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3월 1일
<자유신문> 3월 1일자 1면에는 상단에 "3·1절을 맞으며" 제목의 사설이 있고 중앙에 "團結로 自主獨立 빗내자 國慶日" 구호가 크게 들어가 있을 뿐, 3·1절 관계 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보기)
2일자 1면에는 민주의원의 보신각 행사와 민전의 탑골공원 행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고, 양대 군중 대회인 기미(우익) 측의 서울운동장 행사와 3·1(좌익) 측의 남산공원 행사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13개 언론사의 결정에 따라 기미 측 행사 보도를 거부하면서 균형을 위해 3·1 측 행사 보도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일자에는 남산공원 행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1일자 1면에는 민주의원 행사만이 크게 나와 있다. 언론사단 결정을 바로 어기지는 않지만 우익 편향성이 엿보인다. 그 편향성은 4~6일자에 3회에 걸쳐 실은 대형 사설 "3·1 행사 문제"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몇 대목만 뽑아놓는다.
민주 진영을 중심으로 한 기미 측이 3·1을 3·1답게 기념할 수 있는 대의와 명분 위에 있음은 재언이 필요치 않다. 그 이념과 지표는 물론이려니와 출발 당초의 경위로 보나 구성 단체의 합의로 보나 행사 진행의 준비로 보나 국민 각층의 향응으로 보나 기미 측이 기념행사의 중심이 되었고 또 되었어야 할 것도 사리에 순평한 결론이다. 공산 진영을 중심으로 한 3·1 측이 3·1을 기념한다 함은 그 포회한 의도 자체로 보아서 또는 종래의 수법과 행동으로 추단하여서 과연 양심적으로 순정으로써 할지가 의문이었음은 물론이다. (4일자)
일언으로 결론하면 순정으로 출발한 의도는 신문진의 경거로 인하여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작간승시(作奸乘時)의 기회를 주게 되어 기대의 합일은 고사하고 도리어 합일을 방해하고 분립에 가세한 결과를 짓게 되었다. 기미 측의 회답에 가의(可議)할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러나 원칙을 시인한 이상 접황을 가기(可期)할 만한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문진은 분열의 책임을 기미 측에 전가시키는 성명서를 즉각으로 발표하여 다시 어찌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들어 놓았다. (5일자)
기념행사의 주축이 되기에 99%의 장점과 이편을 가진 기미 측이 절호한 기회를 선용치 못한 무책도 무책이려니와 합일의 명분을 위하여 절대의 우위를 차지하고도 분립의 억울한 책임을 자취한 태도는 아무리 호의로 해석하여도 융통 자재한 정치적 수완의 졸렬이라고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기사 거부 운운의 조건을 단순한 자파에 대한 위협으로만 곡해하며 일보를 갱진하여 방패의 양면을 예료치 아니하고 단도직입으로 신문진에 대하여 힐항을 선언하였음은 성급한 조계라 아니 할 수 없다.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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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자 인용문에서 기미 측의 대의와 명분에 "재언이 필요치 않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3·1 측 의도가 "의문이었음은 물론"이었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따질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굳이 묻는다면 "우리 그런 신문이야. 몰랐어?" 하는 대답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5일자 인용문에서 기미 측의 회답에 "가의할 점이 있었음"을 말하고 "접황을 가기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우기는 것은 너무했다. 회답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기미 측이 태도를 바꿀 여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언론단이 결론을 내린 것은 행사 이틀 전인 2월 27일 오후 늦게였다.
2월 18일자 일기에 적은 것처럼 언론단은 2월 26일 양측에 제안을 보냈고, 3·1 측은 즉각 응낙하였으나 기미 측은 전체 회의를 연 후 회답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27일 오후 3시 반에 거부 응답을 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언론단이 기미 측에게 회의를 다시 열어서 재고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고 <동아일보>는 생각한 것인가?
기미 측의 움직임은 1월 25일에 시작된 것이었다.
