 친손자인 정세호의 딸이었다. 선왕인 명종의 조카뻘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조는 조선 왕들 중에서 직계 혈통이 아닌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서울 동작구 동작동의 국립현충원 안에는 동작릉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이 릉의 주인이 바로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 씨(1499~1547년)다. 창빈 안 씨는 손자인 선조가 왕이 되면서, 선조 이후의 조선 왕들을 모두 다 후손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릉이 최고의 명당 자리 중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런 사정 탓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해서 얻은 왕위인 만큼 선조는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정권을 장악한 사림의 본격적인 붕당 정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 등의 격랑을 거치면서 선조의 스트레스는 최악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이명을 비롯한 온갖 질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선조는 주로 침으로 이명을 치료했다. 심지어 선조는 1606년(39년) 4월 25일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귓속이 크게 울리니 침을 맞을 때 한꺼번에 맞고 싶다. 혈(穴)을 의논하는 일은 말만 많다. 만약 침의가 간섭을 받아 그 기술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면 효과를 보기가 쉽지 않을 테니 약방은 알아서 하라."
이렇게 선조의 신임을 받던 당시의 침의는 누구였을까? 당연히 허임이었다. 허임이 <침구경험방>에 이명을 치료하는 혈로 꼽은 부위는 이명의 원인을 자율 신경의 이상으로 보는 현대 의학의 관점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다. 매번 이명 환자에게 침을 놓으면서, 허임의 탁월함에 놀라고 또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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