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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서평꾼'이? "<돈키호테>는 축약본으로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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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서평꾼'이? "<돈키호테>는 축약본으로 읽어!"

[프레시안 books]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

기실, 그때부터 궁금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말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집안사람이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았단다. 네 명이 한 조를 이룬 대학 대표 팀끼리 장학금을 걸고 시합을 하는 퀴즈 쇼였다. 그들도 네 명을 한 조로 짰다. 비록 텔레비전에 나간 것은 아니지만, 공정하게 시합했다.

조 이름도 붙였다. 성을 따 붙인 '패디먼 대학'. 역할이 분명했단다. 아버지는 역사와 문학에, 어머니는 정치와 스포츠에, 오빠는 과학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정작 그녀는? 반사 신경이 제일 빨랐다. 자고로 퀴즈에서는 버저를 빨리 눌러야 하는 법이다. 사회자가 문제를 다 말하기도 전에 가족들은 신이 나서 정답을 외쳐대기 일쑤였다. 6년 동안 단 두 대학에 졌다니 혀를 내두를 일이다.

이 교양으로 똘똘 뭉친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즐비하다.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자. 어머니가 혼잡스런 길을 요란스럽게 뚫고 나가며 운전하자 아버지가 조용히 시 구절을 읊었다. "공격과 퇴각 나팔소리가 뒤섞여 휩쓸고 다니는 / 황혼 깃든 전장 같은 이곳에 우리는 와 있으니." 그러고는 덧붙였다. "이 시의 출전(出典)은?" 그러자 남매가 동시에 외쳤다. "매튜 아널드의 '도버 해변'!" 앤 패디먼이 쓴 <서재 결혼 시키기>에 나온 이야기다.

<평생 독서 계획>(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앤 패디먼의 아버지다. 이미 말했잖은가.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고. 그러니 식탐이 왕성한 책벌레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배겨낼 도리가 없다. 이력을 보니, 자기 가족을 일러 대학이라 칭할 만하다고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 <평생 독서 계획>(클리프턴 패디먼·존 메이저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 ⓒ연암서가
출판사 편집장을 거쳐 <뉴요커> 도서 편집자로 일했고, 50년 동안 '이달의 책' 클럽 수석 심사위원을 지냈다.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은 작가, 비평가, 사회자, 독서가"라는 소개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그토록 교양 있고 재치 있고 발랄한 딸이 태어났으리라. 순간, '나는 과연 딸에게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아 부끄럽고 부끄럽도다!

책 제목을 보면, 평생에 걸쳐 읽을 책을 나이별로나 상황별로 소개해주고 있을 거라 기대하기 십상이다. 학교에서 다 짜서 내주었던 수업 시간표처럼 말이다. 이런 기대는 얼른 접어야 한다. 그런 유의 책은 아니다(실제 그런 책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가 평생 읽어야 할 책을 소개하고 있는, 날카롭고 흥미로우며 적절한 서평 모음이다.

그렇다면, 다루고 있는 책은 무엇인지 답이 절로 나온다. 교양인으로서 평생 읽어야 하고, 평생 다시 읽어야 하며, 평생 읽어보라고 할 만한 책은 고전 밖에 없다. 세월의 담금질을 이겨내고 여전히 빛바래지 않는 정신의 순도를 자랑하는 것이 고전이니까 말이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자기 계발의 도구라기보다 자기 발견의 도구"라는 패디먼의 수사는 그래서, 적절하다.

고전을 소개하는 책인 만큼 이 책의 가치는 제시된 목록과 그 책에 대한 서평의 질에 따라 평가될 법하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책은 1997년에 나온 수정4판을 저본으로 삼았는데, 동양 고전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위해 패디먼은 동양의 언어와 역사를 전공하고 이 달의 책 수석편집자로 활동하는 존 메이저를 영입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평가하면서, 지극히 서구적인 시각에서 도서 목록을 선정했다는 시비를 걸 생각은 일단 접어야 한다. 동서양에 걸쳐 두루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느라 애를 쓴 흔적은 분명히 상찬할 만하다(그렇다고 완벽하다니, 만족스럽다니 하는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그런 말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누가 하든지 먹을 욕을 굳이 이 책을 대상으로 할 필요는 없어서 일뿐이다).

남은 잣대는 서평의 수준이다. 서둘러 말하자면 솔직하고, 핵심을 짚고 있고, 비판적이며, 친절하다. 그리고 양도 적절해 200자 원고지 11~12매 정도의 분량이다. 짧은 분량에 이 정도 실속을 채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평을 읽으며 저자의 내공에 감탄한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서평을 몇 편만 보아도 이런 평가에 누구나 동의할 텐데, 먼저 루소가 쓴 <고백록> 편을 보자.

워즈우서와 밀턴 등 이 책에 소개된 위대한 작가들 중 루소는 가장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작가다. 그의 성격은 합리적인 독자를 불쾌하게 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으로 균형 감각이 없는데다 부도덕한 사람이다. 구역질 날 정도로 감상적이고 야비하며 툭하면 싸움을 걸고 게다가 거짓말쟁이이다. 피해망상증에서 방광염에 이르기까지 각종 질병의 소유자다. 자칭 유아 권리의 옹호자라는 사람이 그의 사생아 다섯 명을 고아원에 맡겼다고 태연하게 고백한다.

