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7일
최후로 한 가지 얘기하랴는 것은 일을 하랴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 있는 부자들께 돈을 많이 내도록 합시다. 그러타고 빼앗지는 마시오, 우리들이 불한당이 될 테니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모와놓으면 저네들도 우리의 실력 있다는 것을 알 것이요, 그리고 자주 독립할 실력이 있구하면 모든 일이 다 일우워질 것이 아니오.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제1차 제2차 경과보고",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1쪽에서 재인용)
11월 1일의 독촉 회의에서 이승만이 한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청년 시절 이후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공리주의 사고방식에 길든 그이기에 돈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실력'을 숭상하는 자세는 그를 민족주의 지도자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일으켰을 것 같다.
'우리'가 큰돈을 모아놓으면 저네들(미국과 군정청)이 우리 실력을 알아본다는 얘기, 뒤집어보면 부자들의 실력을 우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35년 식민지 시대를 거친 그 시점에서 부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식민 지배에 협력하면서 실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이제 식민 지배 대신 '우리'에게 협력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이승만이 여기서 말한 '우리'는 민족주의 진영이 아니라 실력자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뉴라이트 논객들에게 숭상받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실력자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기협, <뉴라이트 비판>, 55~57쪽) 그들 중 친일 경력이 너무 두드러져 한민당에조차 드러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승만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처든 집단의 하나가 대한경제보국회였다.
서울시를 중심으로 거액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조선 사람 재벌의 움직임이 자못 주목되던 차에 서울 시내 거주 재벌들이 李承晩의 주선과 알선으로 大韓經濟輔國會를 조직하고 현재 물가고로 말미암아 도시의 회출이 전연 없고 또 모리배의 관계로 천정 모르고 오르는 쌀값을 적극적으로 저락시키고자 군정청에서 보관중인 일본인 군수품을 공정 가격으로 불하받아 바터제로 생활필수품을 농민에게 주고 쌀을 사들여 도시 근로대중에게 헐가로 판매할 계획이며 기타 보국기금도 모집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알선역을 한 李博士는 비서 李淨을 통하여 동회의 목적을 일반에게 발표하였는데 동회 역원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 : 金鴻亮 副委員長: 閔奎植
委員 : 崔昌濟 康益夏 金用淳 金瑞東 趙俊鎬 朴基孝 許澤 金星權 孔濯 朴寧根 金泰熙 張震燮 金熙俊 監事: 李賢在 金淳興 金聖駿 相談役: 李淨 李民 片德烈 金永煥 (<중앙신문> 1945년 12월 15일자)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조직이 공식 발족한 것은 12월 12일이었지만, 실제 출범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12월 3일 돈암장에서 열린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보국기금실행위원회 설립을 결정하고 이승만의 알선으로 군정청을 통해 조선은행에서 거액을 대부받을 방침을 의논했다. (계획된 대출액은 2억 원으로 당시 알려졌다.) 그러다가 비판적인 논설이 일어나자 당시 민생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쌀 공급 문제에 공헌하겠다는 명분으로 나선 것이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0~584쪽)
이 무렵 이승만이 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돈을 엮어보려는 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
산업인의 대동단결과 산업 경제의 통일 발전, 산업의 과학적 개혁, 대중적 산업기구의 신편성을 강령으로 국내 산업을 진흥코자 하는 建國産業聯盟本部는 韓鐸烈을 위원장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 제1착수로 李承晩의 알선으로 군정청과 양해가 성립되어 38도 이남에 있는 日本軍官私團體가 소유하고 있던 가격 약 17억 원의 물자를 讓受하여 양심적인 40 지정 배급점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배급 판매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필수 물자가 민중에게 균점되며 고물가를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또 현재 일본에 있는 현금 약 10억, 기계 설비 자료 약 3억, 고정 시설 약 9억, 도합 28억의 자본과 1만7000인의 기술인을 국내에 이전해 올 계획을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 활동이 기대되는 바 있다 한다. 또한 동 연맹에서는 기관지 <産業新聞>을 준비 중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건국산업연맹, 경제보국회, 참 좋은 이름들이다. 식민지 체제에서는 2~3류 자본가였던 국내 '거부'들에게 이승만이 구세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일본인의 조선 내 재산의 몰수를 당연하게 여길 때였다. 아무리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식민 지배 권력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재산권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금광왕이건, 백화점왕이건, 대지주건, 몰수의 위협을 피할 수 없었다. 38선 이북에서는 널리 현실로 나타나고 있던 사태였다.
