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南 羅州郡 榮山浦邑과 旺谷面 細牧面 소재지 4만5000두락과 벼 28만9000석과 讓渡地代 45만8500원을 東拓에서 반환해 달라는 소위 宮三面 사건이 요즈음 군정청에 호소되었는데 그 내용은 구한국 시대로 돌아가 서력 1887년 이곳에 심한 한재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로 면민은 유리걸식의 비운을 면치 못하는 참경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暴吏들은 세금을 성화같이 재촉하였으나 낼 길이 막연한 주민은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을 기화로 한 모리배들은 세금을 대납해 준다고 감언이설로 주민을 속이고 이 토지를 전부 탈취하고 말았다가 문제가 다대함을 보자 이것을 동척에다 내어 주고 만 것이다. 이래 60년간에 끊임없이 이곳 주민은 반환 운동을 하여 적지 않은 희생을 당하고 일본인들의 압박으로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으나 이에 굽히지 않고 宮3面 農民會에서는 羅在基와 盧文錫이 상경하여 군정당국에 이 사실을 폭로코 일반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바 금후 이 사건의 전개는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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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전7권, 창비 펴냄)의 배경인 '궁삼면 농민운동'은 식민지 농업 정책의 폭압성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의 하나다. 식민지 후기의 삼엄한 통치 체제 아래서도 농민의 조직적 저항이 끈질기게 계속된 것은 일본 식민 정책의 폭압성이 농업 부문에 가장 집약되었기 때문이었고,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원리 도입에 대한 넓은 공감대가 이뤄진 이유도 무엇보다 농업 분야의 부조리 상황에 있었다.
궁삼면 지역 토지 문제의 뿌리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직후인 1887년에 있었다. 소민(小民) 보호라는 유교 국가 기능이 파탄지경에 이른 때였고, 일본으로의 쌀 대량 수출이 시작되며 농지의 경제적 가치가 새로운 차원에서 부각되고 있을 때였다. 크고 작은 권력자들이 농지 집적에 광분하고, 이를 억제해야 할 왕권이 오히려 농지 쟁탈전에 앞장서고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조선의 농지 소유 구조는 이미 극심한 집중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확보한 일본은 구한말의 농지 소유 집중 구조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더욱 심화시켰다. 앞서(11월 11일) 동양척식에 관계해 언급한 것처럼 동양척식은 1920년대까지 전국 농지의 3분의 1을 끌어 모으며 집중 구조의 심화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농가 호수에서 자작농 비율은 1914년 35.2%, 1919년 39.3%에서 1929년 18.0%, 1945년 13.8%로 떨어졌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8쪽)
명목상의 소유관계보다 더 심각한 집중 현상이 소유권 개념의 변화에 있었다. '소작'이란 이름은 그대로라도 그 실질적 의미가 바뀌었다. 왕조시대의 지주-소작인 관계에는 공동체 내의 공생관계란 의미가 남아있었다. 절대화된 소유권 앞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되었고, 노동력 과잉의 농촌 현실 앞에서 소작인은 실제로 '농노'의 처지에 떨어졌다.
유교 국가건 무슨 국가건 국가의 기본 기능은 대다수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더라도 안정된 생활 조건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 박애나 인권에 입각해서에 앞서 국가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능이다. 말기의 조선 왕조가 인구의 대다수를 곤경에 빠트리는 농지 소유 집중 현상을 막지 못한 것은 국가 유지를 포기한 셈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 통치자들이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식민 정책의 기조가 식민지 사회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일방적 착취만을 행하는 '종속주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식민 정책의 동화주의, 자주주의와 종속주의의 차이에 관해서는 같은 책, 36~37쪽 참조.)
일본 식민 통치의 종속주의적 속성은 농업 정책 중에서도 쌀 생산과 관련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선 쌀의 일본 공급은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한일 간 경제 관계의 중심축으로 떠올라 있었다. 식민지 시대 말기까지 쌀은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가치에서 중심적 위치를 지켰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착취 정책은 쌀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쌀에 관련된 식민 정책을 주제로 한 많은 연구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지만, 쌀 생산 지역에서 농지 소유 집중 현상이 특히 심했던 것은 여러 착취 정책의 효과가 누적된 결과로 이해된다. 1929년의 전국 소작농 비율이 45.6%였음에 비해 1928년 삼남 지방의 소작 및 자소작농 비율은 84%에 달했으며, 전북의 평야 지대에서는 1~2%의 지주가 94~97%의 소작농과 자소작농을 지배했다고 한다. (같은 책, 48쪽)
동양척식의 주도 하에 도입된 '근대적' 농장 체제는 쌀 생산에 주로 적용되었다. 노동원가를 최소화하는 '합리적' 경영으로 쌀 반출을 최대화하는 체제였다. 1921년생으로 김제 동진농장에서 일한 최재순은 농장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광활에 생긴 게 '동진농업주식회사'라고 일제 때 아주 모범적인 농장이 있었어요. 모범적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국가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고, 입주한 농민들에게는 착취 기관이나 다름없었어요. 또 이 동진농장의 권리가 얼마나 센지 이웃한 농장에서 물길을 빼가기라도 하면 총을 쏴버려요. 당시 동진은 섬진제를 수원지로 해서 수백지로 물길을 끌어서 농사짓는 데 전용했어요.
농장 직원들은 모두 러일전쟁 후 제대한 사람들이었고 지배인으로 후쿠이라는 육군대좌가 왔는데, 농장을 만들기 위해서 보냈던 거죠. 그러니 모든 경영과 운영 방식이 군대식이었어요. 나중에는 농업 박사가 지배인으로 와서 운영했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제대 군인들이 사무실 관리자나 직원들이다 보니까 군대처럼 구획을 딱딱 나누었어요.
전체 아홉 개 부락으로 나누고, 그걸 아홉 '답구'(畓區)라고 했어요. 말하자면 1답구가 1부락이었던 거죠. 거기에 약 70명 정도가 살았어요. 그리고 논을 2정보씩 주고 농사를 짓게 했죠. 집도 많이 짓는 게 아니라 논에 가깝게 6가구씩만 딱 지어 살게 했어요. (<8·15의 기억>, 213~214쪽)
왕조 말기에 이미 국가 체제 유지가 어려운 수준에 와 있던 농민 억압 구조가 식민지 시대에 더욱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 '근대적' 무력 덕분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동진과 같은 '모범적' 농장에서는 최소한의 인력을 최소한의 임금으로 고용함으로써 최대한의 쌀을 반출했고, 그 능률성은 일반 지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소작요율이 8할에 육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쌀 생산의 원가 중 노동력의 비중이 2할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전통 시대에 5할을 넘던 노동력의 원가 비중이 이렇게 줄어든 데는 근대 기술의 활용으로 인한 비료 값, 수리(水利) 비용 등 다른 원가 요인의 증가도 약간의 몫을 했겠지만, 압도적인 몫은 노동력의 착취 강화에 있었다. 종래의 소작농은 미약하나마 농업 경영의 주체로서 역할을 지키고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농장 체제 하에서는 단순한 착취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이 농민보다 공장 노동자에게 대중적 기반을 둔 것은 근대적 착취 체제가 농촌보다 공장에서 먼저 발달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장보다 농촌에서 근대적 착취 체제가 더 널리 자리 잡았다. 그 때문에 식민지 후기를 통해 민중 저항이 농촌에서 더 활발했던 것이고, 해방 시점에서도 토지 소유 제도의 개혁이 무엇보다 절실한 변혁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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