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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vs 소련군…진짜 '깡패'는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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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vs 소련군…진짜 '깡패'는 누구였나?

[해방일기] 1945년 12월 8일

1945년 12월 8일

8월 15일 이후 전국적으로 각 지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어 올라온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8일 서울 시내 천도교대강당에서 오전 11시 35분부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대회장에는 북위 38도 이남북을 통하여 전선 13도로부터 모여온 농민조합 대표자 670명과 경향에서 달려온 방청인 약 500여 명 그리고 내빈으로서 임시정부의 趙素昻, 金元鳳, 張建相 세 선생과 延安에서 돌아온 혁명 선배 金泰俊을 비롯하여 洪南杓, 安在鴻, 李鉉相, 李冑相, 李康國, 河弼源, 李源朝, 許成澤 등 제씨가 임석한 가운데 金麒鎔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李龜壎의 뜻깊은 개회사가 있었다. 이어서 대의원심사로 들어가 전국 217군과 21시의 756명에게 대의원증을 발송했는데 결국 190군의 670명이 이날 참석하였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 이에 앞서 대의원으로부터 긴급동의가 있은 다음 세 가지 사항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1) 스탈린, 朴憲永을 본대회의 명예회장으로 추거한다.
2) 연합국에 감사의 메시지를 보낸다.
3) 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에 감사의 메시지를 보낸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스탈린과 박헌영을 추거한다고 했지만 농민조합 운동이 공산당의 기획 작품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농업 구조를 심하게 기형화하고 대다수 농민을 곤경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부터 일제에 대한 항거에서 농민운동의 비중이 컸다.

식민지 시대에도 사회주의자들이 농민운동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적색노조'가 농민운동의 전형적 양태로 자리 잡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활동은 많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공산당의 지도 역량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인 농민운동이 펼쳐진 농민조합총연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창립 대회에 참석한 면면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농민의 일반적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주의 원리 도입에 대해서는 '좌익'을 넘어서는 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향후 발전을 위한 체계적-조직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대는 역시 누구보다 공산당이었다.

1946년 3월 이북 지역에서 이뤄진 토지 개혁은 민심에 부응한 정치적 대성공이었다. 이를 주도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순조롭게 자리 잡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성공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좌우를 따지기에 앞서 해방된 민족의 정치적 염원을 실현한다는 과제가 1946년까지 이남보다 이북에서 훨씬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토지 개혁이었다.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하면서 이북 지역에 대한 서술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접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의 분량 차이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연구 중에도 반공 프로퍼갠더 성격을 띤 것이 많아 적절한 이해를 더 어렵게 하는 면도 있다. 이북 사정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정리한 개관을 이따금 끼워 넣는 정도로 진행해야겠다.

이남에서 미군정이 일으킨 문제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이북에서 소련군은 어땠을까? 소련군의 행패 이야기를 반공 홍보용으로 많이 들으며 자라났는데, 이제 생각하면 모두 개인적 범죄 이야기다. 어느 점령군이라도 총 가진 점령군이 총 없는 주민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다. 이 범죄를 잘 막느냐 여부에 따라 점령군의 능력과 도덕성이 평가되겠지만,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정치 구조에 작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소련군은 미군처럼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점령'의 임무를 최소한으로 했다. 단적인 예가 군경무사령부(komendaturas) 운영 방식이다. 진주 직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113개 군경무사령부를 만들었으나 9월 말까지 그 수가 54개로 줄어들었다. 무장 해제가 완료되어 필요 없게 되면 바로 해체한 것이다. (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92쪽)

소련군은 정치 관계 업무를 담당할 기구로 10월 3일에 민정부를 만들었다. 일본군 무장 해제가 대략 끝난 시점에서 만들어진 민정부는 이남의 군정청 같은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치 조직 형성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10월 8~10일)와 북조선 5도행정국(10월 28일)을 거쳐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소련군 민정부가 뒷받침해 주었다.

인민위원회의 자연발생적 성격을 김남식은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로,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농민-민족자본가까지를 포함하는 광범한 계층을 대변하는 정권 형태였다.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민족적인 과제와 일제 통치 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극소수의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계급-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으로서 인민위원회가 탄생한 것이다.

(…) 둘째로,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조직이 공산당이라는 전위당이 창건되기 이전에, 또한 남한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 단계를 거치지 않고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혁명 과정을 본다면 공산당이 먼저 조직되고 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 활동에 의해서 인민위원회와 같은 정권 형태가 구성되기 마련인데 해방 후 북한에서는 당이 조직되기 전에 정권기관이 먼저 출현하였다.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21~22쪽)

소련군이 인민위원회에서 좌익의 입장을 지원하기는 했다. 예컨대 8월 하순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고 나서 조만식 진영이 지배적이던 인민위원회 구성을 바꿔 우익과 좌익을 같은 숫자로 한 것과 같은 일이 여러 곳에서 있었다. 그러나 그 '좌익'은 넓은 의미의 좌익이며,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자의 손에 넘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1990년대 이전의 연구자 상당 범위가 요즘은 "냉전 시대의 서방 학자"로 지칭되는데, 그들은 소련이 위성국가 건설의 야욕을 가지고 북한 점령에 임했다는 주장을 열심히 내놓았다. 그런 주장을 내놓는 것이 미국에서 연구비 따먹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해방 시점에서 소련이 한반도에 큰 야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냉전 종결 이후 밝혀지고 있다. 당시 소련이 동구권 경영에 집중하며 이란, 그리스, 터키 등지에서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사정을 보더라도 소련의 야욕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북의 소련군은 맥아더 휘하의 미군과 같은 정치적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한 점령 정책을 펼 필요가 없었다. 이 무렵 소련군 점령의 폭압성을 부각시키는 반공 선전 소재로 '신의주 의거'가 있었는데, 한 청년단체가 그 사건을 선전하고 나섰다.

최근 항간에는 서북 지방의 학생 사건의 참상이 유포되어 각 방면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大韓民國獨立促成中央靑年總聯盟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11월 23일의 신의주 학생 사건이라 함은 신의주 7개 중학생 2600여 명이 道 인민위원회 공산당 본부로 가서 과격분자가 인민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발하니 이것을 방지하라고 건의하려 하였던 바 경비원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또 학도대가 비행장 제방을 시위하며 통과하자 모국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2일 동안에 사망자 8명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월 7일의 함흥 학생 사건은 러시아 혁명 기념 가두 행진 때 인민위원회에서 부르자는 창가와 학교 측에서 부르자는 창가와 상위되는 점이 있어서 학교 당국과 인민위원회 간의 충돌이 있었다. 학교 교원과 상급생이 감금된 사실이라고 한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8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암스트롱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 처리 과정을 중시한다. (<북조선 탄생>, 105~108쪽) 김일성이 즉각 현지로 달려가 학생 대표들과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개혁에 나섰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가진 교조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의주 사건 규모의 갈등은 남한에서도 남원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점령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북한에서는 이런 갈등이 '대구 폭동', 여순 사태, 제주 4·3 항쟁 같은 규모로 자라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암스트롱이 사건 처리 과정을 중시하는 데 공감이 간다.

12월 8~10일의 농민조합총연맹 창립대회에는 38선 통제로 인해 이북 지역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농민조합 운동은 이북 지역이 더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쌀의 비중이 적은 이북 지역에서 소작 비율이 낮고 지주 세력이 약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된다. 북한의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총연맹 이북지부를 발판으로 하여 이듬해 1월 31일 북조선농민동맹을 창설, 토지 개혁의 주체로 활동하기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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