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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따라하지 말자!

[프레시안 books] 레이먼드 피스먼·에드워드 미구엘의 <이코노믹 갱스터>

한국은 '빠'와 '까'가 넘치는 나라다. 어떤 화제가 떠오르면, '~빠'라고 불리는 극성 지지자와 '~까'라고 불리는 극성 반대자가 한순간에 갈린다. 애매한 입장은 설 자리가 없다.

온라인 곳곳에서 벌어지는 '빠'와 '까'의 다툼을 지켜보다, 문득 '숫자 빠'와 '숫자 까'라는 표현을 고안해 봤다. 어떤 이들은 숫자의 힘을 너무 믿는다. 수리적 모델, 통계로 뒷받침할 수 없는 메시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숫자 빠'다.

다른 어떤 이들은 반대다. 구체적 현실을 추상화하는 숫자의 힘을 지나치게 무시한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좁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마디로 '숫자 까'다. '빠'와 '까'가 갈리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숫자의 힘'에 대해서도 균형 감각이 필요할 게다. 통계 등 계량적 방법을 맹신해도 안 되지만, 무시해서도 안 된다.

"법은 필요한 때만 지킨다"

▲ <이코노믹 갱스터>(레이먼드 피스먼·에드워드 미구엘 지음, 이순희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 ⓒ비즈니스맵
<이코노믹 갱스터>(레이먼드 피스먼·에드워드 미구엘 지음, 이순희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는 '숫자의 힘'을 굳게 믿는, 동시에 선한 의지를 지닌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가 잘 드러난 책이다. 미국 유명 대학교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에 몸담은 저자들의 관심사는 '아프리카의 케냐처럼 국민 대부분이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나라를, 한국처럼 국민 대부분이 빈곤에서 해방된 삶을 누리는 나라로 바꿔내는 일'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과거 식민 본국이었던 일본이나 유럽 국가들의 생활 수준을 거의 따라잡은 상태"라는 저자들의 칭찬이 오히려 거북하기만 하다. 마치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한국 교육에 대한 찬사가 영 뜬금없게 들리듯 말이다.

오바마의 찬사와 실제 한국 학교에서의 경험 사이, 저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노라면 딱 그만큼의 거리가 느껴진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풀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이코노믹 갱스터(Economic Gangster)'란, 원래 부동산 개발 사업에 진출한 일본 야쿠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치인에게 뇌물을 뿌리고 공무원과 결탁한 야쿠자들은 일본 부동산 시장 거품을 만들어 낸 조연쯤 된다. 법은 필요할 때만 지키면 된다고 믿는 그들은, '경제의 깡패'인 동시에, 효율적으로 돈을 버는 깡패이기도 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영어 단어 '이코노믹(economic)'은 '경제의'라는 뜻뿐 아니라 '이익을 잘 내는'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고 하니, '이코노믹 갱스터'라는 표현이 야쿠자에게는 딱 들어맞는다.

외교관부터 밀수꾼까지…"통계와 경제학으로 그들을 잡는다"

이 책의 저자들이 다루는 이코노믹 갱스터는 이런 야쿠자의 다양한 변종이다. 면책 특권에 기대 주차 위반을 일삼는 외교관부터 관세 부담을 피하려는 밀수꾼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코노믹 갱스터'가 가난한 나라를 계속 가난하게끔 하는 원흉이라는 저자들의 진단을 부정할 사람은 흔치 않다. 어느 사회에서나 '부패'는 약자의 적인 동시에 성장의 걸림돌이다. 다만 좀 공허하게 여겨지는 대목은 이런 진단에 이어지는 처방이다.

예컨대 정부의 관세 수입을 떨어뜨려 재정을 망치는 이코노믹 갱스터인 '밀수꾼'에 대해서는 어떤 처방이 가능할까.

저자들은 자신만만하다. '숫자의 힘'을 잘 활용하면 된다는 게다. 'A' 나라에서 'B' 나라로 상품을 밀수입하려는 업자가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수출에 관세를 물리지 않는 'A' 나라 세관은 합법적으로 통과하고 수입에 관세를 물리지 않는 'B' 나라 세관은 피하려는 게 밀수꾼의 생리다. 그렇다면, 'A' 나라 수출 통계와 'B' 나라 수입 통계를 잘 비교하면 전체 밀수 규모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중국을 예로 든다. 교역국 사이에서 수출입 통계가 서로 맞지 않는 나라라는 것.

닭고기가 칠면조 고기로 둔갑하는 이유

다른 처방도 있다. 밀수꾼은 이코노믹 갱스터이므로 법을 어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법을 어겼을 때 생기는 비용과 이익을 고려해서 이익이 더 많다고 여겨지면 법을 어긴다.

