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인들은 19세기부터 서양과의 고통스러운 만남을 통해 개혁이나 혁명, 그리고 이른바 근대화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면서도 미래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해 왔다. 이 과정은 외래 사조의 수용과 함께 전통 관념 체계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의 활동과 연관되어 형성되었다. 이 시기 아시아인들의 정치적 생활의 문법을 지배하는 주요 관념들은 전통적 관념들과 혼합된 서양에서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 관념들은 아시아의 언어로 번역하여 통용되었으나 그 진정한 의미가 생활 속에 실현되기보다는 봉건적 전통 관념들과 혼합되어 봉건적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점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인이 자신의 전체적 역사에 대한 거시적 반성과 실증적 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진정한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물 중심의 사상사나 지성사는 주요 핵심 용어들(키워드)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에 대한 통계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컴퓨터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가능해짐에 따라, 인문학에서도 넓은 범위에 걸친 자료 모음과 통계적 방법을 기초로 관념사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가진 평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김관도(金觀濤) 홍콩중문대학 당대중국문화센터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 팀이 중국근현대사에 대한 1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구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양일모 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 등이 '동아시아 기본 개념의 소통연구'의 일환으로 번역했다.
김관도는 중국 <중앙방송>이 1987년에 방영한 <河殤(하상)>에서 과학과 민주 및 서양세계를 배우자는 주장을 통해 1989년 중국 천안문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시스템 이론으로 중국역사의 순환적 성격(많은 혁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체제와 관념이 반복된다는 의미)을 초안정 구조로 표현하여 중국의 사상과 생활의 봉건적 낙후성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관념사란 무엇인가>(1·이론과 방법, 2·관념의 변천과 용어)(김관도·류청봉 지음, 양일모·송인재·한지은·강중기·이상돈 옮김, 푸른역사 펴냄)에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견해는 재래의 동양적 정체성(停滯性)을 비판하는 아시아 정체론을 크게 벗어나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관념사란 무엇인가 1 : 이론과 방법>(김관도 등 지음, 양일모 등 옮김,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
특히 한국의 경우 봉건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신문화운동의 전례는 1920년대 <開闢(개벽)>지를 통한 제한된 신문화운동 이후 없었다. 봉건적 유습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경제 권력 영역에서의 황제경영과 세습체제, 대기업의 무제한적 확장, 삼류 정객들의 민생론, 대학의 사대주의 학술문화 등은 한국인의 불행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양인들의 봉건적 유습과 과거 지성사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 연구가 시급히 요구된다 하겠다. 이 점에서 중국근현대에서의 관념사 연구는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근대 이후 진리, 과학, 자유, 민주, 공화, 권리, 경제, 혁명 등의 새로운 관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나, 그 관념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지 못하고, 봉건적 의식과 결합되어 실현되거나 유통되었다. 특히 민주, 공화의 개념은 혁명을 통해서조차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봉건적 군왕의식에 의해 침식되고, 그 분명한 의미에 대해서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념사에 대한 통계적이면서도 역사적 연구는 미래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기 전에 난맥상에 있는 우리의 관념 상황을 역사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될 것이다.
