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30일
11월 30일 오전 9시부터 1시간 반 동안이나 하지 중장과 呂運亨과의 요담이 있었다는 것은 昨報한 바와 같거니와 그 회담 내용이 매우 주목시되고 있던 차 이에 관하여 呂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발표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지 중장은 현하 조선 민중의 최대 관심사인 민족 통일 결성 문제에 관하여 비상한 열의와 성의를 보여 주었음은 우리로서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중장은 말하기를 임시정부 영수 일행이 환국한 이때 귀국의 민족 통일 문제는 결정적 단계로 들어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 우리로서는 최대의 성의를 가지고 임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에는 우리도 조선의 실정을 어느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였다 할 수 있으나 절대 공평한 입장에 입각하여 통일 결성을 이 기회에 완성시키고 싶다고 말하며 나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동 중장은 더욱 나아가서 어느 쪽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복안을 가지고 있다 하며 그 복안을 말하는데 우리로서 생각하건대 그와 같은 복안 같으면 민족통일의 앞길에는 서광이 비칠 것을 믿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도 그 복안에 대하여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복안이라는 것은 중장과의 언약도 있어 아직 발표할 수 없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2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월 4일 처음 만났을 때 하지는 여운형에게 군정장관 고문직을 권했고, 여운형은 일단 응낙했으나 한민당 인사들로 채워진 고문단의 들러리 역할임을 알고 사퇴한 바 있다. 하지는 애초 한민당 측의 악선전에 따라 여운형을 적대시하고 있다가 그 시점까지 인식을 바꾼 것이지만, 여운형의 역할을 그리 중시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이제 하지가 여운형을 불러 '복안'을 밝혔고, 그 복안이 여운형도 큰 기대감을 걸 만큼 그럴싸한 것이었다. 과연 무엇이 하지로 하여금 중대한 비밀 복안을 털어놓을 만큼 여운형을 중시하게 만들었고, 그 복안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10월 이후 미군정 당국자들의 움직임을 한 차례 점검해서 하지의 '복안'에 접근해 본다.
군정 한 달 만에 나온 아놀드 군정장관의 10월 10일 망언이 아무 방침도 없던 최초 단계 군정을 대표한 것으로 나는 본다. 한국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무런 과제에 대한 의식도 없이 들어와 힘만 믿고 날뛰던 단계다. 점령을 하나의 군사작전으로만 본 것이다.
10월 13~14일 맥아더-이승만-하지-애치슨의 '도쿄 회합'을 계기로 군정청이 '임시 한국 행정부' 설립이라는 과제를 뚜렷이 추구하게 되었다는 정병준의 관점에 나는 동의한다. (<우남 이승만 연구>, 440~453, 474~508쪽) 미국 국무부의 다변주의적 신탁 통치안에 대한 맥아더 사령부 중심의 저항에 남한 군정청이 참여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태평양 지역 종전 처리 방침 결정을 위한 미-영-소 외상 회담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합 3국의 한국에 대한 기본 방침은 신탁 통치였다. 10월 20일 미국 국무부 빈센트 극동국장이 이 방침을 재확인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응을 위해 맥아더와 입을 맞출 필요가 있었던지, 하지가 도쿄로 날아가 10월 25일 맥아더와 만났다. 돌아와서는 군정 당국자들이 연이어 빈센트 발언을 '개인 의견'으로 몰아붙이며 미군이 한국을 임의로 독립시켜 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10월 30일 아놀드 군정장관이 기자 회견에서 이런 주장을 했고, 이튿날 하지는 송진우를 불러 같은 주장을 한국인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군정 권한을 넘어서는 본국 정책의 부정이기 때문에 책임이 가벼운 군정장관이 표면에 나서고 사령관은 뒤에서 바람을 잡은 셈이다. 외상 회의 직전인 12월 10일 미 육군성이 아놀드를 군정장관에서 해임한 것은 여기에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월 5일 임정 요인들이 귀국을 위해 중경에서 상해로 나온 것은 이 시점에서 군정청이 귀국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맥아더 노선'에 따라 '임시 한국 행정부'를 만드는 데 임정을 활용할 것을 이승만이 주장한 결과일 것이다. 상해에서 18일간이나 체류한 것은 군정청의 임정 활용 의도를 감지한 임정 측이 유리한 조건을 위해 흥정을 벌이며 상황 파악에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추측된다.
