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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의 그늘, 역사를 망각하면 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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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의 그늘, 역사를 망각하면 亡한다!

[철학자의 서재] <앵그리 차이나>

정신 차린 중국?

먼저 <앵그리 차이나>(쑹샤오쥔 등 지음, 김태성 옮김, 21세기북스 펴냄)를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중국과 서양은 원래부터 그 관계가 모호하고 구조적 갈등이 있어왔는데, 2008년에 들어서 점차 그 양상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자면, 원촨(汶川) 대지진 이전에 해외에서 일어난 올림픽 성화 봉송 저지 사건으로 파생된 중국 젊은이의 집단 반발은, 까르푸(Carrefour : 프랑스 회사로 세계 2위의 대형 할인점.) 봉쇄와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성화 세대의 행동은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사건과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취지는 같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상징인 까르푸를 공격한 중국 젊은이의 직접 행동"을 찬양하는 듯한 이 책은 곧바로 이렇게 주장한다.

올림픽 개막일인 2008년 8월 8일 러시아와 그루지야 사이의 전쟁에서, 적어도 5일 동안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 대한 러시아 군의 공격 여부를 판단하기 힘든 상황에서, 미국은 철군을 주장함으로써 올림픽이 끝난 후에 중국과 반목하는 것을 피했다. 가장 소란스러웠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신선했다.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 이 책 저자들의 발언(2008년 중국 젊은이의 반발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역대 중국인들이 쌓아 놓은 문화적 축적을 기반으로 한다)에는 진실성이 결여돼 보인다. 왜냐하면, 중국의 정치인, 젊은이들은 1949년 이후 현재까지 중국을 견제해온 자본주의 국가의 상징인 세계 1위 강대국인 미국은 두려워하면서, 만만한(?) 프랑스 까르푸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99년 미국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을 오폭한(?) 사건이나, 2001년 발생한 미국과 중국 비행기가 난양(南洋)에서 충돌한 사건에서 발생한 중국의 심각한 피해를 놓고도 "당시 젊은이들이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토론"을 벌였고, '1999년에서 2008년까지는 매우 동태적인 문화 변천의 과정이었다"고 얼버무리고 있다.

또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인 2008년 8월 8일, 러시아와 그루지야 사이의 전쟁 당시 미국의 역할이 과연 무엇을 의도한지도 모르고 "신선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1980년대 자본주의 경제 정책의 원조 격인 주은래, 등소평이 유학했던 프랑스의 까르푸를 공격한 것은 찬양한다.

아편전쟁의 주역(영국과 프랑스)이었던 역사적 사실과 중국 내 프랑스의 반(半)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윈난성(雲南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국의 반식민지인 티베트와 그 출신 달라이 라마에 대한 옹호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성화 봉송 과정에서 역시 달라이 라마를 옹호했던 영국, 미국에서는 소란스럽지 않고 프랑스에서만 그렇게 극렬했는지에 대한 분석쯤은 있어야지 않았을까?

중국은 왜 화를 내는가?

▲ <앵그리차이나>(쑹샤오쥔 등 지음, 김태성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이 책의 저자들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며, 앞으로 중국이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같은 동북아시아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특히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본과 미국의 영향 아래 100년 동안 진행된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우리와 국경이 인접한 국가로서 5000년 역사 속에서 은원(恩怨) 관계가 워낙 깊다. 비록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적국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1992년 새로운 수교 이후 최근 약 20년간의 밀월 관계는 앞으로 갈등 관계로 변화할 조짐도 없지 않다. 옛말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같이 벼락 맞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이 약 150년간 국경이 맞닿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여러 나라들에 행한 국제 정치 행태를 생각하면 끔직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며 내는 목소리와 행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처럼 지난 100년간 중국이 지나온 고난의 역사를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고, 그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도 한 예다.

이런 중국의 분노는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한 중화 제국주의의 그것이 아닌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사상적 바탕인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에서 부국강병 신화를 답습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발로가 아닌가? 옮긴이가 서문에서 "부활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서곡"이라며 "중화 패권주의의 혐의"를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사실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중국의 분노의 근원에는 지난 100여 년간의 제국주의 침탈, 간섭, 종속뿐만 아니라, 지난 30년간 중국이 제 손으로 진행한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방 도시를 중심으로 온갖 문제가 발생했고 그에 따른 인민의 분노가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과 관료의 부정부패와 관료주의, 지방 관리의 땅 가로채기, 농민공(農民工)에 대한 기업가의 잔혹한 착취, 도시와 농촌/부자와 빈자 간의 빈부격차, 개발을 빙자한 환경 파괴, 경찰의 소요 사태 진압 방식 등이 인민을 분노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 개혁 개방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리라.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이 책의 저자들처럼, 중국의 고사를 빌리자면 '은인자중(隱忍自重)', '와신상담(臥薪嘗膽)', '도광양회(韜光養晦 : 능력을 감추고 남이 모르게 힘을 배양함)' 하지 못하고 계속 건방을 떨다가는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또다시 망한다'는 뼈아픈 고통을 당할지 모른다.

일본은 1980년대 거품 경제가 정점에 이르고 나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국도 지금 이른바 'G20' 운운하며 으로 폼을 잡지만, 그 속사정을 살펴보면 대다수 서민은 1997년 외환 위기 때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고 그 부작용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중국도 일본, 한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참에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시금 '자유 시장 경제 원칙'과 미국식 세계화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중국의 부국강병에 놀라기만 할 게 아니라,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손자병법>에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화 제국주의의 길

이 책의 저자들은 등의 책과 이와 유사한 책, 글을 통해서 이미 1990년대부터 일본, 한국에서 잇달아 등장했다. 그들은 "인민의 공통된 목소리를 바탕으로 하라"는 중국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하면서도, "(중국) 대중의 수준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안팎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일찍이 일본에서도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경제를 염두에 두고 반미 감정이 소용돌이쳤었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모리타 아키오, 이시하라 신타로가 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그런 시각의 전형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일본의 한 기자는 2003년 <중앙일보>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이라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의 후나바시 요이치는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이 글에서 햇볓 정책,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등을 언급하며 "국가의 성장 과정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한국은 반항기의 절정에 달한 사춘기 청년처럼 보인다"며 "말하자면 (미국에 대해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이런 일본, 한국의 사정을 염두에 두면 1980년대 말의 일본의 반미 감정에 이어서, 2000년대 초에 한 번 더 한국의 분노가 표출되고 나서, 2008년 중국 청년의 분노가 있었던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의 1919년 3·1 운동 후에 중국의 5·4 운동이 있었다. 또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1966년 중국에서 홍위병이 등장했다.

1995년 7~8월 나는 처음으로 중국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다.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경험을 했는데, 한국의 한 여행객이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묻자 중국 한족(漢族) 가이드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방 언론을 통해 피상적으로 느꼈던 중국의 대소수 민족 정책과 영토에 대한 수호의지를 섬뜩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2009년 말 중국 총리 원자바오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자신들의 현재 경제력과 군사력(부국강병)에 관해 말했다. 그는 한국전쟁('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 참전하여 미군 폭격으로 전사한 모택동의 큰아들을 참배하면서 "모안영 동지! 이제 조국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편안히 잠드시라"고 일갈했다.

이 책을 덮으면서 원자바오의 말을 떠올리면, 역사적으로 중국이 분열 상태에서 통일 제국으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힘을 발휘할 때 인접 국가인 우리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얼룩졌던가를 반성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 또 다시 그 고난의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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