이것이 루소라는 사람의 부분적 프로필이다. 절반쯤 정신 이상의 상태에서 사망한 이런 한심한 사람이, 당대의 강력한 지식인이었고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생겨난 낭만주의 운동의 창시자였고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우리를 짜증나게 한다. 더욱 납득이 안 되는 일은, 이 방랑자-시종-음악 선생이, 이처럼 설득력 있는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박되었으나 그의 문장은 여전히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루소라는 사람은 이처럼 수수께끼이다."


이 대목을 보면 패디먼의 장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다루는 책이나 저자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잘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상하고 미담 위주의 소개로 책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서평자가 저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독자들이 그 책이나 저자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고전을 안내하는 책들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과 다른 대목도 있다. 해설이나 축약본에 대한 패디먼의 생각이 남다르다. 단테의 신곡 편에서는 "당신이 구입한 번역본의 해설을 면밀히 읽으면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큰 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테의 시와 생애와 시대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해설만 읽는 것이 문제이지, 어렵고 힘든 작품은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이 이해를 돕는 경우가 많다. 약도가 있어야 목적지에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는 법이다. <돈키호테>는 금기시되어온 축약본을 권하는 데다, 완역본은 건너뛰며 읽을 대목이 있다고 귀띔해준다. 그야말로 파격이다.

"돈키호테는 평생 독서 계획 리스트 중에서 축약본(하지만 무단 삭제본이나 아동용 버전은 피해야 한다)으로 읽어도 좋은 책이다. 월터 스타키가 아주 훌륭한 축약본을 내놓았다. 만약 완역본을 읽는 경우라면, 어떤 부분은 건너뛰면서 읽어도 좋다. 염소치기나 양치기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은 곧이어 쓸데없는 소리가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르반테스 당시의 청중들을 즐겁게 했으나 우리를 따분하게 만드는 전원적 이야기들은 건너뛰어도 된다. 소설 중간에 끼어 있는 시들은 모두 건너뛰어라. 세르반테스는 세계에서 가장 신통치 못한 시인들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에 나온 번역본을 읽어라."

패디먼은 진지하고 실력 있는 공교육 교사 스타일은 아니다. 실력은 비슷하지만 학생들을 사로잡는 재간이 뛰어난 학원 선생 타입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고전 서평의 가치야 누구나 인정하지만, 간혹 틀에 벗어난 서평도 의미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패디먼의 서평에 후한 점수를 준다.

동양 고전을 다룬 존 메이저도 출중한 서평가다. 어느 편은 패디먼보다 낫다. 패디먼이 저널리스트 수준에서 학술적 깊이를 지향하고 있다면, 메이저는 학자 수준에서 저널리즘적 대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서양의 시선이라 우리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표현 방식이나 새로운 해석은 읽는 이의 무릎을 치게 한다. 오리엔탈리즘 운운하며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블로그에 서평을 쓰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파워 블로그'라고 해 대접받는 이들도 있다. 읽고 느낀 바대로 쓰는 거야 장점이 되지만, 서평이 어떠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표본이 있으면 따라하며 배우기 쉽고, 그것을 넘어서고자하는 열망을 품게 한다. <평생 독서 계획>이 바로 그런 책이다. 물론, 서평가로 나대는 나부터 참고하고 배워야 할 책이지만 말이다.

뱀꼬리

번역자와 출판사를 칭찬할 일이 있다. 부록으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33권의 서지 사항을 밝히고 국역본을 소개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해준 것에 고마워하면서도, 몇 권은 다른 번역본을 읽는 것이 나을 듯싶어 밝혀둔다.

1. <길가메시 서사시>는 김산해의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휴머니스트 펴냄)가 좋다. 이 책이 부담스럽다면, 같은 이가 옮긴 <청소년을 위한 길가메쉬 서서사>(휴머니스트 펴냄)를 권한다.

2. <논어>는 배병삼의 <한글 세대가 본 논어>(문학동네 펴냄>와 신정근의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사계절 펴냄)가 좋다. 청소년용으로 나온 배병삼의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사계절 펴냄)는 성인이 보아도 좋은 빼어난 책이다.

3. <삼국지>는 김구용의 <삼국지>(솔 펴냄)와 고우영의 <고우영 삼국지>(애니북스 펴냄)도 마땅히 함께 추천되어야 한다.

4. <서유기>야말로 소설 속에 나오는 시를 빼고 읽는 것이 좋은 데다 축약본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솔과 문학과지성사에서 완역본을 내고 역시 축약본을 냈다. '문지푸른문학'으로 나온 서유기는 전 3권인데, 5권으로 오식되었다.

5. 루소의 <고백록>은 김붕구의 <고백>(박영률출판사 펴냄)이 낫다.

6. 밀의 <자유론>은 서병훈의 번역본(책세상 펴냄)이 아주 잘 읽힌다.

7. 콘래드의 <노스트로모>는 한길사에서 나영균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자.

8. 보르헤스는 전집이 황병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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