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4일
부내 永樂町78에 사는 일본헌병군조 光谷信次郞(35) 외 7명은 8월 17일 오후 1시경에 阿峴町 마루턱에서 술을 먹고 鄭寅燮이라는 사람을 단도로 찔러 전치 3주일간의 중상을 입혔다. 종로 보안서에서 요지음에야 그 일당을 전부 체포하여 취조 중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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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이 8월 17일 오후 1시라면 천황의 항복 방송 49시간 뒤, 헌병군조 같은 골수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사태인지 몰라 정신이 없었을 것 같다. 낮술을 걸치고 있다가 해방을 기뻐하거나 일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좀 크게 들렸다고 행패 부리는 장면이 대충 그려진다.
그런데 한 달 너머 지난 이제야 체포했다는 건 어찌된 일일까? 현역 군인 신분이니까 경찰에서는 인적 사항만 파악해 놓고 있다가 미군이 들어와 십여 일이 지난 이제 헌병대로부터 신병을 인수한 모양이다.
몇 달째 해방 당시 상황을 조사하다 보니 같은 자료를 봐도 전과 다른 시각에서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8·15의 기억 : 해방 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 체험>(한길사 펴냄)에 수록된 강창덕의 회고 중에서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183~184쪽).
그런데 17, 18일 밤쯤 됐을 겁니다. 한밤중에 마을에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어요. (…) "따다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데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놈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싶었죠. 놈들이 분풀이를 하려나 보다, 까딱하면 다 죽이려 드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어머니를 업고 집에서 300여 미터 이상을 도망갔어요. 그러고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관목이나 풀숲에 몸을 숨겼지요.
(…) 그런데 일본군이 총을 왜 쏘았는지는 다음날 직장에 나가서야 들을 수 있었어요. 하양 읍내는 벌써 지하 세력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청년단체의 사람들이 부대장을 만나 항의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사람 놀라게 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랬더니 실탄이 많이 남아서 그 실탄을 없애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에게 총을 쏜 것이 아니라 과수원 있는 강 쪽으로 발사했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8월 15일의 항복 선언에서 9월 9일의 항복 절차 이행까지 20여 일간은 일본인들이 공권력의 하드웨어는 그대로 쥐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무너진, 권력의 혼란 상태였다. 무기가 누구 손에 쥐어져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똑똑히 인식시켜 주려 한 이 부대장의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 현명하지 못한 반응도 많이 있었다. 위 책에는 해방 당시 도쿄에서 육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장지량의 회고도 들어 있다. (340~341쪽)
우에하라 대위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최후까지 궁성에서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다. 그러니 근위사단장 당신이 우리와 같이 해야 할 거 아니냐. 당신 책임 아니냐."
모리 사단장이 대답했어요. "천황 폐하의 명령이다. 명령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느냐."
"아니다. 천황 폐하가 무조건 항복한다고 하신 것은 몇 놈들의 농간이다."
대위는 좀체 믿지를 않았어요. 일대 혼란이 벌어졌죠. 그러니까 우에하라 대위가 일본도로 근위사단장 모리의 목을 그 자리에서 쳐버렸어요. 그리고 학교로 돌아온 거예요. 나중에 우에하라 대위는 스스로 할복을 했어요.
(…) 나중에 김재권과 같은 구대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구대장이 쏴서 죽였다고 그랬어요. 15일, 항복 방송을 듣고 너무 좋아했나봐. 그 사람 조금 경솔한 면이 있었어요. 명랑하기는 했는데 말을 함부로 하는 면이 있었죠. 그때도 너무 좋아서 까불었던 모양이야.
"야, 우리 이제 독립한다. 독립한다." 일본 사람들은 풀이 죽어서 '우리는 죽었다' 이러고 있는데, 한 놈이 나서가지고 '우리는 살았다'고 하면 되겠어요? 구대장이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쏴버렸다고 하더군요.
맨 위 기사의 미쓰다니 군조처럼 새로운 상황에 적응을 거부한 일본인들이 조선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어느 수준 이상의 고위층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이 별로 없었다. 김준엽의 <장정 2>(나남출판 펴냄) 243~252쪽에는 8월 18일 이범석, 장준하와 함께 한국 진입을 시도하는 미군 선발대에 끼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던 이야기가 있는데(대부분 내용은 장준하의 <돌베개>에서 옮겨온 것임), 일본인 지휘관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잘 그려져 있다.
일본의 항복 결정에 관한 정보를 8월 15일 이전에 조선총독부에서 입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연재 초입에서 밝혔다. 항복의 구체적 결정이 8월 10일에 내려지자 총독부에서도 바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보가 공식 통보된 것이 아니라 단파 방송 청취로 파악한 것이라고 당시 관계자들은 주장했지만, 책임 회피를 위한 주장일 뿐이지, 최대한 정확하고 정밀한 정보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총독부로 전달되었으리라는 내 추측은 당시 상황을 조사해 나갈수록 더욱 확실해진다.
8월 10일 항복 결정이 확정되기 전에도 생각 있는(그리고 정보도 있는) 일본인들은 항복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적어도 5월의 독일 항복 이후로는 승리에 집착할 수 없게 되었다. 군부 강경파가 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표면화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덜 비참한 조건으로 항복하는 길을 찾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 주둔군의 고위층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선후책을 궁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복 결정 직후 여운형, 송진우 등에게 치안 교섭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조선 퇴각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질서 있게 이뤄졌다. 혼란과 충돌, 그리고 개인의 고통에 관한 적지 않은 분량의 기록과 회고가 남아 있지만, 만주와 중국, 그리고 남양 여러 지역에 비하면 시간도 짧게 걸렸고 희생도 적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라는 조건도 물론 작용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전후에 필요로 했던 일본인의 노동력과 군사력이 조선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조건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퇴각 계획이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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