예컨대 닭고기에는 30% 관세율이 적용되고 칠면조 고기에는 10% 관세율이 적용된다면, 밀수꾼은 닭고기를 칠면조 고기라고 속여서 수입할 게다. 저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중국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역 통계에 잡힌 닭고기 수입량이 실제 시중에서 유통되는 수입 닭고기의 양보다 적다는 것.

이 경우, 닭고기 관세율과 칠면조 고기 관세율을 똑같게 하는 게 저자들의 처방이다. 그럼, 닭고기와 칠면조 고기 사이의 관세 차익에 해당하는 이익이 사라지므로 밀수꾼들은 '합리적 계산'에 따라 다른 일거리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 관료들은 '바보'라서 이런 간단한 해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저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특정 산업을 보호하거나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적 판단, 관련 업계의 로비 등 관세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하다는 게다. 예컨대 중국이라면, 닭을 키우는 농가가 칠면조를 키우는 농가보다 많을 것이므로 닭을 키우는 농가의 입김이 닭고기 관세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닭고기 관세율이 칠면조 고기 관세율보다 높아지는데, 이는 결국 닭고기를 칠면조 고기로 속여서 들여오는 경우만 늘릴 뿐이다. 닭을 키우는 농가를 보호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들의 주장은 대략 이런 맥락으로 전개된다.

또 하나의 이코노미 갱스터, 다국적 기업

그런데 이런 논리는 영 허전하다. 예컨대 수출 국가의 통계와 수입 국가의 통계를 서로 비교하는 것처럼 간단한 해법이 현실에서는 왜 잘 통하지 않을까. 밀수를 부추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품에 따라 다른 관세율을 적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걸 꼭 관련 업계의 로비 때문이라고만 봐야 할까. 이런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문다.

여기서 잠시 한국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과거 식민 본국을 거의 따라잡은 모범 사례로 소개한, 그 한국말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기 전인 1990년, 한국 관세청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규정에 따라 수출 업체가 수출 신고서에 운임과 보험료를 정확하게 적도록 하는 예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최근까지도 무시돼 왔다. 수출 통계 자체가 정확하게 작성될 수 없다. '숫자의 힘'에 기댄 저자들의 해법이 무색해질 밖에.

설령 통계가 정확하다고 해도, 세계 각국이 무역 통계를 공유하면서 서로 비교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법은 필요한 때만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따라야 할 법의 종류가 다양한 경우라면 특히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법인을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 이야기다. 가장 세율이 낮은 나라로 이익을 몰아주는 게 이들에게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자면, 해당 국가 법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범위 내에서 회계 자료를 손질해야 한다. 국경이 무의미한 이들이 정부 재정 따위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다. 사실,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이코노믹 갱스터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각국 정부 역시 이런 다국적 기업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무역 통계를 비교하면, 다국적 기업이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법인 사이의 거래에서 어떻게 이익률을 조절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는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나온 처방은 아무래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적 처방과 현실 사이

닭고기와 칠면조 고기의 관세율을 똑같이 맞추자는 제안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밀수꾼들은 옛 방식을 버릴 게다. 그러나 이 점만을 노리고, 관세율을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정부가 높은 관세율로 닭을 키우는 농가를 보호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식량 안보부터 일자리 챙기기까지 다양한 정치·사회적 고려가 녹아있기 마련이다.

밀수꾼의 이익 동기를 고려한 저자들의 경제학적 처방은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현실에선 역시 공허하다. 세관 관리의 기강을 세우는, 뻔한 처방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이제 글을 마칠 때가 됐다. 이윤 동기와 숫자로 세상을 설명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면, 이 책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가 계속 가난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또 다른 '이코노믹 갱스터'인 다국적 기업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이 '더 나은 삶'을 향한 주변부 국가 국민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예는 흔하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칠레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배경에 다국적 기업과 미국 정보기관의 공모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숫자의 힘', 강력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한국의 성공'에 대해 무비판적인 찬사를 하는 대목 역시 이 책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짧은 기간에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성취한 우리 현대사를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다른 신흥 독립국보다 상대적으로 덜했을 수는 있지만, 한국 역시 이코노믹 갱스터들이 판치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고도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쇼윈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한몫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케냐의 실패와 한국의 성공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좀 허술해 보인다.

이 책을 덮으며, 미국 드라마 <넘버스>를 떠올렸다. '숫자의 힘'을 잘 활용해 눈앞의 현실에 가려진 진실을 캐내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주류 경제학이 기대는 '숫자의 힘'의 힘은 분명 위대하지만, 그걸로 모든 세상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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