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은 "외부의 적"이라는 위협을 통해 권력자가 민중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극 중 등장하는 마을의 파수꾼이 멀리서 이리떼가 달려온다고 고함을 치고 북을 두들기면, 마을 주민들은 겁에 질려 분주하게 대피를 하고 마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망루에 올라가 자신의 눈으로 그것이 이리떼가 아니라 구름이었음을 알게 된 소년에게, 촌장은 마을 사람들의 단합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이리떼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때 유지되는 것은 마을의 질서가 아니다. 이리떼에 대한 공포에 질려 대피하는 마을 주민들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고, 이를 틈타 강간을 비롯한 끔찍한 일들이 자행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물론 한국 사회는 <파수꾼>에 등장하는 마을과는 달리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외부의 위협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파수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국민들은 북한의 도발에 치를 떨며 분개하고 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민방위 훈련도 35년 만에 실시되었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안보 상황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는 연평도에서의 한국군 포사격 훈련이 뉴스 속보로 생중계되면서 말 그대로 전 국민은 일상적인 비상상태 속에 살아가게 되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안보 위협의 와중에 여당 의원은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의원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외부의 위협을 구실로 내부에서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이들의 모습에서 <파수꾼>의 촌장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아감벤에 의하면, 근대 주권 권력의 핵심적인 관철 방식은 "예외 상태의 규칙화"에 있다. 예외 상태, 즉 비상 상태가 일상화되고, 권력은 규칙이 된 예외 상태 속에서 그 구성원들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포섭한다. 20세기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로 아감벤이 제시한 "예외 상태의 규칙화"는 오늘날 이리떼(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민주주의를 소멸시키려 하는 이명박 정부의 현주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연평도에서 포탄이 떨어진 예외 상태(물론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한 안타까운 예외 상태)가 우리의 일상까지 스며들면서 주권 권력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 하니 말이다.
장면#2 : 여권 발급까지 확장된 지문 날인 제도
▲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
원래 지문을 찍어 그 정보를 보관하는 것은 전과자에게 적용되는 일이다. 미국만 해도 그렇다. 전과자의 지문 정보를 저장해 두었다가 범죄 현장에서 채취된 지문과 일일이 대조해본다. 주민등록증 발급 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열 손가락의 지문 정보를 수집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말하자면, 한국 정부는 전 국민을 전과자, 범죄자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있다.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주체가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의 "신체" 또는 "생명"인 것이다.
"정치의 새로운 주체는 특권과 각종 지위를 가진 자유민 또는 나아가 단순히 인간(homo)이 아니고, 바로 신체(corpus)인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신체'의 요구와 제시로서 탄생했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주체로서의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근대적 생명 정치의 핵심 기능이다.
"심지어 생명 정치적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주권 권력 본래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신체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과정은 배제라는 예외적 상황을 통과해야 한다. 권력은 끊임없이 인간의 신체를 권력에서 배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방령(쫓겨남)은 그러한 추방령의 형태로 또 다시 인간의 신체와 관련을 맺는다. 다시 말해, 생명은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역설적 구조를 가진다. 이것이 주권 권력의 역설, 곧 외부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내부화해야 하는 권력의 이중성에 대한 아감벤의 설명이다.
전 국민에게 지문을 찍으라고 명령하는 한국 사회는 이처럼 주권자가 모든 국민을 범죄자 취급함으로써만, 즉 법의 테두리 밖으로 예외화하고 배제함으로써만 그들을 다시금 주권의 내부로 포함시키고 그의 시민권을 보장해준다는 역설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 배제/포함 관계 속에서 주체로 기입되는 것은 한 사람의 인격 주체가 아니라 그의 지문 정보, 다시 말해 그의 "신체" 또는 "생명"이다.
장면#3 :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불타버린 생명들
오로지 예외가 됨으로써만, 배제됨으로써만 내부화되고 포함될 수 있는 정치적 신체이자 생명. 그러한 "벌거벗은 생명"의 현시이자 구현체를 상징하는 근대적 시설물은 바로 수용소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수용소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고유 현상이 아니다. 독일에서 수용소를 최초로 건립한 것은 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근대 정치는 이를테면 "수용소의 보편화"로 그 특징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수용소에서는 법과 생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권력이 인간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 가장 순수한 형태로 권력 앞에 벌거벗겨진 채 나타난다.
2007년 2월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감금되어 있던 55명의 외국인("불법 체류자들") 중에서 28명만이 구조되었고, 나머지는 처참하게 불에 타 죽어야 했다. 이들이 저지른 죄는 시민권이 없는 자가 허락 없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불법으로 노동했다는 것. 법의 모태가 되어야 할 신성불가침의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국적법 위반이라는 현행법에 가로막혀 구현되지 않는 것이 근대 정치 체제의 실상이다. 남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수갑에 손이 묶인 채 감금당하고, 아무런 보호 없이 불에 타 죽어도 그 누구도 심각하게 처벌받지 않았다.
