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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가마 150원? 차라리 떡 해먹겠다!

[해방일기] 1946년 2월 10일

1946년 2월 10일

李承晩은 주례 방송으로 5일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방송을 하였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물가는 올라가 백성은 기아와 추위에 떨게 될 것이니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하느냐 군정장관 아놀드 장군도 깊이 걱정하고 있다. 금일 제일 급한 것은 기아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첫째 비싼 쌀값이다. 그 원인은 농민이 쌀을 감추고 팔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농민이 먹을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다른 물가는 모두 비싼데 곡가만을 싸게 방매하라는 것은 아니나 자기의 이익만을 채우려 하지 말고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방매하여 세금을 바치고 대중생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애국가의 도의라고 할 것이다. 군정의 관측으로서는 적어도 백미 2만 석을 시장에 내지 않으면 금년 겨울에 백성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둘째는 해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쌀 한 섬을 800원에 사서 일본국에 가지고 가면 2만 원에 팔 수 있다고 매일같이 수천 석씩을 밀수출하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단연 용서치 못 할 일이다. 지주와 일반 농민은 곡물을 빨리 방매하여 군정 당국과 협력해 주기 바란다. 국가와 동포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 혼자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新국가의 건설은 될 수 없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으로의 쌀 밀수출에 관한 자료로 <자료 대한민국사>에 나타난 최초의 것이다. 같은 날 경무부장 조병옥이 쌀 밀수출 수사를 선언함으로써 쌀 밀수출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정치인 중 이승만이 제일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 무슨 까닭일까? 맥아더 사령부와 연계를 가진 그가 일본 사정과 미군 내부 정보에 밝은 것이 이유의 하나였을 것 같다. 존 다우어가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종전 직전과 직후 일본의 식량 문제를 서술한 몇 대목을 옮겨놓는다.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전장에서 병사들의 주된 사망 원인은 기아였고, 일본 본토에서도 기본적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반도, 대만, 중국에 의존해야 했다. 진주만 공습 이전에 이들 세 지역에서 수입된 식량은 일본 전체 쌀 소비량의 31%, 설탕 소비량의 92%, 콩 소비량의 58%, 소금 소비량의 45%를 차지했다. 패전은 주요 식량 수입원으로부터 일본을 단숨에 고립시켜 버렸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에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가정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보리와 감자가 밥상에 올랐지만 이마저도 넉넉하지는 않았다. 오사카 당국이 비상시 식단을 권장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는데, 이 식단을 보면 당시의 식생활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알 수 있다.

오사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 장교의 보고에 따르면, 천황의 충실한 신민들에게 도토리, 곡물 껍질, 땅콩 껍질, 톱밥 등을 식량으로 확보해서 전분 부족을 해결하도록 했다. 미네랄 보충을 위해서는 쓰고 난 찻잎, 씨앗, 꽃 장미 잎 등이 권장되었고, 단백질 부족을 해결하는 데는 번데기, 지렁이, 메뚜기, 생쥐, 집쥐, 두더지, 달팽이, 뱀과 소, 말, 돼지 등의 선지 가루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잘 말린 생쥐와 집쥐는 작은 새 같은 맛이 났다고 하는데, 뼈를 먹으면 체중이 준다는 관찰 결과가 있으므로 뼈만은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여져 있었다. (104~105쪽)

문제는 패전으로 아시아와 일본의 연결선이 끊어진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난해의 수확이 동이 날 즈음인 8월 중순에 패전을 맞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식량을 공급하던 식민지를 잃은 데다 수백만의 지친 민간인과 동원 해제된 군인들이 귀국 대열에 나서던 그해는 반드시 풍년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인력 부족, 농기구 부족, 비료 생산 저하 탓에 1945년은 1910년 이래 최악의 흉작을 기록했으며, 수확량은 평년에 비해 40%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마치 여러 신들이 이제 정말로 신국을 팽개친 것만 같았다.

