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동쪽 지방을 여행하는데 길에서 두 아이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까닭을 물어보니, 해가 동쪽에 솟아오를 때와 중천에 떠 있을 때, 그 중 어느 때 땅에서 더 가까운가 하는 것이었다. 동쪽에 솟아오를 때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해가 처음 떠오를 때는 수레바퀴만하고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접시만합니다. 이것은 먼 것은 작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반면에 다른 아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가 처음 떠오를 때는 서늘하고 중천에 떠 있을 때는 끓는 물에 손을 넣는 것처럼 뜨겁습니다. 이것은 가까운 것은 뜨겁고 먼 것은 서늘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공자는 두 아이의 말을 듣고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두 아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누가 당신더러 지혜(智)가 많다고 했습니까?"
이것은 <열자(列子)>에 실려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도가 계열에 속하는 작자가 공자를 조롱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그냥 덮어버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상대적으로 자연을 경시하고 인문 세계 중심으로 지식을 구축해 온 유가에 대해 도가가 취한 비판적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관점과 관심의 비중에서 유가와 도가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면 자연에 대한 지식 자체에서는 어떠한가? 공자에 대한 저 조롱이 자연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정당한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주로 직접적인 감각 경험과 간단한 추론으로 이루어지던 시대, 이때 감각의 추론 결과들이 서로 충돌하면 지식은 확정되지 못한다. 위의 일화는 바로 시각 경험과 촉각 경험의 추론 결과가 상충한 예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는 곤혹스러움은 <열자>의 작자 역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공자의 경우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면 작자가 스스로 추구하고 공자에게도 기대했던 저 지혜란 과연 어떤 것이었나? 또는, 어떤 것이어야 했는가?
유럽의 비학(秘學) 전통 : 마법, 마술, 연금술
▲ <마법사의 책>(그리오 드 지브리 지음, 임산·김희정 옮김, 루비박스 펴냄). ⓒ루비박스 |
이 책이 흥미를 주었던 것은 우선, 역사 자료인 도상들과 그 비의를 추구해 가는 저자의 도상학(iconography)적 방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필사본과 인큐내뷸라(incunabula, 16세기의 고판본)를 포함하는 방대한 도상 자료는 그 자체만으로도 박물학적 관심을 자극하기에 족하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이 책의 주제가 가지는 사상사적이고 문화사적인 함축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자나 노자의 후예들이 자연을 마주하면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곤혹감, 그러면서도 차이가 있는 심리적 정향, 그 미묘한 울림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쉬 가라앉지 않는다. 역사상에 명멸한 수많은 비학자들을 통해 <열자>의 작자가 말한 지혜의 유럽식 버전을 목격한 듯하다.
유럽의 비학을 이끌어간 심리적 정향을 요약하자면 단연 호기심과 공포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감각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을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곤혹감을 강력한 호기심으로 돌파해 갔다. 그들의 호기심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를 관통한 특정한 문화적 풍토 속에서 성장하여, 그 한계 밖으로 일탈할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 안에서든 밖에서든, 호기심은 공포를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중세 초기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15세기부터 17세기 말엽까지 극성을 떨친 마녀사냥은 그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비학의 문화적 풍토로 거론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의 헤르메스 전통(hermeticism)이다. 헤르메스는 올림포스 산의 12신 가운데 하나로서 신들의 전령이자 저승의 안내자이고, 여행과 교역, 과학과 예술 등에 관계하는 신이다. 그것은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지혜와 정의의 신 토트(Thoth)와 이미지가 결합되면서, 규범적인 세계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의 은밀한 지적 활동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또 하나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구약 전통이다. 신과 천사 그리고 악령으로 구성되는 구약의 천상계 구상은 중세 이래 유럽인들에게 상상력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했다. 루시퍼를 비롯한 악령들의 초능력은 현실의 한계 너머를 향한 호기심을 쉽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구약 전통이 비학 내부에서도 반드시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산출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여러 외경을 통해 소개된 솔로몬은 지혜, 부귀와 영화, 자연과학과 신학·철학을 아우르는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이것은 헤르메스와 결합되어 박물학 전통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리고 구약과는 별도로, 19세기경에 유대교의 카발라(Cabbala)가 유럽 사회에 소개됨으로써 비학은 다시 한 번 발전의 동력을 얻었다. '전승되어 온 지식'이라는 의미의 카발라는 유대교 내부에서 은밀하게 발전해 온 신비 철학이었다.
책의 저자는 비학의 유형에 따라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자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성실하게 풀어내는 데 주력하였다. 신비로운 것을 신비로운 채 드러낼 뿐, 굳이 그 진위와 시비를 가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비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거나, 판타지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도 한다. 그런 중에 여기저기서 그것들의 두 문화사적 연원, 즉 헤르메스 전통과 구약 전통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더 없는 미덕이다.
