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도처에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거르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고깃국은 1년에 딱 두 번 설날과 한가위 때 구경할 수 있었다. 옷이 없어 누더기를 기워 입어야 했고 연필은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이 닳을 때까지 쓰다가 볼펜 깍지를 연필에 끼워 사용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1960년대, 1970년대 남한은 2010년의 북한이었다.
이런 풍요는 누가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박정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풍요의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70년대 섬유 산업과 전자 산업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부를 바탕으로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선진 공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말이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부'이지 그 과정은 가혹한 착취와 지옥같은 억압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극심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군대식 노무 관리에 시달렸던 사실상의 임금 노예였다. 하루 열서너 시간씩 일해야 했고, 심지어는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으며 2, 3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다.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땅에 뿌리박은 농민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가차없이 때려 부수고 공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모래알 같은 임금 노동자들을 강제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서구에서는 지주들의 울타리 치기 운동(인클로저 운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해서 양떼에 쫓겨 농토에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농토에서 '해방'되어 공장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물론 이것은 임금 노예의 길이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고, 갈 데라고는 오로지 공장밖에 없는, 착취당할 자유밖에 없는 임금 노예들이 있어야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 있다. '착취-피착취' 관계가 기본 구조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공동체' '회사 공동체' '공장 공동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혹 그런 말을 쓰는 자본가나 정치가가 있다면 그 말은 사기꾼의 달콤한 교언영색이자 말장난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고, 1962년부터 1975년까지 그야말로 대탈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려 750만 명에 이르는 농촌 인구가 대도시로 이주했다. 역사상 이처럼 짧은 시기에 이처럼 엄청난 인구가 이동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계집애'였기에 학교에도 가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이 '공순이'가 되었던 것이다.
▲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김영주·김이정·이재웅·장남수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
그냥 단순히 조합원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여성 노동자로 살았다는 것이 어떤 삶이었는지 그 기가 막힌 삶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황선금, 차언년, 이영자, 박순애, 양승화, 김오순, 양태숙 등 7명의 각기 다른 삶의 굽이굽이를 장남수, 김이정, 김영주, 이재웅이 구술 받아 정리한 글들로 엮어져 있다.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더 다양하고 깊고 풍부한 것이 실제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이다. 구술 생애사는 한 개인의 역사이자 동시에 시대를 증언하는 생생한 시대사이기도 하다. 이 책의 첫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어떤 사람은 필자처럼 콧날이 시큰해지고 애써 눈물을 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지독한 가난과 계집애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울함,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공부도 하지 못하고 공장의 공순이로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의 고단한 행적은 우리 시대의 오디세이에 다름 아니다. 이 기록은 1970년대, 19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삶을 대변하는 일종의 사기 열전에 해당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구술 생애사 본래의 취지에 맞게 인터뷰 내용을 날 것 그대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책을 펴냈으면 훨씬 더 생생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장남수의 글과 앞에 있는 몇 사람의 생애사 정리를 제외하고 뒤로 갈수록 글의 생생함이 떨어지는 것은 이 책의 기획 의도인 구술 생애사를 다르게 해석하고 집필한 결과이지 않나 싶다.
이 책과 동시에 출판된 <원풍모방 노동운동사>(김남일 정리,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와 함께 19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재조명은 특히나 지금처럼 노동운동이 더할 수 없이 침체와 고립에 빠져 그 어떤 돌파구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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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풍모방 노동운동사>(김남일 정리,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
노동조합이 새로운 공동체로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부조 사회로 바꾸는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고 또 평등과 사회 정의가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되지 못한다면, 사회 구조를 배우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학교가 되지 못한다면,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결국 노예의 노동조합과 노예 노동자일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배부른 노동 노예들, 배부른 가축들, 배부른 기계일 뿐이다.
1970년대 민주 노동운동을 관통하던 가장 주요한 노동운동 이념은 그 근본 바탕이 공동체 이념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산업 선교와 가톨릭청년회의 소모임은 그 자체가 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체였다. 이 책에서 숱하게 나오는 증언처럼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받고 인정을 하는 기초 공동체였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시민사회 운동도 어느새 이런 공동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역사가 우리의 삶을 좀 더 성찰하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민주 노조운동의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한국 노동조합이 노동운동 조직으로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19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실천했던 공동체 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모임으로서 노동조합이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협동조합을 비롯해 공제조합 등등 다양한 노동자 조직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로버트 오웬이 "자본은 노동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펼쳤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많은 시사를 남겨준다.
19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은 한 사람의 노동 노예를 자유인으로 변혁시켰던, 공순이를 자랑스러운 노동자로 해방시켰던 인간 해방의 운동이었다. 억압과 착취의 인간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평등의 인간관계로 바꾸는 사회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해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애와 협동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던 공동체 운동이었다.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이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원풍 이후의 삶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가 원풍을 비롯한 1970년대 노동 공동체를 깨부수고 또다시 노예의 삶을 강요했을 때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자유인의 삶을 살아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해체한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살아왔던 삶은 그런 삶이었고, 공동체 운동의 오래된 미래를 실천한 삶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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