11월 초 시점에서 외상 회담 일정은 결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12월 중 열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실제로 12월 16~27일에 열렸다.) 그 회담에서 한국 신탁 통치 결정을 피하기 위해 회담 전까지 '임시 한국 행정부'를 만드는 것이 맥아더 노선의 1차 과제였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정치 조직을 잘하고 있으니 신탁 통치는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정이 임정을 이용하고 싶었다면 왜 임정의 위상 인정에 인색했을까?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임시정부' 간판을 들고 들어오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미군 입장에서 엇갈리는 득실이 있었겠지만, 당시 상황을 아무리 살펴봐도 '개인 자격'을 그렇게 고집하기보다는 일개 정당보다는 격이 높은 단체로 인정하는 편이 미군의 당면 과제를 위해 유리한 면이 컸던 것 같다.
여기에서 '외교의 귀신' 이승만의 작용을 본다. 이승만은 임정 요인들의 '개인 자격'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고, 귀국 직전인 11월 19일 기자 회견에서는 "환영 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는 임정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주도권을 쥐기 바란 것이다. 임정은 독촉에 인적 자원만 공급하고 임정 자체로 기능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야 군정청의 통제력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를 설득했을 것이다.
11월 2일 각 정당 대표를 모아 독촉 결성을 결정하고 이승만이 조직을 위임받았으나 한 달이 되도록 전형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넓은 범위의 승인을 받을 만한 인적 구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임정 요인들이 큰 비중을 맡아줘야만 여론의 지지를 배경으로 웬만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텐데, 외상 회담은 다가오는 상황에서 임정 귀국의 지연으로 이승만은 애가 탔을 것이다.
23일 김구의 도착 직후에 이승만이 찾아가 제일 먼저 만났어도 깊은 얘기를 나눌 상황은 되지 못했을 것 같다. 25일 오후 김구가 돈암장으로 찾아가 "2시 20분부터 저녁이 되도록 단 두 분이 흉금을 풀어 놓고 당면 문제에 관하여 요담을 하였다는데"(<중앙신문> 1945년 11월 26일자) 요담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승만이 독촉 협력을 설득하려 애썼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정병준은 이 설득이 잘 되지 않았다고 본다. (<우남 이승만 연구>, 489~490쪽) 내 생각에도 텅 빈 비행장에서 시작해 온갖 잔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산전수전 다 겪은 김구가 알아채지 못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이승만은 임정 제2진의 도착 다음날인 12월 3일의 '비공식 국무회의'까지 참석해 설득에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임정의 환국이 너무 늦어져 외상 회담 전까지 진도를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하지가 나선 것이었다. 11월 30일 여운형으로 시작해 며칠 동안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와 연거푸 회견을 가졌다. 외상 회담 일정은 잡혔는데 이승만의 독촉은 전형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급해서 직접 나선 것이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순에 걸친 일련의 회견 내용을 비밀로 한 것은 신탁 통치라는 미국의 공식 정책과 어긋난 정책을 주둔군 사령관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운형을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가장 껄끄러운 상대여서였을 텐데, 여운형도 하지의 '복안'에 만족하고 비밀 유지에 동의한 것은 신탁 통치 정책을 뒤집어 독립을 앞당긴다는 목적을 반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맥아더 노선'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의 위상을 강화하는 목적이었다. 미군의 위상이 강화되면 소련군의 위상도 강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작용이고,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을 지향하는 노선이었다. 분단을 확고한 목표로 한 것은 아니라도, 분단의 위험을 늘리는 노선이었고, 분단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노선이었다.
1945년 12월 초순에 하지와 비밀 회견을 가진 인물 중 하지의 '복안'에 분단 위험을 늘릴 소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그런 위험을 알고도 그 복안을 지지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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