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 만에 끝나는 100m 달리기도 금메달이 하나이고, 11명이 예선부터 본선까지 2주일 이상 여러 게임을 치르는 축구도 금메달이 하나이니 이건 불합리하다."
"은메달 세 개는 금메달 한 개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혹시 이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이건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축구에서 우승을 하면 주전 선수는 물론 벤치에 앉아 한 게임도 출전하지 않은 선수들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메달 집계에서 왜 축구는 하나로 취급하느냐는 질문도 문제가 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메달 집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달을 집계하는 것은 언론사에서 임의로 하는 것일 뿐,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전국체전처럼 선수단에게 별도의 상을 주는 법은 없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이 이야기했듯이 "금메달은 참가 선수에게 영광"일 뿐입니다.
똑같은 금메달이라 해도 팬의 입장에서는 더 관심이 가는 종목과 그렇지 않은 종목이 있을 것입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마이클 존슨과 같은 대스타가 출전하는 경우에는 200m와 400m 달리기도 인기를 끌었지만 아무래도 언론이나 팬들은 그 두 종목보다는 100m 달리기에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소위 총알 탄 사나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 할 수 있을까요?
▲ 우사인 볼트. 과연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일까? ⓒ뉴시스 |
육상 다관왕이 되기 위한 종목 선택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사람이라면 9.58초라는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어느 한 시기에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여 가장 출중한 선수가 누구인가를 선정하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가장 빠르다"는 것이 100m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지만 마라톤과 같이 아주 긴 거리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더 짧은 거리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을 테니 반드시 100m 달리기 기록을 가진 선수가 최고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육상에서 다관왕을 달성한 선수를 중심으로 달리기 실력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차례의 올림픽 대회를 통해 육상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받은 선수는 몇 종목에서 우승했을까요?
육상 팬은 쉽게 예측 가능하듯이 네 개입니다.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가 그 네 종목입니다. 육상 대회를 통해 넓이 뛰기 우승자가 세단 뛰기나 7종 경기(남성의 경우는 10종 경기) 우승을 하는 경우도 있고, 400m 우승자가 800m 우승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인간 기관차 자토펙(1952 헬싱키 올림픽 5000미터, 1만 미터, 마라톤 우승자)이나 누르미(1924년 파리 올림픽 1500미터, 5000미터, 1만 미터 크로스컨트리 우승자)처럼 종목을 바꿔 가며 여러 대회를 통해 여러 번 우승을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한 올림픽 대회에서 네 개의 금메달을 한 선수가 획득한 것은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올림픽 남자 육상 경기 4관왕의 주인공은 두 차례 있었으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제시 오웬스(미국, 본명은 James Cleveland Owens)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칼 루이스(미국)가 그 주인공입니다. 넓이 뛰기는 빨리 달릴수록, 가속이 붙을수록, 발 구르는 힘이 클수록 뛰는 거리가 멀어지므로 뉴턴이 이야기한 운동의 세 가지 법칙, 즉 관성, 가속도, 작용과 반작용이 모두 잘 이용되어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에는 관성과 가속도가 필요하므로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넓이 뛰기에서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딴 200m 달리기의 장재근과 넓이 뛰기의 김종일은 국내 육상 대회에서는 넓이 뛰기와 200m 달리기에 함께 출전하여 경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의 올림픽에 등장한 영웅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최초의 금메달이라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금메달로 기록된 대회는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입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가 처음 시작된 대회로 유명한 이 대회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고 있던 항공기 대신 비행선을 이용하여 올림픽에 대한 홍보 및 올림픽 관련 우편물을 전달함으로써 홍보에서는 앞선 대회보다 한층 진보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히틀러에 의해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목적 하에 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미국에서는 올림픽 보이콧에 의한 논쟁이 벌어졌고, 스페인에서는 대회를 보이콧하고 자체적인 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 전 세계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독일에 혜성처럼 등장한 실패한 화가가 있었으니 아돌프 히틀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편협된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인류 또는 국민의 화합을 깨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정치 집단이지만 희망이라곤 전혀 없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야 했던 당시의 독일 국민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대안 없는 선택의 대상이었습니다.
독일 정치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독일과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이를 통해 독일 국민들을 단합하여 다시 한 번 세계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한 기회를 가지기 위해 올림픽 대회 전체를 거대한 정치 쇼로 기획하였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로 "올림픽은 스포츠일 뿐 정치와 무관하다"고 역설한 쿠베르탱의 선언은 올림픽 시작 후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히틀러에 의해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으로 과시하기 위한 정치성 짙은 올림픽에서 유색인종으로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영웅이 바로 미국의 제시 오웬스입니다.
