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이런 병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소에 번진 전염병을 뜻하는 우역(牛疫)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중종, 영종, 인조, 현종, 숙종, 영조, 고종 등에서 194건이나 나타난다. 조선 시대에도 전염병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현종 4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올해 우역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습니다. 일찍이 정축년에 우역이 있을 때 소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죄를 적용하기로 영갑에 기재하였으니, 지금도 이 법에 의거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하소서."
일본인이 쓴 <조선의 축산>을 보면, 조선 시대에 소 전염병이 번졌을 때 어떤 조치를 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물론 조선의 모든 것을 폄훼해서 보려던 일본인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구제역이 번지면 도살과 소독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데, 조선 시대 때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종래의 관습으로 우역이 발생하여 유행하면 다른 건전한 소를 격리된 장소로 옮기고 차단해 다른 소의 출입을 금지한다. 또 춘하기에는 전염된 소를 들에 방치하고 생사를 하늘에 맡긴다. 격리차단의 취지는 좋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실시는 철저하지 못하여 병독을 만연시켜 그 피해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병든 소는 태워서 묻지 않고 흙에 파묻고 소독해 병독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데 실패할 우려가 있다. 또 단지 병든 소의 뿔을 염색하고, 뿔에 자물쇠나 고추를 다는 등 주술적인 방법을 신뢰하거나 지지기, 침 등을 사용하여 병독을 오히려 만연시키는 등 그 대응이 유치하다."
▲ 최근 구제역이 발생한 경상북도 안동에서 돼지, 소 등을 살처분했다. ⓒ뉴시스 |
우리나라의 농업은 소가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다. 한우는 체구가 크고 성질이 온순하여 체질도 강건하였다. 특히 농번기를 맞이하면 소를 빌려 감당하기 어려운 삯을 주고서라도 농사를 지어야 하므로 수의학은 고위 관리도 관심을 갖는 중요한 분야였다. 조선의 개국 공신인 조준, 김사위, 권중화, 한상경이 엮은 <신편마의방우의방>은 현존하는 최고의 수의서다.
여기에는 우역에 대응하는 처방도 나온다. 크게 직접 복용하는 처방과 태워서 향기를 맡게 하는는 처방이 있다. 직접 복용하는 처방은 석창포 담죽엽, 갈분, 울금, 녹두, 창출을 같은 분량으로 만들어 파초의 자연즙 3되에 넣고 꿀 1냥과 황납 두 돈을 함께 넣어 조제하여 먹인다.
태워서 향기로 치료하는 약물은 백출, 천궁, 세신, 창포, 여노 등으로 처방한 약물을 태워서 코로 향기를 맡게 한다. 소가 귀한 만큼 고가의 약물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인삼 분말 73g을 물 5되에 넣어 끓인 후 따뜻하게 식힌 후 먹인다. 당시 인삼의 가격을 생각하면 사람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뜸의 처방도 있다. 전염병이 처음 발생할 때 두 뿔 안쪽 우묵한 가운데 피부를 침으로 절개하고 3일에 한번씩 7번 뜸을 뜨면 좋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한방수의학은 누가 만들었고 어떤 원리였을까? 한방수의학은 한의학과 같이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질병의 생로병사를 설명한다. 한의학의 경전인 황제 내경이 황제와 기백의 문답식으로 된 것처럼, 수의학의 경전인 <원형료마집>은 황제와 마사황(馬師皇)과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의학도 의학처럼 그 기원이나 원리를 음양오행 원리를 기초로 자연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또 황제(黃帝)로부터 그 원리적 기초를 서로 묻고 답하면서 설명한다. <속시사(續始事)>라는 책에는 "황제 때에 마사황이라는 사람이 있어 신험한 듯이 말의 병을 잘 보았다. 마의는 이때부터 시작하였다"라고 하여 마사황의 존재를 부각하고 있다.
얼마 전에 왔던 환자 한 분이 침 치료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개가 디스크에 걸려 치료를 받았는데 수의사가 개 허리에 침을 놓고 단박에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도 예전부터 소에 침을 놓는 전통 수의사들은 많았다. 그러나 전래되는 침 법은 더 이상 직접 전수되지는 않았다. 소침쟁이라는 멸시 탓이었다.
정작 많은 고관대작들이 수의학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지만 기술 천시의 풍토가 전통 침 법 전승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지금은 잊혔지만 어릴 때만 해도 소가 병들면 약초를 구해 약물을 먹이는 장면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소를 물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듯이 소에게 한약을 먹이는 것은 만만한 일은 아니다.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이는 장면은 시골에서 늘 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런 약초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사라졌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더 먼 날은 전통 수의학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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