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은 "틈나면 어디서나 책을 읽었고 사색에 잠겼다"고 하지만, "감질나게도 도서명은 (자서전)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스승으로 여기고 따른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의 상징이 된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입버릇처럼, 자신의 체험을 훨씬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까. 하긴 홀로 모든 것을 해내는 '슈퍼맨'들도 더러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독고다이'로 고군분투하는, "쓰러뜨려 목을 밟고 있어도 항복하지 않을 사람"(고 정주영 회장의 인물평)은 어쩐지 매력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헬렌 켈러의 위인전을 읽고 설리번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야기할 때 왜 스승이나 독서 경험에 주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둑알처럼 홀로 있을 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른 바둑알의 위치에 따라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국제관계소에서 1982년부터 '역사와의 대화'라는 명사 초청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해리 크라이슬러도 대화에 초청한 이들에게 '관계'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부모님이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식사 시간엔 주로 정치 얘기를 했나요?", "책 중에서 두드러지게 영향을 준 책이 있나요?"…. 크라이슬러는 명사들이 원래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갖가지 요소의 기묘한 뒤섞임"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존재하게 됐다는 것을 발견한다.
▲ <진실에 눈을 뜨다 : 우리 시대 대표적 리더와 사상가 20인의 인생을 바꾼 정치적 각성의 순간들>(해리 크라이슬러 지음, 이재원 옮김, 이마고 펴냄). ⓒ이마고 |
가령 <미국 민중사>를 통해 미국인들이 공유하던 승자독식의 역사관에 일격을 가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각성은 부모님이 푼돈을 모아 사 준 찰스 디킨스의 전집에서 시작됐다. 그는 디킨스를 읽으며 "근대 산업 체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그 체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 체제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희생되는지, 정의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배반하는지"를 학습했다.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때 조선소에 취업한 그의 태생적인 배경이, 같은 계급의 모순을 다룬 디킨스의 책을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진은 "이미 얼마간 자리 잡고 있던 믿음을 디킨스가 정당화해 준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종종 얻게 되는 경험이죠. 그러니까 마음 깊숙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너 혼자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겁니다."
베트남 전쟁 관련 비밀문서인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스>에 넘김으로써, 관료로서의 경력을 말끔히 포기한 대니얼 엘스버그의 '독서 경험'은 더욱 흥미롭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것을 꿈꿔왔고 실제로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밑에서 일했던 그는 1969년 국방부 문서를 읽는 순간 대통령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욕망이 완전히 소진됐다고 말한다.
7000쪽에 달하는 일급비밀 문서를 읽으며 그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승전할 희망이 거의 없으며, 트루먼(33대)부터 닉슨(37대)까지 모든 대통령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들이 대중을 기만하고 확전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엘스버그는 "행정부 내부에서 대통령의 생각이 바뀔 희망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아가 그런 '생각'을 폭로라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징병을 거부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랜달 킬러라는 젊은이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킬러를 통해 엘스버그는 지적이고 헌신적인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감옥행'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신에게도 감옥행만큼의 각오를 촉구하게 된다.
때마침 그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책을 읽고 있었으며, 자신이 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덧붙인다. 그 간의 경력을 송두리째 버릴 결심을 앞두고, 엘스버그는 하워드 진이 디킨스로부터 받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너 혼자만은 아니다'라는 위로를 받은 것이다.
한편, 크라이슬러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담에 초청된 이들은 "세상을 예전과 달라지도록 만든 인물들"이다. 따라서 자신이 정치적 각성의 순간을 얘기하는 지점에서 청중들의 정치적 각성을 유발하고 있다.
책에 등장한 명사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현재까지 어떤 일들을 일으키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위키리크스>를 들 수 있다. 찰머스 존슨은 타계하기 3개월 전인 지난 8월 쓴 칼럼에서 "국방부 문서를 유출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분명 놀라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는 마침 <위키리크스>가 9만 2000건의 아프간 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터트린 때였고, 제보자로 지목된 건 '내부자'인 미국 육군의 일병 브래들리 매닝이었다.
존슨에 의하면 엘스버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는데 매닝 일병의 행동이 "거기에 대한 응답이 나오고 있는 셈"이었던 것이다. 병역거부자 랜달 킬러의 용기 있는 행동이 대니얼 엘스버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엘스버그는 매닝과 같은 폭로자들을 고무시키면서 영향력을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명사들이나 명사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 모두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알고 있는 바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흑인 정치가 론 덜럼스는 "일단 불의를 보게 되면 책임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다"는 말로 앎에 따른 책임을 강조했으며 전염병학의 권위자 에바 해리스는 "대학의 정문 앞에서 세계가 끝난다는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을 참을 수 없다"며 직설한다.
여전히 세상은 개인의 각성과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으며 모든 구호와 교육이 무용하단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의 통신원인 아미라 하스의 말만은 곱씹어 보자.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해 온 하스는 다른 명사들과 달리 자신이 무력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었고 공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덧붙인다.
"글쟁이 한 명이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려면 운동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사회운동, 거리로 뛰쳐나가 분명히 외치는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이 필요한 거죠. 그러면 대중매체의 목소리와 그 외부에 있는 거리의 목소리, 사회운동의 목소리가 서로 상호작용해 뭔가를 바꿀 수 있거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정치'란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정치적 각성'을 보여주고 이끈다는 <진실에 눈을 뜨다>의 대담은, 단순히 출연자들의 업적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명확하게 보도록 해주는 경험을 추적하고자 한다. 국민 건강보다는 농산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농업법,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몰락으로 이끄는 거대한 정치경제 시스템 등 페이지마다 미국이란 나라의 모순이 줄줄이 따라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임을 이해한다면, 'CEO' 이명박 대통령을 '역사와의 대화'에 모시기 어려운 이유가 명백해진다. "(경영 개념을 도입한 통치는) 국가를 위해 더 많이 벌고, 벌어들인 것을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신화는 없다>에서 그가 밝힌 CEO 대통령 개념에 대한 청사진이다.
많이 벌어다 주는 경영자가 고객으로 모셔준다는데, 촌스럽게 권력 관계니 정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그는 의도치 않게 많은 '고객'들을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했는데, 국가가 어떤 권력 관계 속에서 무엇을 벌어들이고, 나눠주는지 모르는 (혹은 나눠받지도 못한) 이들이 '제 돈 주고' 촛불을 사 든 것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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