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마르크스'로 만든 저작이 <자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그 '과학'을 정립한 책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런 믿음 속에서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자본>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와 일반 법칙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면서 그 스스로를 내세우는 논리, 즉 자본주의적 논리와 그 논리 자체가 낳을 수밖에 없는 논리적 모순의 층위를 구별하지 않고 곧바로 <자본>에 있는 논리, 예를 들어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을 논리적인 모순이 아니라 상호 정합적인 연속으로 읽는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런 단순한 읽기가 해방이 아니라 총체적인 지배를 낳았던 현실 사회주의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탈바꿈되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발명품은 어느새 마르크스의 작품이 되었고 노동가치론은 국가에 의한 노동의 조직화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라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총체적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미몽의 역사에서 깨어나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는다면 그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생명력은 '과학'으로서의 진리라는 텍스트의 정전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생산되고 작동하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정통'이라는 권위 속에서 억압했던 마르크스의 또 다른 얼굴을 들추어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정통'은 <자본>을 읽는다. 아울러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자본>의 배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Grundrisse(그룬트리세, 요강)'라고 부르는 이 텍스트는 <자본>을 쓰기 위해서 1857년 7월부터 1858년 5월까지 마르크스가 썼던 초고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을 <자본>의 선행 작업이자 <자본>에 의해 집대성되는 것들의 기초 자료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텍스트들은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출판을 목적으로 이 초고들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위해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정합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 당파적 관점에서 전개시킨 풍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노동과 임노동, 노동자계급의 정치경제학
▲ <정치경제학비판요강>(전3권,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호균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 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하고 중지해야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본>을 읽는 방식인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의 논리적 연속성을 부정하며 '노동 시간'이라는 가치의 일반적 척도를 부정한다. 이 점에서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자본>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열어놓는다.
예를 들어 마이클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본>에는 빠진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노동자의 측면이다. <자본>에는 살아 있으며, 변화하고, 노력하며, 즐거워하는, 그리고 투쟁하며 발전하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신을 생산하며, 스스로를 생산하는 동시에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즉 실천하는 존재들은 <자본>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변화의 주체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자본론을 넘어서>(홍기빈 옮김, 백의 펴냄), 13쪽)
따라서 이것은 이전에는 너무나 당연시되었던 <자본>에 대한 새로운 읽기의 방향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본>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위기와 파국을 논증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자본>을 경제학적으로만 읽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노동가치론은 잉여가치론의 전제가 되며 잉여가치론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사이의 투쟁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론과 계열을 달리한다. 노동가치론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과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이론이며 존 로크는 노동의 가치를 통해서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논증하고자 한 것은 '노동가치론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논리인 노동가치론이 어떻게 잉여가치론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가'였다. 노동가치론의 정합적이고 일관적인 정립은 '화폐'라는 폭력적이고 전제적인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하면서 자기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노동과 임노동의 차이 속에서 읽었다.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잉여가치화 계열 속에서 노동은 처음부터 교환가치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의 사용가치로 현상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사용가치'는 자본주의적 노동의 부정이다. 즉, '비노동', '실재적인 비자본'이 된다. 그러므로 자본은 자신의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사용가치와 비노동을 자신의 본질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이 자신의 교환관계로 흡수하는 노동은 '노동' 일반이 아니라 '임노동'이다. 리보위츠는 이 모순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력 전체를 재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특정한 노동만을 산다. 따라서 노동자가 받는 몫은 언제나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못 미치며 자신의 노동 중 대부분은 '비노동'이 된다.
하지만 <자본>에서 계급 투쟁은 이 노동과 비노동의 모순, 또는 생명력 전체를 재생산하는 노동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을 따라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라는, 이미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법칙 속에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리보위츠가 주장하고 있듯이 '자본의 정치경제학'로서의 <자본>에 대비하여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노동자계급 자신의 관점(마르크스 자신의 관점이자 자기 이해)에 따라 기술된 '노동자계급의 정치경제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관점에서 다시 <자본>을 읽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헤겔적인 관념론의 소산으로 치부했던 알튀세르와 달리 오늘날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자본을 넘어서 자본>에서 '자기 가치화'와 '노동 거부'의 전략을 발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오늘날 정보사회론과 관련하여 기계와 정보화가 어떻게 개인들의 지성을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바꾸어 놓는지를 예견하고 있음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자본>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에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실제로 과학기술혁명과 자본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진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기계를 "지식과 숙련의 축적, 사회적 두뇌의 일반적 생산력의 축적"으로, "인간의 손으로 창출된 인간 두뇌의 기관들"이자 "대상화된 지력"으로 파악하면서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die allgemein gesellschaftliche Arbeit)"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게다가 더 나아가 그는 "고정자본의 발전은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적인 생산력으로 되었고, 따라서 사회적 생활 과정 자체의 조건들이 어느 정도까지 일반적인 지성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이 지성에 따라 개조되는가를 가리킨다"고 쓴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향유의 삶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봉쇄한 가장 결정적인 개념은 '욕망'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바로 이 욕망이야말로 해방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실재적인 경제-절약-는 노동 시간의 절약이다(생산비의 최소한과 최소한으로의 감축). 그러나 이 절약은 생산력의 발전과 동일하다. 요컨대, 결코 향유의 억지가 아니라 힘, 생산능력의 발전, 따라서 향유 능력뿐만 아니라 향유 수단의 발전. 향유 능력은 향유를 위한 조건, 즉 향유의 첫 번째 수단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개인적 소질, 생산력의 발전이다. 노동시간의 절약은 자유시간의 증대, 즉 개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시간의 증대와 같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해방은 결코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이다.
"교환가치에 입각한 생산은 붕괴하고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 자체는 곤궁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는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 따라서 잉여노동을 정립하기 위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의 최소한으로의 단축일체,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이 조응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해방시키고자 한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생산력을 발전시킨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들이 발전시킨 사회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향유 수단의 발전" 및 "자유시간의 증대"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산업노동의 발전과 대공장,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력에 주목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생산력주의자=기술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정서, 그리고 감성적인 향유 능력의 발전을 '사회적인 노동'의 전개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후기 프로이트의 생명적 힘으로서 '리비도'가 마르크스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것을 '차이의 차이화'와 같은 '생성'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자본과의 관계에서 이런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노동에 대한 지배를 생산하며 자본의 부로 나타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차이의 차이화'가 아니라 모순에 주목했다.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가처분 시간의 증가를 통해서 획득되는 사회적 욕망과 자본의 가치증식 욕망 사이에 존재한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사적 소유는 그것의 물질적 토대인 '노동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적 활동의 결합'인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과 모순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 해방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력을 체현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해방시키고 자율적인 자기 생산 노동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류의 집단적 두뇌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삶과 리비도적 삶의 활력을 가져오는 해방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자본>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을 읽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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