동포를 팽개친 것은 관료들과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확물의 상당 부분을 곧장 암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가을과 겨울에 걸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으며, 10월 초에 농림 대신은 도쿄에 비축된 쌀이 사흘 치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 대장 대신은 식량 수입이 즉각 해결되지 않는다면 10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이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고 UP 통신사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106~107쪽)

1946년 2월 정부는 암시장으로 식량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 공출' 제도를 시행했다. 미 헌병이 경찰을 지원하는 일이 흔했기에 대중 사이에서는 '지프차 공출'로 불리기도 했다. 새 제도 아래에서 정부는 농민들에게 이전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구매가를 제시했지만 암시장은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그해 6월 암시장에서 팔리던 쌀값은 정부의 공식적 배급 체제에서 유통되던 쌀값의 30배에 달했으며, 그 뒤 2년이 지났을 때에도 공시 가격의 7.5배를 유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에게 콧대를 세우던 도시민들이 이제는 농촌으로 몰려와 구걸과 다름없이 식량을 구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그들과의 물물교환에 상당한 만족감을 표했다. 도시민들은 기모노, 시계, 보석 등 값진 물건들을 식량으로 맞바꾸었고, 이런 현상을 빗대어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유행어, '다케노코 세이카쓰(죽순 생활)'가 탄생했다. 죽순은 양파처럼 여러 겹으로 벗겨지는데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갖고 있는 물건뿐 아니라 옷까지 넘겨야 했던 도시민들의 모습은 실로 죽순 같은 것이었다. (108~109쪽)

종전 후 일본의 식량 문제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상황이었고, 이것은 종전 시점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10월 초 남한 군정청이 미곡 자유 시장화를 서둘러 결정한 데는 일본의 식량 문제에 대한 고려도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7일자 일기에서 나는 쌀 밀수출 문제를 "잘못된 식량 정책의 지엽적 결과일 뿐"인 것으로 경시했는데, 일본 사정을 들여다보니 미군 권력이 개입한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쌀 밀수출이 '권력형 비리'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그 개연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한 사례를 보더라도 권력의 개입 없는 잔챙이들의 장난으로 도저히 볼 수 없다. 2월 7일자 일기에 적은 것처럼 열차 운행이 줄어들고 화물의 취급 범위도 군수품과 식량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일본산 귤이 다섯 화차라니!

귤이 조선으로 건너오는 경로를 알아 방지하고자 운수국에서는 각 방면과 긴밀한 연락 아래 조사하고 있는데 요즈음 다시 다섯 화차를 압수하였다.

季節이 오자 눈 밝은 모리배들은 일본 상인과 결탁하고 조선의 쌀을 싣고 對馬島와 그 근처의 섬에서 일본에서 온 장사치와 귤을 바꾸는 것이 그 한 방법이고 또 하나는 직접 밤을 이용하여 인가 없는 남선 연안을 지정하고 미리 준비했던 미곡과 바꾸는 것인데 그 수량은 한 번에 수천 관 내지 수만 관에 달한다. 그리고 또 한편 일본서 조선으로 오는 전재 동포가 손수 가져오는 것이 워낙 동포수가 많아 적지 않은 수량이며 이 외에도 전문적으로 대량 밀수하는 악덕상인이 있는 관계로 현재의 식량 문제와 비추어 그대로 간과치 못할 중대 문제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월 10일자 <조선일보>에는 남한 최대의 공업 지대인 삼척 지방의 식량난 사태가 보도되었다. 같은 식량난을 겪는 대도시에 비해 외딴 곳의 공업 지대는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대책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기사 중 생필품영단이 보낸 1500석 쌀의 해상 실종, 구체적인 정황은 몰라도 권력의 개입 없이 가능한 일 같지 않다.

강원도 삼척 지방에는 식량난으로 매일 4~5명씩 아사자가 생긴다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원래 삼척 지방은 논이 부족하여 해마다 타지방으로부터 식량을 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원도에서도 가장 식량난이 심한 곳이다. 그런데다가 교통까지 지극히 불편하여 육로, 해상 모두 연락이 좀처럼 안 되고 혹 자동차편이 있어도 4~5일 이상 걸리기는 항다반사이다.

