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25일
[紐育20日發SF同盟] 미국무성극동국장 빈센트는 20日 미국외교정책협의회 회합에서 미국의 극동 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一. 중국 及 소련과의 협력 정책은 극동 안정을 위해 불가결한 요건임. 蘇·中 양국과의 협력 관련를 강화하여 극동에 있어서 미국 정책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一. 베트남 정세에 관해서는 미국 정부는 당지에 있는 프랑스 주권을 문제로 삼지 않을 의향이다. 蘭印 정세에 대한 미국 입장에 대하여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주권국이 관리하기 위하여 강제 조치를 취하는 데 대해서는 미국은 원조도 하지 않을 터이며 참가도 하지 않을 작정인데 베트남 及 蘭印에 있어서 평화적인 협정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필요가 있다면 원조할 작정이다.
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미 9月 22日 화이트하우스 성명에서 개요가 명백히 되었다. 즉 일본을 완전히 무장 해제하면 군사력을 박탈하고 개인의 자유 근본적 인권 존중에 대한 일본 군민의 희망을 조장 촉진시키는데 있다.
一. 조선에 대하여서는 동 국의 신탁 관리제를 수립함에 앞서서 우선 소련과의 사이에 의사를 소통시킨 후 허다한 정치 문제를 해결시키고 싶다. 조선은 다년간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지금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우선 신탁 관리제를 실시하여 그간 조선 민중의 독립한 통치를 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할 것을 제창한다.
미국은 조선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독립한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만들 작정이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민주주의적 정부를 가진 강대 且 협조적인 통일 국가가 실현하도록 조장하는데 있다. 미국은 美·中 양국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과의 협력을 계속할 생각이다. 중국은 극동에 있어서 소련과 미국 사이에 간섭 지대 내지 교량적 역할을 하여 왔다. 금후도 미국은 중국이 교량적 역할에 노력하여 주기를 환영한다.
一. 소련과의 협력 관계는 우호적인 미·소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을 기초로 한다. 소련도 미국이 극동에 대하여 중대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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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복 이후 미 국무성의 동아시아 정책 방향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가장 기조가 되는 것은 연합국과의 협력 자세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중국 및 소련과의 협조 관계를 "극동 안정을 위해 불가결한 요건"으로 규정했다. 특히 끝에서 소련과의 협력 관계를 강조했다.
한국에 대해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신탁 관리제를 실시하고자 하며 그 이유는 한국이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해방 공간에서 한국의 정치 지형을 결정할 신탁 통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정책 결정자가 아니라 국장급에서 나온 얘기지만 지역 정책의 최고급 실무자에게서 공식적으로 나온 것이라면 거의 결정된 정책으로 봐도 될 것이었다.
해방되는 추축국의 구 식민지에 신탁 통치를 시행한다는 방침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전쟁 중 연합국의 기본 합의 사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독일 항복 후 반 년이 된 이 시점에서 이 합의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식민지 보유국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해방 방침을 꺼려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미·소 간 협력 관계의 변질이었다.
미국에서 루스벨트의 국제주의가 국무성에서는 지켜지고 있었으나 군부에서는 반공·반소 경향이 자라나고 있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빈센트 국장의 발표는 이런 역풍에 대항해 국무성의 기본 노선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빈센트 국장이 밝힌 신탁 통치 방침에서 한국인의 반감을 직접 불러일으킨 대목은 한국이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랜 식민 통치에서 막 벗어난 한국인은 하루빨리 민족자결을 행하기 바랐고, 스스로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치 능력을 그 동안 발휘하지 못한 것은 일본의 억압 때문일 뿐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과연 그랬을까?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시절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 되어 있었다, 재단하는 것은 그 시절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단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람의 일이란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당시 한국의 자치 준비가 완전했다고도 볼 수 없고, 또한 전혀 없었다고도 볼 수 없다는 인식을 상식 차원에서 제기하고 싶다.