100m, 200m, 400m 이어달리기, 넓이 뛰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올림픽 최초로 한 대회에서 남자 육상 4관왕에 오른 그는 이 대회 최고의 영웅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워낙 정치성이 강했던 대회에서 근대 올림픽 시작 4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대스타가 등장했으나 히틀러의 기대와는 다르게 게르만족과 같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으므로 히틀러의 정치적 의도에 훼방을 놓은 셈이 되었습니다.
영웅에 대한 잘못된 전설
제시 오웬스의 4관왕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실력은 출중했습니다. 실제로 대회 직전인 6월 20일에 10.2초(수동계시)라는 남자 100m 달리기 세계 기록을 세운 그는 예선 2차전에서 10.2초를 기록하여 세계 타이 기록을 세웠습니다만 아쉽게도 바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록을 공인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선 1차전에서 10.3초의 기록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200m에서 세운 20.7초와 400m 이어달리기에서 세운 39.8초는 모두 세계 기록이었습니다. (넓이 뛰기에서는 8.06미터로 세계 기록을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 세계 기록은 역시 그가 1935년에 세운 8.13미터였습니다)
이와 같이 히틀러의 콧대를 꺾는 흑인 영우의 등장은 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잘못 알려진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 하나를 예로 들자면 히틀러와 악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론적으로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그가 히틀러와 한 번도 악수를 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의 호사가들은 제시 오웬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가 악수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히틀러의 노골적인 백호주의에 맞서서 제시 오웬스가 악수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70년에 발행된 그의 자서전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시 오웬스가 직접 쓴 내용에 따르면 "4관왕을 차지한 후 육상 경기장의 본부석을 지나갈 때 히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를 본 나도 히틀러에게 답례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가 히틀러와 악수를 하지 않은 것은 경기장 분위기와 진행의 흐름상 악수를 하기 곤란했기 때문일 뿐 서로를 경멸하여 악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미확인의 전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보다 앞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이 가미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은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후 40년이 지나도록 육상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8월 2일에 열린 포환 던지기에서 한스 뵐케(Hans Wöllke)가 독일 육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히틀러는 그를 본부석으로 불러 격려를 겸한 악수를 했습니다.
그 후로 그 날의 우승자를 계속해서 본부석으로 불러들이자 IOC 위원장이던 베일러 라투어가 "국가 원수가 육상 선수를 자리에 부르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인 히틀러는 그 후로 우승자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남자 100m 달리기 경기가 그 후에 개최되었고, 제시 오웬스가 우승을 했지만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 와전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요즈음처럼 매스컴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독일을 공격하는 무기로 국민들에게 제시 오웬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것도 잘못된 전설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초 벽을 깨자!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100m 달리기 기록이 정확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는 100m 달리기 기록을 정확히 잴 수 있었을까요?
기록을 재는 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손으로 기록을 쟀으므로 수동계시라 하지만 1960년대부터 사람 대신 기계의 힘을 비는 전자계시가 함께 사용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전자계시만 통용되고 있습니다. 수동계시는 10분의 1초 단위로 기록을 재지만 전자계시는 100분의 1초 단위로 기록을 재는 것이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남자 100m 달리기 기록의 한계는 10.0초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자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100m 달리기에서 10초벽을 깬 최초의 선수는 미국의 짐 하인즈(Jim Hines)입니다. 그는 1968년에 개최된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9.95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대회 남자 넓이 뛰기에서 밥 비몬(Bob Beamon)이 8.90m라는 대기록을 세운 점입니다. 그의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나게 좋은 기록이었으므로 그 후로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에서 수립되는 기록은 공기 저항이 적어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오늘날 별도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짐 하인즈의 기록을 깬 선수는 미국의 캘빈 스미스(Calvin Smith)입니다. 1980년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항의하기 위해 미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했을 때 제시 오웬스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면 지미 카터가 이끄는 미국 정부를 비난했지만 그 대회는 결국 반쪽 올림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미국이 1970년대에 들어와서 경기력이 저하되어 소련은 물론 동독에게도 뒤지게 되자 성적이 나쁠 것을 염려하여 핑계를 댄 것이 아닌가 하는 입방아를 찧기도 했습니다. 한 번의 반쪽 올림픽을 만든 장본인으로써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있던 미국은 (비록 소련과 그에 동조하는 나라들의 불참이 우려되기는 하지만)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어야만 할 시점에서 육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100m 달리기에서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으나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3년에 수립된 9.93초의 기록도 로키산맥에 위치한 고지의 도시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기록된 것이라 오늘날에는 별도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해에 그는 취리히에서 개최된 9.97초의 기록을 세워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헬싱키에서 개최된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에서 200m 달리기에서 우승했을 뿐 100m 달리기에서는 칼 루이스(Carl Lewis)에 이어 2위에 머무름으로써 동갑내기 칼 루이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칼 루이스가 절대 강자의 위치로 올라섬으로써 캘빈 스미스는 서울올림픽에서의 100m 동메달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400m 계주의 금메달 이외에 올림픽에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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