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컵 축구 대회가 한창입니다. 51년 만의 우승을 노린다는 매스컴의 보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시안컵 축구 대회의 역사는 반세기를 넘어섰습니다.
1956년에 첫 대회가 개최된 후 2004년까지는 매 4년에 한 번씩 개최되었으나 올림픽 축구예선과 본선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후로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를 피하여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2007년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로 올림픽이 열리지 않는 해에 대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는 유럽선수권대회가 열리는 해이기도 하므로 축구의 국제화가 이루어진 오늘날에는 아시아 축구팬들의 관심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경기가 열리는 해를 바꾼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맹주라고?
1월 11일 새벽에 열린 1차전에서 우리나라는 아시안컵 역사상 처음으로 바레인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경기 전까지 종합 전적은 9승 4무 2패였지만 지난 대회 예선에서 바레인에게 진 바 있으므로 이 날의 2대 1 승리는 아시안컵에서 처음으로 바레인에게 이긴 결과가 됩니다.
흔히 한국 축구 팀을 가리켜 "아시아의 맹주"라 하지만 이게 과연 사실일까요?
최근 25년간 월드컵 예선과 본선에서 보여 준 우리나라 대표 팀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굳이 틀린 말이라 할 수 없겠지만 아시안컵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보여 준 실력이나 성적은 아시아의 맹주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4년 전, 허허실실 전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경기를 압도하지 못한 상태로 준결승에서 우리나라를 이기고, 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음으로써 우승을 차지한 이라크를 제외하면 1980년 이후 여섯 차례의 아시안컵에서 우승컵을 가져간 나라는 두 나라에 불과합니다. 즉 일본이 10회(1992), 12회(2000), 13회(2004)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8회(1884), 9회(1988), 11회(1996)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습니다.
▲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2011년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한국은 1차전 바레인을 꺾은 데 이어서 14일(현지 시간) 오스트레일리아와의 2차전에서는 1대 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은 전반 23분 구자철 선수의 선취골로 1대 0으로 앞섰으나 후반 17분 동점골을 허용하며 1대 1로 경기를 마쳤다. 사진은 이정수 선수(오른쪽)가 공중볼을 다투는 모습. ⓒ뉴시스 |
너무나도 오랜 우승의 추억
우리나라가 마지막 우승을 차지한 1960년은 2회 대회였으며, 개최국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56년, 홍콩에서 아시안컵 축구 대회가 처음 개최되었을 때 본선 진출국은 우리나라 외에 홍콩, 이스라엘, 베트남이 전부였습니다.
이걸 아시안컵 대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1957년에 수단에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축구 대회가 처음 열렸을 때의 참가국도 4개국뿐이었고, 1930년에 월드컵 축구 대회가 처음 열렸을 때의 참가국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출전한 13개국뿐이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해도 끝이 창대하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라 생각됩니다.
첫 대회가 열린 1956년 9월의 대한민국 경제 상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으므로 참가 경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대회에서 홍콩에 2대 2로 비기며 첫 경기를 마쳤지만 이스라엘을 2대 1, 베트남을 5대 3으로 물리치면서 첫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회 우승국에 2회 대회 개최권을 주는 대회 규정에 따라 다음 대회 개최권을 가져왔지만 우리나라에는 경기를 치를 경기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어진 경기장이 효창운동장입니다.
2회 대회는 1960년 10월에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베트남을 5대 1, 이스라엘을 3대 0, 타이완을 1대 0으로 물리치며 그리 어렵지 않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회 대회 때보다 쉽게 우승한 것은 홈경기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약 2만 명을 수용하는 효창운동장에 10만 관중이 몰려들었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골을 기록한 한국 선수 중 최정민, 조윤옥, 문정식 선수는 훗날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며, 1회 대회의 세 골에 이어 2회 대회에서 또 두 골을 기록한 우상권 선수는 워낙 발이 빨라서 코너킥을 차 놓고는 직접 뛰어 들어가 헤딩을 했다는 믿기 힘든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치욕의 추억
시작은 좋았으나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5회(1972년 태국), 7회(1980년 쿠웨이트), 9회(1988년 카타르) 대회에서 각각 이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 결승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을 세 번 차지한 것이 전부입니다. 1970년대의 아시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이란은 4, 5, 6회 대회에서 3연패를 차지했고, 3회 대회의 이스라엘과 7회 대회의 쿠웨이트는 홈경기의 이점을 살려 우승을 차지한 바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대표 팀은 예선 탈락으로 참가조차 하지 못한 10회(1992년 일본) 대회를 제외하면 언제나 우승을 목표로 할 만했습니다. 물론 목표가 우승이라는 건 우승에 근접해 있다는 뜻이지 최고의 전력을 갖추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대가 높다 보니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감독에게는 가시방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네 차례의 아시안컵 참가를 통해 한국 대표 팀은 세 번이나 감독을 갈아치워야 했습니다.
