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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꾼'들 38선을 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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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꾼'들 38선을 반기다?

[해방일기] 1945년 9월 29일

1945년 9월 29일

일전 6개 정당이 합체가 된 國民黨에서는 이번 그 당의 중앙집행위원 103명을 선정하는 동시에 결의문과 북위 38도 경계선에 의한 분단 점령과 그에 인한 교통 장벽의 철폐 요구를 결의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즉 지난 9月 27日 오후 2時에 長橋町 26번지 동당 본부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그 부서와 결의 사항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으며 오는 10月 2日 오전 10時에는 다시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당면한 제 문제를 토의하리라고 한다.

특히 북위 38도 문제에 관하여 방금 소련 측 군사위원단이 입경하여 미군 주둔군과 군사 연락 사무를 취하고 있는 이때 동당으로서 이 문제 해결의 결의를 태평양방면연합군최고지휘관인 맥아더 대장에게 제출하게 된 것은 극히 주목되고 있다.

◊ 결의문

一. 해외에서 許久 한동안 민족 해방 운동에 분투하여 온 모든 혁명 전사들과 지도적인 집결체에 대하여는 일률로 심심한 경의와 우정을 표함.
一. 重慶의 大韓臨時政府는 기미운동 이래 민족 운동에 대한 일관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과 그 대표적인 국제적 지위를 돌아보아 그를 기준으로 통일 민족 국가 건설에 대업을 완성하는 건국 정부를 하루 바삐 출현시키는 것이 단계에 있어서의 역사적 요청임을 嚴確히 인식하고 인하여 그에게 최대한 지지를 이바지하고 따라서 그에 환국 奠都함에 필요한 제 정세를 극력 촉진키에 노력함.
一. 美·中·蘇·英 4국 연합군의 침략 제국주의 타도에 관한 절대한 노력과 조선 민족 해방을 조성하는 거대한 우의에는 전민족의 이름으로 심심한 감사와 최대한 경의를 표함.
一. 연합4국은 舊韓帝國 이래 조선과의 관계가 외지 열국보담 최대한 역사적 인과 있는 특수한 사정임을 돌아보아 금후 조선 민족 통일 국가 건설 완성과 및 그 성장 발전에 가장 공명한 우호적 원조 있을 것을 待望함.

북위 38도 경계선에 의한 분단 점령과 그에 의한 교통 장벽의 철폐 요구 결의문

북위 38도를 경계선으로 한 미소양군의 분단 점령 문제는 그 유래 蘇軍의 일본 관동군 무장 해제에 관련된 것이라고는 하나 초계급적 통합 민족 국가로서의 통일 국가 합성이 지급 요청되어 있는 조선 현하의 역사적 도정에 처하여 비상한 정치적 지장을 조성하고 있는 사정임에 돌보아 연합 4개국으로부터 긴급한 統一軍政을 실현하여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일로매진케 함을 요망함.

右를 연합군최고지휘관인 맥아더 대장에게 제출하여 適宜한 전달을 요청함.

1945年 9月 29日

國民黨

(<매일신보>, 1945년 9월 30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월 1일 안재홍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조선국민당을 중심으로 9월 24일 확대된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국민당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정당이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아무 실적도 없이 이합집산만 거듭한 것 같지만,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정치의 경험이 없던 조선 사회에서 정당의 결성부터 시행착오 없이 모범답안을 내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의 소규모 모임이 먼저 만들어졌다가 더 큰 규모로 합쳐져 가는 과정이 바로 개인 간의 신의에서 공개적 정강 정책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송남헌은 당시의 정치 양상을 '사랑방 정치'로 회고했다.

