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7일
2010년 8월 1일 연재를 시작하고 꼭 반년 만에 설 연휴를 만나 모처럼 닷새 푹 쉬었다. 누구에게나 자기 매달려 있는 일이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법, 그 동안 연휴를 만나도 연재 흐름 끊길 것이 걱정되어 추석 때도 신정 때도 휴일에 부득부득 글을 올렸었다. 이번에 모처럼 여러 날 푹 쉰 것은 반년을 채우고 보니 3년 연재를 밀고 나갈 자신감이 굳어져 작업 방향을 차분히 되살펴볼 여유를 가진 덕분이다.
반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고,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을 열심히 적었다. 구상 단계 생각으로는 매일 적어 나가면 웬만큼 중요한 일은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해보니 적을 수 있는 분량이 애초 생각보다 적었다. 선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생각하며 효과적인 기사 선택을 위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한다.
대중의 생활 조건을 많이 설명했으면 하는 희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다. 1940년대 초반 조선인의 생활 조건은 식민지 상태에 전쟁 상황이 겹쳐져 매우 열악했다. 해방으로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소되었으니 생활 조건이 향상되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행정의 혼란이고 또 하나는 38선 장벽이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억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는 효율성과 안정성을 꽤 갖춘 체제였다. 이 체제가 사라진 공백을 메울 효과적 대안이 나타나고 자리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8선 남북을 막론하고 큰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남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북에서는 주민의 자생적 질서를 점령군이 존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혼란이 극복되어 갈 수 있었는데, 이남의 점령군은 일본 지배의 효율성은 물려받지 않고 억압성만 물려받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대표적인 문제가 미곡, 즉 식량 정책이었다. 여운형이 해방의 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출범시킬 때 질서 유지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총독부에 요구한 5개항 중 하나가 3개월 치 식량의 확보였다. 큰 변화에 임해 식량 문제가 질서의 필요조건이므로 총독부와 일본군의 비축미와 군량미를 넘겨받아 추수 때까지 견딜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1943년 8월 이래 식량 배급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들어선 지 한 달이 안 된 10월 5일에 미곡의 자유 시장화를 선언했다. 작황이 좋아서 시장 상황을 낙관한 것이라 하는데,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경솔한 조치였다. 미곡 시장이 투기화되고 도시민들은 겨우내 식량 부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지주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한국민주당(한민당) 측의 획책이라는 의심이 나돌았다.
군정청과 경찰은 일본으로의 쌀 밀수를 계속 문제 삼았다. 일본의 쌀값이 한국보다 열 배나 비싸서 밀수가 성행했다는 이야기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설령 밀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분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잘못된 식량 정책의 지엽적 결과일 뿐이다. 정책의 잘못을 그런 식으로 개인의 도덕심과 애국심 문제로 호도하다가 결국 1월 25일 자유 시장화를 포기하는 미곡 수집령을 군정청 법령 제45호로 내놓았다.
법령 제45호 미곡 수집령
제1조 목적
광범한 기아, 영양 불량, 질병, 민심 불안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선군정청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 있는 미곡을 수집하되, 적당한 가격을 지불함. 단 每戶에서는 1石의 백분지45(67.5瓩)를 상주하는 가족 인원수로 乘한 수량의 백미 혹 현미를 保持함을 得함. 백미 혹은 현미에 대하여 正租로 전부 혹은 일부의 대등량을 소지함을 得함.
제2조 미곡의 양도
지방군정장관의 관할 하에 있는 기관으로서 면제를 받는 정부, 종교, 의료, 사회 후생 기관의 주관자 이외에 전조에 규정한 수량 이상을 소지한 자는 미곡 소재지 부윤, 읍, 면장의 요구가 있는 時로 그 초과량을 부윤, 읍, 면장 또는 其 대리인에게 양도하고, 공시로 결정된 최고 공정 가격으로 法貨, 또는 부윤, 읍, 면장 혹은 其 위임 기관이 서명 날인한 지불 명령서로 其 대리 지불을 수령함.
제3조 부윤, 읍, 면, 정회장의 직책 (내용 생략)
제4조 기타 관리 及 기관의 직책 (내용 생략)
제5조 위반 행위
법률의 일반적 위반에 부가하여 左記 행위는 本命의 위반행위로 함.
① 본 계획에 관하여 요구된 보고 작성 태만.
② 부윤, 군수, 읍, 면, 정회장이 본 계획에 의하여 其 직무수행 상 요구한 사항의 보고의 태만 또는 거절 及 허위의 보고서 작성.
③ 명령이 有한 時 명령에 따라 초과량 미곡 양도의 태만.
위반 행위에 관련한 미곡은 몰수하고 그 위반자는 처벌함, 미가 지불 가격의 적부에 관한 쟁의로서 미곡 양도 태만의 이유로 삼음을 不得함.
④ 미곡의 은닉, 훼손 또는 其 기도 또는 명령에 의하지 않는 부, 읍, 면 외에의 미곡 반출 위반 행위에 관련한 미곡은 몰수하고 그 위반자는 처벌함.
