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2일
조선 내의 토지 소유권(북위 38도 이남)에 대하여 22日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 내의 토지 소유권은 미군 점령지 내에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세금은 종전과 같이 군정 당국의 명령대로 이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지주는 소작인의 소작료를 수확물로 받거나 현금으로 받거나 하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소작인은 이 지시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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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개혁의 필요성은 193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환영받은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소민(小民) 보호 기능이 사라진 상태가 오래되면서 토호 세력이 자라났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쌀 생산 기지로 이용하는 정책에 의해 농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되고 소작요율이 살인적 수준까지 올라갔다.
유럽의 공산주의가 산업자본가와 산업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산업화가 발전해 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농업 사회에서는 아직 산업화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이라는 근대적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농업 사회이기 때문에 농업자본가와 농업노동자 사이에 집중되었을 뿐이다.
해방 당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토지 개혁이었다. 이승만의 극우 정권조차 이 과제를 외면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북한에서는 토지 개혁을 서두름으로써 정치·사회적 안정을 먼저 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월 22일 미군정의 "토지 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이 현실을 인식하기는커녕 그에 역행하는 방침을 명시한 것이다.
미군정이 왜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가 있어 왔다. "바보라서." 하는 간단한 대답에 나는 제일 끌린다. 그런데 이 문제보다 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이 내게는 떠오른다. 왜 이 시점에서 토지 개혁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발표했을까? 무엇을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물론 발표해야겠지만 무엇을 안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그냥 안 하고 가만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토지 개혁의 필요성은 인식하지 못해도 토지 개혁의 요구가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좌익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16일 한민당 결당식에서 선포한 정책 8개 항 중에도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 있었다. 이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를 군정청이 느꼈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식적 의안 제기도 없는 상태에서(그런 통로도 없는 상태에서), 기자 회견에서 답변을 요구받은 것도 아니면서, 군정청이 자발적으로 이 방침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어떤 동기와 계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정당이 최소한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정도는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정치 감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 안 한다"는, 스스로 인기 떨어뜨리는 발표를 할 필요가 없다. 부득이하게 답변이 필요하더라도 "이제부터 검토해 보겠다"는 정도로 얼버무리는 것이 상식 아닌가?
거의 한민당 인사만으로 구성된 고문단을 군정청이 위촉하는 것은 10월 5일의 일이다. 그러나 한민당 인사들과의 집중적 접촉은 진주 시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확인된 근거가 없더라도 9월 22일 군정청의 "토지 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한민당 인사들의 로비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토지 소유에 힘의 큰 근거를 두고 있었던 만큼, 겉으로는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표방하면서도 변동이 없기를 속으로는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 소유권 무 변동" 방침을 군정청이 세우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했다는 사실에 더욱 음미할 점이 있다. 미군정에 대한 자파 세력의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는 위축되어 있었다. 경찰관 대다수가 잠적해 버려서 군정청에서는 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굳이 드러난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일제 치하의 특권 계층은 처신을 조심스러워하고 있을 상황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 날 군정청의 발표에서 한민당의 메시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떨 것 없어요. 한민당에 오면 돼요."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이치, 이승만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던 생존의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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