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객관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사실이 일단 우리의 의식에 자리 잡은 다음에는 그 근거를 흔드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 2006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에서 체세포 핵 이식이라는 원천 기술과 황 박사의 능력을 믿었던 많은 사람은 그 실험이 조작된 것임이,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난자를 채취 당했음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와 그의 기술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미지가 상품인 연예인에게 그것을 손상시킬 수 있는 주장이 유통된다는 건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건전한 회의주의에 바탕을 둔 검증이 생명인 과학에서 실험 결과를 조작한다는 건 과학자 사회 전체에 대한 모독이며 파문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학력이든 과학적 검증이든 일단 믿기로 작정한 사실을 폐기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유리한 것들만 취사선택해 주요 증거로 삼아 축적하고 광범위하게 유통시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문제는 사실 여부보다 담론의 유통 구조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학 관계 또는 문화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 구성주의가 유행하기도 한다. 1998년 물리학자인 오세정 교수와 과학사회학자인 김환석 교수가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벌인 지상 논쟁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2001년에는 이 논쟁에 자극받은 과학계의 원로 송상용 교수가 1박2일간의 토론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 진영이 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할 기회를 가졌던 것 말고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통의 논점을 중심으로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논쟁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늘어놓는 병렬식 발표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과학 담론은 과학적 사실의 가치중립과 자연이라는 최종 심판자의 권위를 믿는 현장 과학자, 그리고 과학을 대상화하고 사회문화적 가치로 평가하는 과학사회학자의 입장으로 양분되고 그 논쟁은 과학 '전쟁'이라 불린다.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이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동안 둘 사이를 연결시킬 통섭이란 화두가 떠올라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이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사물에 널리 통함' 또는 '서로 내왕함'(通涉)이 아닌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統攝)이다. 도정일 교수의 지적처럼 그의 통섭은 생물학을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삼는 생물학 제국주의 또는 모든 사회 현상을 생물학적 원리를 적용해 설명하는 생물학적 환원론의 혐의가 짙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가 유행시킨 통섭이 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할 진정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발음이 같은 두 단어를 교묘히 섞어 유통에서는 소통의 뜻을 활용하고 내용에서는 다스림의 담론을 확산시킨 것이다.
200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200주년을 맞아 벌어진 사회생물학 논쟁에서도 이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생물학이 사회 현상을 설명할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그 한계는 없는지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의 직관적 인식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 느낌이다. 역설적이게도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고 가능한 공약수를 찾는 통섭(統攝)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학자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서로 내왕하는 통섭(通涉)에 그쳤기 때문이다.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
여기서 장대익 교수의 지적에 변명을 늘어놓거나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의 비판에는 수용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충분히 논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만 이 책이 진화 이론에 대한 전문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그의 지적처럼 진화와 관련된 논쟁은 흔히 이념 논쟁으로 번지곤 하는데 그는 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은연중에 특정 이념을 고취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대익 교수의 지적처럼 사회생물학은 인간 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모든 것이 적응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사회생물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역시 인간이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의 뇌리에 강력한 이념적 상흔을 남겨 극단적 찬성과 반대의 주장을 일삼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이 바로 <통섭>과 <이기적 유전자>의 성공 뒤에 감춰진 숨은 그림이다. 여기서는 과학적 정확성보다는 담론의 유통 과정이 더 큰 문제고 그 책임은 '한국에서 진화론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사회생물학의 반대자들과 달리 최재천 교수, 장대익 교수와 같은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편향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대자들을 이념적으로 비판하는 데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은 가치중립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의사이고 면역학자이며 철학자인 알프레드 토버의 말처럼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다. 실제로 과학은 우리의 일상을 크게 좌우하며 부지불식간에 특정 가치를 주입한다. 사실 속에 특정 가치가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경쟁을 부추기는 논리가 숨어있다. 일단 공론화에 성공하면 반대자들의 비판 속에서도 그 논리는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된다. 대중의 인지 구조 중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정치인이 이슈를 선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최근 광고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도 소비자의 뇌 속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구조다. 타블로의 학력이나 황 박사의 원천 기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도 그렇게 활성화된 인지 구조 때문일 수 있다.
이처럼 최근 새로운 통섭(痛涉)의 장(場)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지과학은 사회생물학이 숨겨둔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주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화두가 생존과 생식이라면 인지과학의 화두는 소통과 공감(empathy) 그리고 창발(emergence)이다. 물론 여기도 환원적이고 물리적인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보다 포괄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위계적 구조의 통섭(統攝)이 아닌 수평적 구조의 신경계와 유사한 통섭(通涉)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진화에 비추어보지 않는다면 생물학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도브잔스키의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생물학의 대상이 공감과 소통의 능력을 진화시켜 왔고 그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속성을 창발해온 인간이라면, 그래서 사실과 가치의 새로운 관계를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라면, 사회생물학이 아닌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선 숨은 그림 찾기에 능한 인지과학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이 글은 지난 8월 27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5호에 실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자유전공학부)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에 대한 논평이다. (☞관련 기사 : 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앞서 지난 9월 3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6호에는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의 반론이 실렸다. (☞관련 기사 :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