좋은 상황이 주어지면 훌륭한 자치를 행할 수 있었고, 상황이 나쁘면 그러기 힘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부터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성패가 달린 일이기도 했다. 이것은 오늘의 상황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한국인은 통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통일을 가로막는 몇몇 요인만 제거되면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고, 통일에 대한 민중의 염원은 확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통일의 방해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상황을 빚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이 아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주기만 하면 통일이 될 것처럼 주장하는 오만은 통일을 위한 진정성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식민 통치의 폐단은 그 통치가 지속되는 기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제·사회·문화·교육 모든 면에서 독립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것이 식민 통치의 속성이고, 그 효과는 통치자의 철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 시점의 대다수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어떤 노력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도 식민 통치가 남긴 구조적 문제의 일부였다.
당시 한국인의 전형적 반응을 안재홍의 담화에서 볼 수 있다.
미 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는 지난 20日 미국 외교정책협의회 회합에서 미국의 극동 정책에 대하여 중대한 발언을 하였는데 특히 조선 문제에 언급하여 조선에 대하여서는 우선 신탁 관리제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이 外電에 대하여 國民黨委員長 安在鴻의 의견을 들어 만천하의 여론을 환기코자 한다.
"지난 22日 저녁에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놀라운 문제라 할 것이다. 이 말은 지난 미국에서 일본과 불란서의 식민지를 신탁 관리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대한 방침을 세운 바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뉴욕통신으로 전하여 왔으니 그 소식은 전연 허보라고도 할 수 없다. 미국군이 조선에 들어온 후에 이 땅에는 각 정당이 분열하여 통일되지 않는 이유로 여러 가지 시사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며 미 본국에서도 서울에는 55개 정당이 있어 누구를 상대로 이야기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있어 식자로서는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1898年 맥킨리 미 대통령 당시 美西戰爭을 하여 가면서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하였으며 아기날드 장군을 중심으로 필리핀 독립군과 제휴하여 西班牙를 격파한 다음 근 40년 동안 필리핀을 영유한 일도 있었다. 이런 문제와는 매우 다른 것을 확신코자 한다. 또는 한 편에 신문통신 뿐인 고로 미리부터 暄騷하거나 비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들은 당연이 그에 대하여 적당한 대응책을 강구 실행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는 내부에서 강조되고 있는 민족전선의 합동 통일을 시급히 완수해서 우리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 실력을 보여야 한다. 둘째는 완전히 합동 통일된 전 민족의 총역량을 모아서 엄중하고도 정중한 항의를 하여야 할 것이다.
美, 中, 蘇, 英 4개국은 오늘날 해방 도정에 있어서 분명히 우리 민족의 은인들이다. 그러나 은인인 까닭에 그 비우의적 처치나 중대한 정치적 과오에 대하여 무조건으로 聽從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신탁 관리 문제가 제국주의적 야심을 떠난 주관적 호의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으로 보아 중대한 착오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정치적 현상이 비록 혼란하다 할지라도 적당한 절차를 밟아서 우리들의 자주력이 도리어 신속 정상한 해결의 길이 될 것이다. 선의의 간섭도 도리어 자주적 성장을 저해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4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얄타 회담 때 한국의 신탁 통치 기간에 대해 루스벨트가 20년 이상을 생각한다고 했고, 스탈린은 가급적 짧을수록 좋겠다는 의견을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루스벨트가 정말로 그렇게 긴 기간을 생각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필리핀 문제를 생각하니까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정당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십 년 걸려서라도 필리핀이 독립의 길을 걷도록 도와준, 신탁 통치의 모범 사례로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얘기를 할 때도 수십 년의 신탁 통치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수십 년 동안 필리핀인의 독립을 정성껏 도와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는 식민지로 활용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미국이 얘기하는 '신탁 통치'를 누가 좋아할 수 있었겠는가? 연말에 모스크바 3상회담의 신탁 통치 결정이 한국인의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일으킨 데는 필리핀 통치에 관한 미국의 거짓된 홍보가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재홍의 담화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진정한 독립을 위해 당분간의 신탁 통치를 받아들을 용의가 있는 성실한 사람이라도, 필리핀인이 당한 것과 같은 신탁 통치를 받을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35년의 일본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슷한 기간의 신탁 통치를 또 겪어야 한다고? 앓느니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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