아마도 올드 축구팬이라면 기억할 것으로 생각되는 11회 대회(1996년, 아랍에미레이트)에서는 1승(대 인도네시아) 1무(대 아랍에미레이트) 1패(대 쿠웨이트)의 그리 탐탁치않은 성적으로 예선을 간신히 통과하여 8강에 올랐습니다.
문제는 이란과 만난 8강전이었습니다. 전반 11분, 김도훈 선수의 선취골로 앞서 갔으나 20분 후 바게리 선수에게 동점골을 허용합니다. 4분 후 신태용 선수가 다시 골을 성공시키며 전반을 마칠 때만 해도 예선에서의 졸전은 그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반 7분, 우승을 못하고서도 그 대회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아지지 선수에게 동점골을 내준 후 경기가 끝나기까지 38분 동안 다에이 선수는 혼자 네 골을 몰아넣으며 우리나라를 혼수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다에이 선수는 모두 8골로 그 대회 득점왕에 올랐으며, 그 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이란 선수들의 유럽 진출에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또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경기장의 잔디가 쿠션이 심하여 적응하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고, 일부에서는 박종환 감독에 대해 선수들이 사보타지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후반전에 다섯 골을 내준 경기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필요했고, 그 결과 박종환 감독은 다섯 번째(축구 대표팀 감독 최대 기록)이자 마지막이 된 국가대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했습니다.
아시안컵은 감독의 무덤?
1990년대 초에 고재욱, 김호 감독 체제에서 두 번 코치를 맡은 바 있는 허정무 전 월드컵 팀 감독은 1995년도에 일회성으로 대표 팀 감독을 맡은 후 1998년 아시안게임부터 대표 팀 감독을 맡게 됩니다.
그 해 여름에 열린 프랑스 월드컵에서 예선 두 경기만 마치고 차범근 감독이 경질된 후 세 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대표 팀 운영 계획을 발표하도록 하면서 선발된 허정무 감독은 2승 1패로 올림픽 참가 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렸으나 (김호곤 감독이 이끈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 팀은 예선을 통과하긴 했으나 성적은 1승 1무 1패.) 그 대회 준우승 팀 스페인이 칠레에게 3대 1로 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때까지 비교적 대표 팀 운영을 잘 한 허정무 감독이지만 12회 아시안컵 대회(2000년 레바논)에서 1승(대 인도네시아) 1무(대 중국) 1패(대 쿠웨이트)로 예선 탈락하자 보따리를 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끈 2002년 월드컵 대표 팀의 수석코치로 강한 인상을 남긴 핌 베어벡 코치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아드보카트 감독과 함께 다시 대표 팀을 맡았습니다. 월드컵이 끝나자 아드보카트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 감독을 맡은 그는 한국 대표팀이 지금까지 여섯 차례의 아시안게임에서 다섯 번 준결승에서 떨어지는 전통의 한 부분을 장식하면서 2006년 도하에서 준결승 진출로 만족할 때만 해도 자리가 위태롭지는 않았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우승.)
그러나 이듬해 동남아 4개국에서 개최된 아시안컵 대회 예선에서 1승(대 인도네시아) 1무(대 사우디아라비아) 1패(바레인)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지도력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보다 한 수 뒤진다고 평가된 바레인 전에서의 졸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김두현 선수가 먼저 한 골을 넣었으나 두 골을 내주며 역전패하자 "코치일 때와 감독일 때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8강전에서 우리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이란을 무득점 후 승부차기로 꺾으면서 다시 자질 논란을 불식시켰으나, 준결승에서 이라크에서 두 경기 연속으로 골을 기록하지 못하면서 승부차기로 패하자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마지막에 웃자
"독이 든 성배"라는 별명을 지닌 감독 자리는 많이 있습니다. 이번 아시안컵 대회에서 첫 경기를 치르고 감독을 쫓아낸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10년간 13명이 감독을 맡았으니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독이 든 성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10년간 감독 대행 두 차례를 포함하여 모두 10명이 감독직을 맡았으니 "독이 든 성배"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예선 통과라는 업적을 남기고 허정무 감독이 퇴진한 후 감독을 구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상태에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김호 감독을 보좌한 바 있는 조광래 감독이 현 대표 팀을 맡아서 아시안컵 대회에 참가하여 이제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우승은 51년, 준우승을 한 지도 23년이 지났습니다. 23년 전인 1988년, 9회 대회가 열린 장소는 이번과 같은 카타르였습니다. 1994년 월드컵 예선 때는 도하의 기적에 의해 우리나라가 마지막 경기에서 출전권을 얻었지만 9회 아시안컵 대회에서는 예선에서 아랍에미레트, 일본, 카타르, 이란을 파죽지세로 몰아쳐 4승을 올린 후 준결승에서 중국마저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날려 보내야 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작년 한 해 우리나라 대표 팀은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올해도 이런 기세가 이어져 축구팬은 물론 전 국민에게 기쁨을 안겨줄 수 있도록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반세기만의 우승을 안겨다주기를 기대하며, 앞으로 계속해서 밤잠을 설칠 마음의 준비를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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