그런데 재산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인 재산에까지 손을 뻗쳐 1류 자본가로 도약할 기회를 이승만이 열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유일한 위험인 '친일파' 처단으로부터의 면죄부와 함께. 한민당의 득세에 생존의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김학준의 <고하 송진우 평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12월 중순 어느 날 한민당 간부들이 임정 요인들을 국일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신익희가 친일파의 엄격한 숙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함에 장덕수가 "그러면 나는 숙청이 되겠군" 하는 것을 신익희가 "설산(장덕수)뿐이겠는가" 맞받을 때 곁에 있던 송진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130~131쪽에서 재인용)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늘어앉은 앞에서 정말 이런 말이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럴싸하기에 이 얘기가 전해져 <고하 송진우 평전>에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을 것 아니겠는가. 최창학 저택을 비롯해 임정의 경비와 요인들의 용돈까지 이승만-한민당-재산가 사이에 이미 형성된 극우 카르텔이 제공하고 있었을 수 있다. 상해에 보낸 비행기까지 극우 카르텔은 자기네 호의로 생색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임정을 "국내에 발붙일 데 없이" 된 존재로까지 당당히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이 국일관 연회에 앞서 임정에 대한 자금 제공을 놓고 한 차례 풍파가 있었다고 한다. 10월 20일 결성된 환국지사영접위원회('還國'을 '韓國'으로 표기한 자료도 있음)에서 환국지사후원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가 임정에 900만 원을 제공했는데, 김구는 이 돈의 배경이 석연치 않다 하여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후원회의 장덕수가 임정의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는 소동까지 벌어졌는데, 송진우가 김구를 찾아가 "임시정부도 정부요, 정부가 받는 세금 가운데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법이오." 운운 하여 사태를 무마했다고 한다. (강준만, 위 책, 129~130쪽; 김재명, <한국 현대사의 비극>, 201~203쪽)
12월 8일자 <자유신문>에 실린 물가 조사에 따르면 백미 소두 한 말에 70원이었다. 900만 원이면 쌀값을 기준으로 지금 돈 약 30억 원의 가치다. 임금 수준이 낮던 당시에 그 실질적 가치는 그보다도 엄청나게 더 컸을 것이다. 정병준은 이승만이 1945~1947년간 거둬들인 정치 자금이 최소한 2700만 원을 넘을 것으로 파악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06~609쪽)
장준하가 함께 돌아온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 국내 지대의 환영회를 받은 일을 적은 것이 있다. 장소는 최고급 요정인 명월관이었고, 산해진미는 물론, 손님 수에 못지않은 기녀들이 시중드는 자리였다. 귀환한 날부터 경교장을 경비했다는 것이 이 지대였을 텐데, 이런 잔치 벌일 능력을 가진 부대가 과연 임정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지대'였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비서진의 장준하까지 이런 잔치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면 임정 요인들에 대한 환대가 어떤 수준이었을까? 재산가들에게는 임정 요인들이 친일파의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통로로,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합작의 대상으로 가치가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 없이 중경에 틀어박혀 있던 임정 요인들이 갑자기 온갖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2월 6일 국무회의가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장준하가 탄식한 것은 기대가 지나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국 후의 첫 정식 국무회의에서 제2진으로 입국한 각료 한 사람이 "오늘은 보고를 듣는 것만으로 하고 우리도 국내 정정에 직접 접할 기회를 가진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제안하여 안건을 다루지 않은 채 산회했다고 한다. 장준하는 이렇게 탄식했다.
김구 주석의 말처럼 과연 '여러 파, 여러 층을 한 보따리에 싸서 그것일랑 어디에든 내던져 버리고들' 들어온 것인가? 그대로 끼고 들어온 파벌 보따리들을 한층 더 크게 부풀리고자 하는 것뿐이다. 좁은 사회에서 적은 수의 지지 배경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파벌들이 국내에 들어와 좋은 여건을 맞게 되자 이제야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각기의 세력을 좀 더 확보-강화하려는 내심들이 없었다면 온 국민의 여망이 모아진 이날의 회의를 그처럼 무위로 끝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인가.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 220~221쪽)
국내에서 맞닥뜨린 온갖 유혹에 대한 우려는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9월 6일 시점에서 그로 인한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 중경에서의 '폭탄' 발언과 겹쳐 생각할 때 장준하의 결벽증이 지나치거나 김구 중심의 임정 단결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환국 직후의 임정이 "국내 정정에 직접 접할 기회"를 충분히 가질 때까지 적극적 결정을 보류한 것은 타당한 방침으로 볼 수 있다. 회의를 '무위(無爲)'로 끝내는 편이 나은 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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