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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선생이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해방일기] 1945년 10월 12일

1945년 10월 12일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벽보를 본 사람들 중에는 박헌영(1900~1955?)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아는 사람들 중에도 왜 그 사람이 꼭 나타나서 지도해 줘야 하는지 납득 못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몇 해 전 여기저기 "선영아, 사랑해!" 현수막을 내걸어 화젯거리를 만든 것과 같은 일종의 티저 광고로 볼 수 있겠다.

이 에피소드에서 박헌영이 도덕적 권위보다 현실적 효과를 중시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인생의 여러 굴곡을 더 알게 되면서, 불법 투쟁이 생활화된 인물다운 현실주의자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유물론에 대한 믿음도 윤리와 도덕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뒷받침할 수 있었을 것 같다.

1925년 말 조선공산당 사건(신의주 사건)으로 두 번째 수감되었던 그가 2년 후 병보석을 받은 진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정말로 사상범을 풀어줘야 할 만큼 심한 정신병에 걸렸던 것인지, 일제 당국을 감쪽같이 속여먹은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어떤 경우라도 보통 사람이 못 가진 놀라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분명한 결과는 그의 상급자 여러 사람이 옥사했는데 그는 살아남아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서열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1933년 7월 그가 세 번째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된 후 부인 주세죽이 동료 김단야와 바로 재혼한 사실, 그가 1939년 석방된 후 여러 여자와 동거한 사실을 보더라도 원칙보다 현실을 중시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가 여러 차례의 오랜 '심문 투쟁'에서 아무런 비밀도 누설하지 않고 어느 동료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전설'도 대쪽 같은 절개보다는 탁월한 선전술을 떠올리게 한다.

1955년 말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 재판받을 때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고 한다.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미국 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 그대들 말대로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 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 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위키피디아> "박헌영" 조)


그는 미국 군정의 수배 상태로 오래 있다가 월북했다. 그런 그가 미국 측과 거래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27년 11월의 석방에도 일제 당국과의 거래가 제일 그럴싸하게 생각된다.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이 너무나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심한 정신병에 걸렸다면 최단시간에 소련으로 탈출해서 국제레닌대학에 다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지 여럿이 옥사하는 상황에서 일제 당국을 속여 병보석을 받았다고 믿을 수도 없다.

그는 "절에 가서도 새우젓 얻어먹을" 재간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을 오랜 불법 투쟁을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그가 1939년 석방 후 국내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의 권위를 누린 것, 해방 후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을 이끌게 된 것도 이 투쟁 능력의 성과로 이해된다.

그가 최대한 활용한 자신의 강점이 무엇이었는가? 1929~1931년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에 참여하고 이를 발판으로 조선공산당 조직 준비위원회, 즉 소위 '국제선'을 이끈 것이 이후 국내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주었다. 코민테른은 1943년 5월 해체되었지만, 그 정규 라인에서 일한 경력은 소련공산당과의 가장 가까운 사이를 확인해주는 신분증이었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작성한 '8월 테제'에는 이 신분증을 갱신하는 의미가 있었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에서 '8월 테제'와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8월 테제는 앞 장에서 상세히 분석한 바 있는, 한국에 대한 국제당의 노선인 12월 테제를 해방 후의 실정 또는 변화를 감안하여 약간 바꾸었으나, 골격은 거의 그대로이고, 사실 많은 부분이 12월 테제의 번안으로 판단될 정도이다. 박헌영은 12월 테제가 발표되었을 때 러시아에 있었으며,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12월 테제에 따라서 김단야와 함께 상해에서 공산당 재건 작업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으므로 12월 테제의 영향을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받았을 것이다. (236쪽)

12월 테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노선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코민테른의 노선이 요동치고 있을 때 나온 것이어서 장기적 안목에서 타당성을 인정하기 힘든 극좌 노선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그 후 조선공산당이 해방 때까지 재건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 변화에 관계없이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게 된 것이었다.

박현영이 조선위원회에서 활동할 때는 12월 테제가 나온 직후여서 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위원회 활동 경력을 권위의 근거로 삼은 박헌영은 12월 테제를 금과옥조로 받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연장선 위에서 8월 테제를 작성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10월 8일) 박헌영을 '교조주의자'라 한 것이다.

계급 투쟁을 절대시하고 중도 세력을 배척하는 12월 테제의 극좌 노선이 박헌영을 매개로 해방 후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관한 공부가 얕은 나로서는 8월 테제의 내용에 대한 서중석의 설명을(위 책 235~248쪽) 봐도 깊이 이해되지가 않는다. 실제 상황을 계속 살펴보면서 더 공부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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