비학 : 종교와 세속의 사이
그러면 비학 속의 헤르메스 전통과 구약 전통이 유럽의 사상·문화사 속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사가는 흔히 비학이 근대 과학의 모태였음을 강조한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비학의 여러 분야가 비합리적인 요소와 합리적인 요소로 분화하고, 후자가 근대 과학으로 발전했다는 관점을 취한다. 점성술로부터 천문학이 분화되어 나오고, 연금술에서 화학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 서자면 헤르메스와 구약 전통은 곧 근대 과학의 사상·문화사적 연원이 되는 셈이다.
이 관점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 두 전통으로부터 근대 과학으로 이어 긋는 두 가닥의 실선은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단순하지 않은가?
뉴턴은 잘 알려진 대로, 근대 과학을 확립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연금술사이기도 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그가 남긴 저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연금술 분야였다. 그는 현미경이 발달하여 원자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했지만, 연금술사답게 자연의 진정한 작품은 미립자 속에 끝내 감추어져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비물질적이고 살아 있으며 지적이고 어디에나 있는 존재' 즉 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때 분명한 사실은 뉴턴이 연금술사에서 근대 과학자로 변모한 것도 아니고, 그의 역학이 연금술에서 직접 연원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근대 역학을 확립한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연금술사였다. 또는 근대 과학의 확립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신비주의자였다.
헤르메스와 구약(그중에서도 특별히 솔로몬) 전통이 갖는 사상·문화사적인 의미는 그것이 중세 이후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신약 중심의 기독교와 대립·갈등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대립·갈등의 상대인 기독교가 없었다면 헤르메스와 구약 전통 어느 것도 근대 과학은 물론 비학마저 성립시킬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유럽의 비학은 종교와 세속 사이의 긴장 위에 존재했고, 그랬기 때문에 근대 과학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
요컨대, 비학과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 역시 전적으로 유럽 문화의 산물이고, 유럽적 성격을 갖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럽적 근대 과학을 상상하는 일은 애초부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술수의 새로운 가능성
물론 이 말이 비유럽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는 없다. 유럽의 근대, 유럽식 과학을 맥락 없이 전유하려는 시도가 문제일 뿐, 어떤 문화든 그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도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아시아에도 유럽의 비학에 상응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보통 술수(術數)라는 용어로 통칭된 그것은 점성술과 택일법, 풍수지리와 관상학, 명리학과 각종의 점술을 포괄하고, 연단술과 방중술 같은 방술과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술수는 비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부면을 줄곧 유지하였고, 때때로 자연 지식의 시대적 한계를 넘나들며 경전 지식과 규범적 세계로부터 일탈하고 그것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비학에 비할 때 술수에 종교적 긴장감이 희박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와 세속 사이에 존재했다기보다 전적으로 세속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편이었다. 그 강력한 세속성 때문에 폄하되기는 해도 비학처럼 극심한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또 분야를 막론하고 음양오행론과 두루 결합됨으로써 호기심과 충동의 발현보다는 이론적 정형화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이러한 점들은 술수가 가지는 비학과의 차이점이자, 술수에서 근대 과학의 연원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그렇다고 술수의 새로운 가능성을 무효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근대 이후를 생각하는 이제 와서까지 비학적인 종교성과 유럽식의 과학에만 목을 매는 태도가 우스운 꼴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방법의 창안을 위해 술수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고부동한 규범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사유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허위의 경계를 자유롭게 삼투하고, 직선과 원색의 미학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일, <열자>의 작자가 추구했던 지혜란 바로 그 능력과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덧붙임
마지막으로, <열자>의 두 아이가 골똘했던 문제를 근대 천문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짚어 보자. 지구의 자전만을 고려하자면, 태양은 중천에 떠 있을 때가 동쪽에 떠오를 때보다 지구의 반지름만큼 땅에서 가깝다. 그러나 자전과 공전을 함께 고려하자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때는 태양과 지구의 크기와 위치, 공전 궤도의 크기에 대한 고려를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태양을 지름 10㎝의 구라 한다면, 그 주위의 평균 반지름 10m가 넘는 타원형 궤도 위를 깨알만한 지구가 돌고 있는 꼴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지구의 반지름 차이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복잡한 계산을 생략하고 정답을 말하자면, 매년 2월부터 5월 사이에는 해가 뜰 때 더 가깝고, 나머지 시기에는 중천에 있을 때 더 가깝다.
그러나 <열자>의 작자는 땅이 구형이 아니라 평평하며, 자기가 땅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중천에 떠있을 때가 동쪽에 떠오를 때보다, 자기로부터 땅 끝까지의 거리 이상으로 더 가까운 것이 자명하다. <열자>의 작자는 이런 추론을 할 수 없었을까?
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충돌하는 감각 경험을 빌미 삼아 명확해 보이는 지식을 흔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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