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은 누구나 죽여도 되지만, 희생제의에 바쳐질 수는 없다는 것을 그 근본적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노출된 생명,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배제된, 그러나 배제됨으로써만 주권 권력과 관련을 맺는 생명을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다.
호모 사케르, 즉 주권 권력 앞에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벌거벗은 생명을 살리고 정치화할지, 아니면 죽임으로써 배제할지를 결정할 권한은 절대적으로 주권 권력자의 수중에 놓여 있다. 즉 생명의 정치화는 생명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선택받음이라는 행위를 거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주권 권력의 절대적 "생살여탈권" 앞에 놓여 있는 것 역시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의 특징이다. "살 가치가 있는" 생명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결정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했는가?
앞서 언급한 "예외 상태"의 규정들은 주권자가 생살여탈권을 갖게 된 메커니즘을 설명해 준다. 주권자는 현 상황을 예외로 규정함으로써만, 그리고 그러한 예외가 규칙과 혼동됨으로써만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근대적 수용소는 이렇게 규칙이 된 예외 상태 속에서 등장한다.
"우리 시대의 수용소의 탄생은 근대성의 정치적 공간 그 자체를 결정적으로 표시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수용소의 등장과 함께 예외의 규칙화는 하나의 관례로 굳어진다. 권력자 앞에 벌거벗은 생명의 표상이 일반화되면서,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로 전락한다. 독일인인 나(또는 한국인인 나)는 유대인인 저들(또는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인 저들)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독일인(또는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순간, 저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힐 것이다.
이 때문에 아감벤은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말했다. 불에 타버린 생명체, 감금당한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른 '타자'의 표상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잠재적으로는 불에 타버린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법의 외부 그리고 예외 없는 생명
주권 권력의 근대적 형태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에서 신선한 점은 그가 언제나 주권 권력의 외부, 법의 외부를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주권적 추방령이라는 제한적 관계 너머를 사유"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아감벤은 법이 끊임없이 예외 상태라는 자신의 외부를 설정함으로써만 권력을 내부화할 수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이미 법에는 외부가 있다는 생각, 법에는 탈출구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법이 종결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법이 언제나 제헌 권력을 전제하지만, 이미 제정된 권력은 진정한 의미에서 제헌적 권력의 실현과 일치될 수 없다는 점을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의 존재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통해 입증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법의 가능 조건이지만 언제나 법의 외부에 머물러 있는 제헌 권력을 궁극적으로는 법의 질서에 파열음을 낼 수도 있는 조건으로 남겨두려 한다. 그리하여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진정한 예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의 효력이 정지되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아주의란 결국 일종의 예외 상태의 이론이다. 단 유효한 권력이 그러한 예외 상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전복시키는 메시아가 그것을 선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법의 외부성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율법(토라)의 끝"에서 차용된 것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4)
바오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야말로 의로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부정의 언어(~를 하지 말라)로 제시되므로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에 대해 가르칠 뿐이다. 이에 반해, 선이란 율법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율법의 범위를 넘어선다. 할례를 받고 율법서를 끼고 있지만 믿음을 저버린 유대인보다는 할례를 받지 않았고 율법을 모르지만 믿음을 가진 이방인이 더 구원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시에, 믿음을 통한 구원이 율법을 직접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율법의 완성=율법의 끝"이라는 바오로의 테제로부터, 법의 실현이 곧 법의 위반이 된다는 역설로 이행해 보자(우리는 준법 투쟁의 사례를 통해 이 역설적 개념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벤야민이 말한 "진정한 예외 상태"의 내용이 아닐까. 법은 언제나 배제를 통해 그 외부를 만들어냄으로써만 배제된 생명을 그 내부로 포함시킨다. 이렇게 법이 만들어낸 외부, 즉 법의 자기한계 설정으로서 예외가 선포되는 시점은 동시에 법의 끝, 그 탈출구가 개시되는 시점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가 지닌 역설적 구조 역시 이 점에서 해방적 성격을 획득한다. 배제된 호모 사케르는 주권 권력의 외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외부에 둠으로써만 주권 권력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주권 권력은 호모 사케르의 존재를 자기 자신의 실존 조건으로 요청하는 제한적 개념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호모 사케르의 존재는 그 자체 주권 권력의 외부를 상상하게 해준다. 생명이 배제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 "국가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동시에 사유"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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