김관도의 데이터베이스에 의거한 통계적 방법은 중국 근현대에서의 외래 사조의 기본요소들인 키워드의 시기적 변천사를 조사하여, 각 시기의 이념형을 추출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고대 중국어로 번역된 키워드가 갖는 문화적 특성을 점검하여 그것에 대한 중국적 이해의 성격과 한계를 비평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이로써 해당 관념의 기원과 유행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으며, 전통 관념과의 차이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중국에서 기존의 유물론적 방법과는 다른 막스 베버적 태도에 접근하는 것으로서, 최근 서양에서 일어난 개념사 연구 방법에 자극받은 것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알려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언행을 규제하는 문법을 이해하면 손쉽게 그 '묻지마'식 자유주의의 장단점들을 이해할 수 있듯이, 김관도의 방법은 근현대 사상사를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어 근현대에서 각 시기마다의 키워드의 의미 유형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중국의 사상적 혼란상황을 비판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2. 시대와 관념
김관도는 자신들의 연구에서 기존의 시대 구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근현대에 대한 새로운 시대 구분을 수행한 성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830년부터 1930년까지 100년간의 '중국근현대사 전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1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100개의 주요 관념을 조사한 결과 중국 정치 관념의 형성의 삼 단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제1단계 : (19세기 서양기술 도입을 시도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시기) 전통 정치문화 관념을 이용하여 서양 현대 관념의 의미를 선택적으로 흡수한 시기. 여기서 선택적 흡수란 전통 관념과 중첩되지 않는 새로운 서양의 관념들은 배척되어 배제된다는 것이다. 제2단계 : (청일전쟁에서 5.4 신문화 운동 이전까지; 1895~1915) 전통 문화에 없었던 대량의 서양 현대 관념들을 그 원래의 의미에 접근하여 흡수하던 시기; 학습단계. 제3단계 : (1919년 이후 신문화운동시기) 모든 외래 관념을 소화, 종합, 재구성하여 현대의 관념형태로 만들어가던 시기. 이 시기는 중국식의 정형화된 주요 이데올로기를 형성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서양 현대 관념이 중국에 들어와 중국화 되었지만, 과거 유교적 봉건적인 관념과 결합하여 중국화 되었다. |
이러한 시대 구분은 기존의 시대구분인 양무운동 시기(器物(기물)의 측면에서), 변법운동 시기(제도의 측면에서), 신문화운동 시기(사상의 측면에서)라는 구분법과는 다른 것이다. 김관도의 구분은 외래 관념의 도입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와 그 문화적 효과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비주체적이고 호적(胡適)과 같은 전반 서구화론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서양의 관념을 가지고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면, 서양 관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필요한 것이며, 중국화 되었을 때의 폐해가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라면 관념사에 대한 철저한 점검은 필요할 것이다.
김관도의 단계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문화운동이라는 제3단계 이후의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과 혁명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는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본다는 점이다. 그는 제3단계를 단절이 아닌 일원론적 재구성의 단계로 본다. 재구성이란 새로운 서구의 가치에 입각한 계몽이라는 내용이 전통적 도덕 가치라는 형식에 의해 종합되어 대규모 융합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5.4 신문화운동이 전통에 반대하여 민주와 과학의 가치를 주장하고 곧 중국혁명으로 나아갔지만, 위진남북조 시기에 서쪽의 불교가 중국적 가치에 의해 대규모 융합이 이루어졌듯이, 20세기 대규모 융합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신문화운동은 동양과 서양을 이원화하는 사고인 중서이분(中西二分) 이원론에 반대하여 새로운 관념과 가치를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문화운동은 중국 전통문화의 일원론적 힘에 의해 통합 재구성되어 일원화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관도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오늘날의 현대 이데올로기를 지배한 신문화운동의 계몽성은 중국화되어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미완성의 이유는 전통적 도덕 가치를 형식으로 새로운 내용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중국은 이러한 재구성의 여파로 고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모두 베이징 대학의 학생이었다. 현실에서의 잔혹한 투쟁과 이상과의 괴리로 우리는 심각한 환멸과 고뇌에 빠졌다. 당시의 언어로 말하면, 중국 봉건 전제사회의 모든 병폐가 현실생활에서 드러났다."
20세기 이후 중국의 사상적 상황의 문제는 그 봉건적 형식에 있다. 이러한 판단은 전통적인 것을 봉건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저자가 주장하는 민주와 과학의 계몽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음미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가 가진 봉건성은 오늘날의 경제제일주의, 물질주의 향락문화와 양극화 문제(부의 74%를 0.2%의 인구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 인구 중 90%가 당원이다)와 함께 심각한 문제라는 점에서 저자의 판단은 일리가 있다. 또한 손문이나 모택동의 중국혁명의 실패원인들 가운데 하나로 혁명가들의 황제의식이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음미할 만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봉건주의는 조야한 자유주의와 함께 존속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은 사회개혁론자의 관념에도 각인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관도가 조사한 키워드들 가운데 '民主(민주)'의 관념을 의미의 변천에 따라 시기별로 조사한 것은 흥미롭다. 원래 전통 사회에서 민주는 '民之主(민지주)'라는 '백성의 주인'을 의미했다. 민주는 황제 즉 천자이다. 이러한 민주라는 말이 있었기에 민선 대통령인 링컨을 민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주도하여 국제법인 <만국공법>을 번역할 때, 공화(republic)와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민주로 번역했다. 그리고 민주는 민정(民政)으로도 번역되었다고 한다.
