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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사랑, 사회에 대한 '느긋한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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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사랑, 사회에 대한 '느긋한 교양'

[프레시안 books] 요네하라 마리의 <교양노트>

'교양'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 교양은, 이것이라 딱 꼬집어 말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거나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다. 때문에 문자든 언어든 '교양'을 접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겁다거나 젠체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다.

그러니 <교양노트>(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마음산책 펴냄)를 척 보는 순간 만만치 않은 책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거 출판사에선 '인문서'로 분류하지만, 그리고 교양을 표방했지만 주눅들 것 없다. 에세이집이다. 물론 에세이라 해서 모두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쉽고 재미있다.

이유가 여럿이다. 우선 지은이가 만만하다. 2006년 난소암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는 체코에서 교육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어 동시 통역사를 했는데 문화 간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해 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석학도 아닌 외국 저자로선 드물게 에세이집이 이미 10권이나 나왔다. 글이 지닌 매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 <교양노트>는 번역서 제목이다. 원제는 <한낮의 별하늘>이다. 지은이가 소녀 시절 읽은 러시아 시인 올가 베르골츠의 '낮별'에서 착안한 것이다. 한낮의 태양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늘 떠있는 별처럼, 현실에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의미다. 원저 제목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출판사에서 번역서 제목을 '고상하게' 바꾼 것이다. (첫 편에 원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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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양 노트>(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무엇보다 <요미우리신문>에 3년 가까이 연재했던 글 중에 80편을 가려 묶은 것이다. 평범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이란 뜻이다. 신문 칼럼이란 학술적 깊이를 자랑하는 글이 아니다. 시사 이슈에 대해 목청을 높이는 수준이다. 게다가 요네하라의 글은 일요일 판에 실렸다. 주말 판 신문들은 화제와 재미를 좇게 마련이다.

그러니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해 고담준론을 펼칠 일이 없다. '고령화와 저출산'처럼 사회 문제를 언급한 글도 있지만 대부분 일상을 소재로 스케치하듯 쓴 글이다. 그것이 저자 특유의 명랑한 사고와 경쾌한 문체에 힘입어 읽으면 스노보드를 타고 설원을 미끄러지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러시아와 관련된 화제가 많지만 문화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들춰내는 눈길이 예리한 덕분이다.

요네하라는 디즈니랜드가 무섭다고 봤다. (물론 도쿄 디즈니랜드를 본 소감이다.) 유령의 집, 모조 코끼리와 악어 등이 배회하는 열대 정글, 해적이 날뛰는 카리브 해 등 매혹적인 볼거리, 즐길 거리가 즐비하지만 그는 거기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를 본 탓이다. 놀이 시설에 들어가면 최소한의 능동적 힘으로 싸움도, 모험도 즐길 수 있어 방문객은 눈과 귀만 필요한 방관자가 된다.

요네하라는 이 풍경을 '모든 것을 돈벌이 도구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결국 인간의 능동적 힘을 상품화한 것'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신상품 개발은 인간의 능동적 힘을 끝없이 깎아내리는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세태를 꼬집는 대목에선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불상사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가도, 성적이 부진한 야구 감독도, 스캔들의 중심에 선 탤런트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란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고 호감이 가는 인물로 인정받는 현실을 못마땅해 한다. 지은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열심히 하다가 다치면 곤란하고, 비리를 저지른 의원이 그 분야에서 더 열심히 매진해서야 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열심히 하느냐다. 이상한 일을 열심히 하면 주변에 폐가 될 뿐"이라 일깨운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지.

물론 요네하라의 글은 인문적 깊이로 빛이 난다.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삼각관계'를 파고든 글이 그렇다. 이것을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모두 '트라이앵글'이라고 쓰는데, 이는 19세기 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 '헤다 가블러' 2막 1장에 처음 쓰였단다. 남부 유럽과 중남미 각국의 낮잠 풍습을 뜻하는 '시에스타'란 말이, 고대 로마 사람들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시간을 사등분해서 정오부터 오후 3시쯤까지를 시에스타(제6)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요네하라 특유의 유머 감각이 책 읽는 재미를 돋운다. "이상적 인간이란, 영국인처럼 요리를 잘하고, 프랑스인처럼 외국인을 존경하고, 독일인처럼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이탈리아인처럼 성실하고, 미국인처럼 외국어가 능숙하고, 러시아인처럼 술을 자제하고, 일본인처럼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란 러시아 재담을 어디서 만날까.(이건 모두 뒤집어 읽어야 한다.)

그루지야의 한 선술집 게시판에서 봤다는 '음주가 종교보다 바람직한 8가지 이유'는 어떤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사람은 아직 없다, 마시는 술의 상표를 바꿨다는 이유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 등인데 백미는 마지막 두 가지. "술을 많이 팔기 위해 속임수를 쓰면 법에 따라 확실히 처벌 받는다" "술을 실제로 마시고 있다는 것은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에는 자못 날카로움마저 느껴진다.

좋은 에세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그 기준이 각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정보, 고개를 주억거릴 통찰력, 곱씹어 보고 싶은 글맛이란 세 박자를 갖춰야 한다고 본다. 요네하라의 글은 이 중 두 가지를 갖췄다. 동시 통역사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이를 특유의 호기심으로 요리해낸 덕분에 이야기가 풍성하다.

"만인이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동시에 만물이 돈의 위력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 어떤 권위나 신비도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면서 그 베일이 벗겨진다"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수천만 명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달성하려 했던 (인종 획일화) 대사업을, 스탈린이 적대시했던 시장 원리의 메커니즘이 훨씬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강제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게, 심지어 훨씬 대규모로, 요컨대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완수했다"같은 대목에선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단 글맛은 특별히 뛰어나진 않다. 번역서임을 감안하더라도 글 자체는 아름답다거나 글맛이 빼어나다고 하기는 힘들다. 형용사와 부사, 추상명사로 범벅이 된 감상적 에세이를 즐기는 독자라면 혹 실망할 수도 있겠다. 대신 견실한 문체가 알찬 정보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간간이 웃으면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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