해방 후는 사랑방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대여서 서울 시내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원서동 송진우의 사랑방이나, 안국동 윤보선의 사랑방, 그리고 원남동 백관수의 사랑방과 청진동 이인의 사랑방 등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는 주로 우익진영의 인사들이 모여 이승만 박사나 중경 임시정부의 귀국 문제라든지, 38선 문제, 그리고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 문제 등에 관해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펴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당시에는 재력이 있는 유지나 명망가가 숙식을 제공하고 정객들이 그의 집 사랑방에서 정치 문제를 논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조선조 시대 양반 정치의 풍습이 어느 정도 되살아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공개적으로 모여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해방 직후 이들이 모일 마땅한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66~68쪽)


해방 전의 정치 조직 경험은 명망가 중심의 이른바 '우익'보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훨씬 풍부했다. 정치적 목적의식도 상식 차원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대세인 사랑방 정객들보다 공산주의자들이 훨씬 투철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우익' 정객들은 정치의 초보도 모르는 아마추어로 보였을 것이다.

'우익'이라고 굳이 따옴표를 씌우는 것은 이 시점에서 좌익과 우익의 구분에 명확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는 혼돈의 상태였다. 상식 차원의 정의감과 애족심을 가진 '유지(有志)'들 틈에서 뚜렷한 정치적 목적의식을 가진 두 개의 집단이 세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또 하나가 한민당 주류 세력이었다. 이 두 세력을 중심으로 양극화가 진행된 결과가 좌익과 우익의 대립 양상이었다.

한민당 주류 인사들이 사랑방을 운영할 만한 재력가였다는 사실이 창당 시점의 한민당이 많은 '유지'들을 모은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휩쓸리지 않고 따로 국민당에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국민당과 한민당 사이에는 노선 차이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민당이 모습도 제대로 갖추기 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건준과 인공의 공격이었는데, 국민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38선 문제의 제기였던 것이다.

38선. 점령 정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었다. 하나의 민족을 나눠서 점령한다는 것은 독일 경우처럼 그 민족을 작살낼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고야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 문제 극복을 첫 번째 과제로 삼은 데서 국민당의 건전한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은 문제라도 하나의 경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나 한민당 주류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정치 집단에게는 분단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갈등이 많은 상황일수록 그들이 목적을 추구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이니까.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남한에서 한민당과 맺어져 중도파를 압도하는 반공 세력으로 조직되는 것이 하나의 단적인 예다.

안재홍이 9월 22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발표한 것은 정치를 지망하는 당대의 '유지'들에게 상식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 이념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민세 안재홍 선집 2>(지식산업사 펴냄) 15~60쪽) 원고지 200여 쪽 분량에 꽉꽉 눌러 담은 이 글을 아마 9월 들어 건준에서 손을 뗀 뒤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내용에서 소개할 만한 점은 차차 기회를 보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그 서문만 옮겨놓는다.

解放의 날이 온 후 民衆은 확실히 들뜨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行動主義者이라도 이제 深甚한 思考를 요한다. 統一民族國家 건설은 問題 浩大하니 民族 千年의 運命에 關係 깊다. 시국에 심대한 관심을 가지는 諸氏여. 바쁜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히고 이 一篇을 통독하시고, 그리고 공평히 비판하라.

幾十年來 몇 번의 鐵窓生活에서 어설픈 體驗을 되돌아 뼈아프게 이를 檢索하였고, 금년 八月 十五日 이후, 宿所를 轉轉하는 동안 忙中閑을 만들어 이를 起草 脫稿하였다.

檀紀 四二七八年 九月 二十二日

序言

朝鮮 반만 년의 역사는 거의 荊棘의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최근 삼십육 년의 일본 제국주의의 질곡 속에 얽어 매여 있던 조선 민족은 待望한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해방은 분명히 우리의 앞에 약속되었으나 前途 아직도 많은 난관이 걸쳐 있다. 지도층의 분규 혼란이 갈수록 심한데, 대중은 바야흐로 헤매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갈까. 조선은 어디로 가나. 우리들은 무엇을 할까. 현 단계에 있어 시급한 案은 조선의 통일 민족 국가를 하루바삐 완성하여, 안으로 혼미에 빠진 대중을 유도 집결하고, 밖으로 연합국과의 국교를 신속 조정하여, 새 민족 천년의 웅대한 재출발을 하는 것이다. 천하의 일은 반드시 常道 있고, 역사의 진전에도 꼭 先進 緩急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최대 급무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목표로 삼는 통일 민족 국가 결성에 있나니, 이제 그 論述의 붓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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