3월 1일! 일찍이 28년 전에 이 땅에 독립을 선언하여 민족 자결을 세계에 선포한 날이다. 해가 바뀌고 날이 갈수록 오로지 3000만의 뇌리에는 자주 독립 하나뿐이 남아 있고 이 초점에 모든 것이 집중하여 왔다. 이번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념일을 앞두고 각 정당 각 단체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계획 중이였었는데 25일 상오 11시부터 한국민주당 3층에서 국민당, 한국민주당을 비롯하여 각 정당, 청년 단체, 부녀 단체, 종교 단체 대표자 50명이 참집하여 3월 1일을 기하여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개최하리라고 결정하고 동회준비위원으로 46명을 선출하였는데 참가 단체는 다음과 같다.
◊ 참가 단체 : 탁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 / 국민당 / 한국민주당 / 불교청년동맹 / 신한민족당 / 대한독립협회 / 민중당 / 우국노인회 / 반탁전국학생연맹 / 대한민국혁명동맹 / 조선유학생총본부 / 조선여자국민당 / 건국학생회 / 대한혁신청년회 / 대한독당 / 한국우국부인회 / 독립촉성부인회 / 종로부인회 / 북선청년회 / 조선불교중앙총무원 / 수요보본부 / 청년연맹 / 민화자강청년단 / 반탁총동원경성지부 / 삼일동지회 / 대한의열단 / 광업협회대표 / 천도교 (<동아일보> 1946년 1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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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중 국민당과 한민당만이 참가한 것으로 보아('대한독당'은 기재 위치로 보아 정당이 아닌 듯하다.) 우익끼리의 행사로 추진한 모양이다. 2월 7일 5대 정당(국민당, 한민당, 인민당, 공산당, 신한민족당)과 서울시 인민위원회 대표가 모여 통합 행사 방침을 의논하고 이튿날 5대 정당 대표가 다시 모여 의논을 계속한 것은 3·1절 기념행사만이라도 좌우 합작을 하자는 뜻이었다. 12일에 조선민주당과 독립동맹을 더한 7대 정당의 의논이 계속한 결과 국민당과 한민당을 제한 5개 정당의 공동 선언문이 여기서 나왔다.
12일 공동 성명의 제2항은 "3월 1일 기념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결성된 양 기성 준비회(기미독립선언기념국민대회 及 3·1기념투쟁위원회)는 동 기념을 의의 있게 함과 동시 민족통일 촉성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고 기념행사 일체를 전기 5정당에 일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제안도 3·1 측만 받아들이고 기미 측은 거부했다.
국민당, 한독당, 기미대회 측은 행사 통합을 위한 모든 제안을 거듭해서 거부했다. 그래서 해방 후 첫 국경일 기념행사는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 양쪽으로 갈라져서 열렸다. 그나마 다행은 남산공원의 3·1 대회 측이 예정된 행사 중 시가 행진을 취소한 덕분에 시가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3월 4일 발표한 담화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각 정당의 두령이 합동하여 지난 4·5개월 동안을 두고 노력, 노심하며 통일을 이루려고 힘써 보았으나 그 사람들이 백계로 활동하여 자기들이 전부를 다 통할하기 전에는 합동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번에 국민대표의원을 성립할 때에는 우리는 이들을 성심으로 청하였고 3·1경축식장에도 특별히 청하여 세인이목에 우리가 통일된 전면을 표시하려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끝끝내 퇴각하고 분열 분쟁의 상태를 드러내려 하니 그 심장(心腸)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런즉 이 분자들이 공산주의를 변치 않고 파괴를 일삼을 때까지는 우리와 합할 수 없고 언제든지 마음을 고치고 주의를 바꾸어서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날에는 그 성심, 성의를 보아 모든 것을 포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도 종시 회개치 못하고 우리 국권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은 우리 민중이 그 죄상을 기록하여 두었다가 이후 우리 정권을 회복하는 날에는 응당 다른 범죄자들과 같이 국법에서 밝힐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3월 6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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