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귀순 직후에는 오리고기 등을 하루에 두 번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식사 횟수를 줄이고 매일 아침 2시간씩 거르지 않고 반신욕을 했다."
반신욕이 유행할 때, 필자는 대학의 한방 병원에 근무했었다. 한방 병원에는 뇌졸중(중풍), 구안와사 질환으로 찾는 환자가 많은데, 그 해에는 유독 구완와사 환자가 몰렸다. 환자와 상담해 보니, 상당수가 반신욕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구완화사 환자의 상당수는 반신욕의 부작용 탓이었다.
반신욕으로 하반신을 따뜻하게 하면, 하반신으로 돌았던 혈액이 데워져서 상반신으로 향한다. 열기에 혈관이 팽창하는 혈액의 순환도 원활하다. 이렇게 올라온 다량의 혈액은 심장을 거쳐서 다시 온몸을 순환하는데, 이 혈액의 열기가 뇌신경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한의학에서는 기가 넘친다고 하며, 바로 이렇게 생기는 질환을 '풍'으로 정의한다.
구안와사를 '와사풍'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상태가 심해지면 중풍, 그러니까 뇌졸중의 우려도 생긴다. 앞에서 소개한 기사의 뒷부분은 이런 추정에 더욱더 힘을 실어준다.
"특히 10월 1일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전보다 더 화색이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지난 10일 별세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뉴시스 |
사람은 보통 직립의 자세로 서 있다. 중력을 염두에 두면 당연히 피가 아래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렇게 아래로 흐른 피를 위로 퍼 올리는 데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반신욕을 하면 일시적으로 혈관이 팽창해 하반신의 데워진 피가 상반신으로 원활하게 흐른다.
온몸의 혈액 순환이 개선되면 심장을 거친 깨끗한 피가 몸 전체로 흐르게 되니 머리가 맑아지고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많은 (데워진) 혈액이 올라오는 것은 오히려 심장과 뇌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몸이 변화에 바로바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은 노인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심장에만 집중해 봐도 이런 위험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장은 펌프처럼 외부로 혈액을 밀어내야 한다. 혈액이 심장에 집중되면 팽팽한 풍선처럼 늘어나며 수축하기 힘들어져 펌프질 자체가 힘들면서 엄청난 부하가 걸린다. 이렇게 심장에 부하가 걸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고인은 평소에도 늘 긴장 상태였다. 고인이 반신욕에 의지한 것도 이런 긴장 상태를 이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긴장 상태에서는 보통 몸 전체의 혈관이 수축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반신의 혈관만 팽창해서 피가 위로 평소보다 빨리 흐르면 심장과 상반신의 혈관에는 더 큰 부담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고인의 주치의였다면 반신욕이 아니라 걷기를 강조했을 것 같다. 긴장 상태에서 발생한 스트레스와 그것에서 비롯된 각종 지병을 개선하려면 우선 하반신의 힘을 기르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걷기를 통해서 하반신의 근육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럽게 하반신의 혈관도 튼튼해진다.
이렇게 되면 굳이 반신욕과 같은 일시적인 대증요법이 아니라도 하반신뿐만 아니라 몸 전체의 혈액 순환이 개선되는 효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하반신 근육이 줄어들면서, 혈관도 줄어들고, 혈액 순환이 상반신에만 집중돼 심장병, 뇌일혈이 생기는 것을 걷기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것이다.
최근에 천천히 걷기 열풍이 부는 것도 이런 건강의 본질을 파악한 집단지성의 지혜다. 이것은 상부의 이상은 하부에서 고치고, 하부의 이상은 상부에서 찾는다는 한의학적 지혜와도 일맥상통하다. 고인이 이런 지혜까지 두루 살피지 못하고 반신욕 같은 대증요법에 의존했던 일이 안타깝다.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다음번에는 걷기 외에 하체를 강화하는 한의학의 처방을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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