동 지대 일대는 日帝時代 소위 중공업 지대라 하여 北三化學, 三井油脂, 小野田시멘트, 三和製鐵 등 중공업 공장이 있어 일시는 종업원 2만 명까지 있었는데 해방 후 현재는 7500명이 건국을 위하여 각종 공업 부문에서 주야로 분투하고 있는데 식량난과 외부와의 연락 불원활로 현지 사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얼마 전 현지에서 군정청과 각 사회단체에 구제를 간청한 일이 있으나 현재 잉여미도 없고 또 수송도 문제이고 하여 생활필수품영단으로 하여금 작년도 말에 백미 1500석을 목포항으로부터 보냈던바 해상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그 행방을 조사한 결과 수송 도중에 일본 山口현으로 갖다가 팔아먹은 사실이 드러났다.

목하의 사정은 극도로 곤란하여 하루에 4~5명씩 굶어 죽는다는데 이대로 내버려두다가는 일대 사회문제화될 것이라고 하여 이번 내무부장회의에 참석한 姜致奉 강원도 내무부장이 직접 농상 당국에 진언하였으나 농림 당국으로서도 아무 대책이 없다고 하니 이 문제는 앞으로 시급히 구제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다수의 생명에 관계되느니 만큼 긴급책의 강구가 요망되고 있다.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월 12일 러치 군정장관의 기자회견에서 쌀 문제에 관한 이런 문답이 오갔다.

(問) 일전의 미곡 수집령이 내린 후의 성과는?
(答) 각도 지사가 시장 군수를 모으고 시장, 군수는 다시 정회장, 면장들을 모아서 이에 철저한 운영을 꾀하고 있다.

(問) 대체 38도 이남에 지금 쌀이 얼마나 있는가?
(答) 지금 조사 중이다. 수집이 되는대로 차차 알게 되겠지만 작년 가을의 수확이 1700만 석이어서 그동안 4할 즉 680만 석을 먹고 지금 1020만 석이 남았다고 보고 있다. 그 중에는 술 엿 같은 데도 낭비되었고 또 일본으로 밀수출한 쌀도 적지 아니하니 매우 딱한 일이다. 쌀을 몰래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은 벌써부터 금하고 있지만은 귀한 쌀로 엿이나 술을 만드는 모순을 막고자 지금 그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問) 쌀의 수집과 분배를 어떻게 하는가?
(答) 대체로 500만 석의 수집이 예상된다. 지금 서울에는 매일 18화차의 쌀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요사이 15일 동안에는 매일 7화차씩 들어오고 있어 점점 쌀 문제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집이 차차 되면 늦어도 내월 보름까지는 매일 서울 시민이 먹을 만큼은 들어와 순조로운 배급을 자신한다.

(問) 현재 서울의 쌀이 어떻게 배급되고 있는지 아는가?
(答) 지금 177곳에서 쌀을 배급하고 있다. 그리고 쌀을 배급하고 있는 것을 나는 직접 보았다. 그 수량이 적으나마 전연 없는 것보다는 낫겠고 장차는 배급이 더 좋아질 것이 틀림없을 것을 거듭 강조한다. (<조선일보> 1946년 2월 1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월 16일~2월 5일의 미소군 대표 회담에서 소련군 측의 미군 측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이북 지역으로의 쌀 반출에 대한 소극적 태도였다. 당시 일본의 식량난은 끔찍한 상황이었고 쌀값이 금값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점령군이 해결할 문제이며 한국 문제는 한국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소련군의 입장이었을 것이고, 한민족 입장에서도 타당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이 일기에 소개한 정도의 정황을 놓고 볼 때 미군정이 대일 쌀 밀수출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소련군 대표들이 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같은 맥아더 휘하 미군끼리 현해탄을 샛강으로, 38선을 한강으로 여긴다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게는 그런 의심이 든다. 군정 당국자들은 미곡 수집령으로 500만 석을 거둬들여 그 절반을 이북에 보내겠다고 공언하고 있었지만, 가마 당 150원(협조할 경우)은 실효를 거두기에 너무나 비현실적인 수매가였다. 병행하고 있던 소매 최고가격이 365~375원이었으니 미곡 수집령은 곧 미곡 강탈령이었다. 가마 당 150원에 갖다 바치느니 내가 그 입장이라도 떡 해먹고 엿 해먹고 술 빚어먹고 싶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수매가를 낮춰 잡았을까? 도시민들의 생계 부담을 줄여주느라고? 도시민들은 370원 주고라도 없어서 못 사 아우성이었는데. 미곡 수집령은 수집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수집을 회피하는 눈가림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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