김관도는 이러한 번역 방식을 양면성을 가진 중국문화 특유의 서양 인식 기제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 번역 이후 19세기 이후의 중국은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민주와 함께 전통적 의미의 민주가 혼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습 군주제와 대비되어 정치를 공적인 사무(애국주의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과 함께)를 책임지는 것을 의미했던 '共和'라는 관념이 민주와 함께 들어온다. (1845 미스쿠리 쇼고(箕作省吾)가 네덜란드어 republiek를 공화로 번역했으며, 일본의 영향을 받은 황준헌(黃遵憲)이 최초로 사용) 이것은 서민이 아닌 신사(紳士)계급이 사회 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된 시기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계급의 관념에도 황제주의와 공화주의가 혼재했으며, 19세기에는 민주와 공화가 그 사용빈도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9세기말 1910년대 초에는 공화가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문의 공화 혁명이 실패하자 신문화운동이 전개되고 민주 관념이 전면에 부각된다. 손문의 공화정치의 실패는 군벌들의 할거에 실체적 원인이 있지만, 관념사적으로는 유교윤리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신문화운동 단계에서는 민이 주인이라는 의미의 '민주'가 득세를 하게 되며, 신문화운동의 정신을 대표하는 진독수(陳獨秀)가 전통윤리를 공격하면서 '최후의 각성은 윤리적 각성'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갖는 문제점을 잘 표현한 것이다.
김관도는 진독수가 유교와 군주제는 분리할 수 없는 본질적 연관이 있다고 한 것을 강조한다. 유교와 민주 공화는 양립할 수 없다. 이 두 관념을 양립시키고자 한 것이 중국의 개혁과 혁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다가 실패한 원인이다. 더욱이 민주는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비난하는 데 사용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분리되었고, 여기에 유교적 유습이 겹치면서 진정한 민주의 의미는 불투명해졌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민주 관념도 결국 민주독재로 되었다. 그리고 민주독재(인민민주주의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통적 유교 도덕 형식과 결부되어 혁명의 진정한 내용은 중국의 현대 문화에서 사라졌다. 혁명은 당국(黨國)으로 변질되어 과거의 왕조교체의 변종으로 되었다. 그리고 1978년 개혁 개방 정책이 시행되어 경제적 풍요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고, 청년들은 취업 문제로 방황하는 세대가 되었다.
김관도의 공동 연구자들은 묻는다. 모든 차별을 철폐하려는 혁명 정신과 고별한 현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이제 혁명에서 해답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5.4 신문화운동의 사상운동의 정신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회고적 사유는 새로운 혁명을 기약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문화운동이 윤리적 사상의 대전환을 모색했듯이 그들도 봉건 성인, 프롤레타리아 성인이 아닌 새로운 도덕을 추구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5.4 신문화운동과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민주적 인격을 창조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방향은 유물론적 혁명 정신도 아니고, 번지르르한 건물 속에서 경제적 풍요를 향유하는 자본주의적 정신도 아닌, 새로운 계몽정신을 지향한다.
중국의 지식인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관료 자본주의를 만끽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고한 당국의 지배 아래서도 동서가 만난 관념사의 우여곡절을 중요한 문제로 보는 그들은 새로운 보편적인 윤리적 자각을 인간성의 편에서 일으키고자 한다. 그들은 중국의 앞날과 인류의 미래가 같은 궤도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그들은 사회를 봉건적 형태의 정치 경제 권력으로부터 탈환하여 창조적인 공론의 장으로 형성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노예로부터의 자유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인간성이라면, 이 인간성은 억압적 현실과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고뇌할 것이다. 이러한 고뇌는 중국인이나 한국인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맥락에서 유사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관념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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