⑤ 본 기획에 관련하여 관리가 발령한 명령 집행의 태만 또는 거절.
⑥ 本令의 불복종을 선동하는 모든 행위 또는 협박.
第6條 임명 及 파면
도지사는 본 계획에 관련하여 발령한 명령을 충분히 이행치 아니하는 부윤, 군수, 읍, 면, 정회장 또는 정부 기관의 관리, 고원의 파면, 후임자 임명 及 이동의 권한이 有함. 도지사 또는 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도지사가 위임한 기관은 여하한 개인에게든지 명령으로 직무이행을 요구함을 得함.
第7條 벌칙
本令의 규정에 위반하는 자는 군정 재판의 결정에 따라 처벌함.
第8條 시행 기일
본령은 1946년 2월 1일 오전 0시에 효력을 生함.
1946년 1월 25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아처 엘 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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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의 존재가 경제 사정의 어려움을 더했다. 38선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던 조선 경제는 일본, 만주 등 외부와의 단절로 큰 제약을 받았다. 제조업의 상당 부분이 원료와 시장 문제로 마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은 그 제약을 더 심하게 했다. 양쪽 점령군은 38선을 통해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으므로 조선 경제는 국제적 분업만이 아니라 남북 간의 분업까지 가로막힌 것이다.
남북 간 분업의 가장 대표적인 품목이 식량과 에너지였다. 공업화 수준이 낮은 이남 지역은 일본 제국 안에서 중요한 미곡 생산지였다. 한편 이북 지역은 식량 생산이 적은 반면 석탄과 전력 생산이 많았다. 전력의 이남 공급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석탄 공급이 끊겼다. 이북에서는 석탄 대신 쌀을 들여오고 싶었는데, 이남의 미곡 시장 혼란으로 쌀을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월 1일 이남에서는 석탄 부족 때문에 열차 운행을 줄이기에 이르렀다. 경부선-경인선 열차가 하루 겨우 1회 왕복하는 등 구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정된 시간표도 옮겨놓는다.
일본에서 들여올 예정이던 석탄이 들어오지 아니하여 극도의 석탄난을 면치 못한 운수국에서는 2월 1일부터 전 국선에 한하여 대폭으로 열차 운행을 줄이기로 되었다. 이번 열차 운행 제한으로 경부선과 경인선은 2회 왕복(이밖에 경성-천안 간 구간 열차를 1회 왕복, 경의선과 경원선 이밖에 청량리-동두천 간 1회 왕복)은 1회 왕복으로 열차 운행이 줄었는데 경성-목포·여수 간 601·602 직통 왕복 열차 운행은 폐지되고 이에 대신 대전-목포와 대전-순천 간 열차가 운행된다. 그리고 용산선은 종전과 다름이 없는데 이밖에 모든 각 지선의 열차 운행은 1회 왕복만으로 줄었다. 그런데 2월 1일부터 운행될 열차는 다음과 같은데 열차 운행 시간은 대전-목포 간과 대전-순천 간 외는 종전과 다름이 없다.
◊ 경부선
경성 발-부산 행(146열차) 부산 발-경성 행(145열차)
경성 발-천안 행(136열차) 천안 발-경성 행(135열차)
◊ 경인선
경성 발-인천 행(705·715열차) 인천 발-경성 행(706·716열차)
◊ 경의선
용산 발-개성 행(205열차) 개성 발-용산 행(208열차)
◊ 경원선
경성 발-동두천 행(317열차) 동두천 발-경성 행(316열차)
청량리 발-동두천 행(631열차) 동두천 발-청량리 행(630열차)
◊ 호남선
대전 발 전 5시50분-목포 착 후 5시20분(623열차) 목포 발 전 9시-대전 착 후 5시(1620열차)
이리 발 전 12시-순천 착 후 8시20분(1621열차) 순천 발 전 6시-이리 착 후 12시30분(626열차)
용산선은 종전대로 운행
각 지선은 전부 1일 1회 왕복
열차 운행의 대폭 제한과 아울러 열차 승권도 종래의 약 3할 정도밖에 발매치 않는다. 그리고 화물은 군용품·식량의 긴요 물품 이외는 최급하지 않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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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미소군 대표 회담은 미소공위의 예비 회담 성격도 가진 것이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 문제의 해결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남북 간의 물자 교류 방안이 의논되었는데, 이북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쌀을 이남에서 내놓을 수 없었다.
소련군이 이남으로의 석탄 반출을 거부하기에 이른 것은 미군이 이북 상황 악화를 위해 일부러 쌀 반출을 회피한 것으로 의심한 결과일 수도 있다. 소련군이 남한으로 반출할 물자 8900만 원 어치를 제안한 데 반해 미군이 북한으로 반출할 물자 제안이 겨우 1035만 원 어치였다는 사실을 보면, 미군이 물자 교류에 소극적 내지 부정적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40쪽) 미군이 소련군에 비해 38선으로 인한 민생 문제 해결에 열의가 적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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