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9일
김일성(1912~1994년)이 귀국했다. 그의 등장에 관해 임영태는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57쪽에 이렇게 서술했다.
김일성은 해방 전 이미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전반적 조건과 자산을 갖고 있었다. 항일 빨치산 투쟁 과정에서 획득한 대중적 지명도와 더불어 지도자적 경력과 능력을 검증받았다. 때문에 빨치산 핵심 세력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더욱 중요한 사실은 소련공산당 중앙과 소련 군부 및 극동군의 적극적인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입국한 뒤 불과 3개월 만에 북한 지역 최고 지도자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김일성에 대해 온갖 희한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1987년 군사 독재 종식 후에야 김일성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일반인도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사에서의 역할에 비해 남한 국민들에게 그 모습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못하고, 아마 북한 주민들도 지나친 신격화로 인해 정확한 이해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 김일성의 실제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데도 기회 있는 대로 노력을 기울이고 싶다.
내게 김일성의 모습을 제일 가까이서 보여준 문헌은 김성호(연변대학)의 <민생단 사건 연구>였다. 다른 주제의 연구에 김일성을 주변 요소로 담았기 때문에 관련 서술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객관적 시각이라는 신뢰를 준다. 유격대 지도자로서 김일성의 훌륭한 면모를 여러 모로 실감할 수 있었는데, 그 책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아 바로 예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종석은 "북한 지도 집단과 항일 무장 투쟁"(<해방전후사의 인식 5> 수록)에서 북한 체제가 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 전통을 주축으로 세워진 사실을 밝혔다. 1930년대에 만주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이던 항일 투쟁 세력이 1939년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에 타격을 입고 활동 근거를 잃자 그 주력이 소련 영내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소련군의 '88특별여단' 형태로 꾸며진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 참여해 항일 투쟁의 대오를 정비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조직력과 아울러 소련군, 중국공산당, 양쪽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88여단 그룹의 조직력은 무엇보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단결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 그룹의 지도적 위치에는 김일성 외에 최용건(1900~1976년)과 김책(1903~1951년)이 있었다. 최, 김 두 사람은 나이도 김일성보다 10세가량 위일 뿐 아니라 경력에 있어서도 '윗사람'들이었는데, 해방을 앞둔 7월 '조선공작단'을 결성할 때 김일성을 단장으로 추대한 이래 귀국 후까지 그를 일사불란하게 지도자로 받들었다.
연상의 선배들이 후배를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해방 당시 다른 정치 세력에서는 볼 수 없는 강점이었다. 이 특성에 대한 와다 하루키의 해석을(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민주 항일 전쟁>(창비 펴냄), 281~282쪽) 임영태의 위 책 51~52쪽에서 재인용해 놓는다.
김일성은 다른 두 사람에게 없는 결정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최용건과 김책이 북만에서 활동해서 조선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데 비해 김일성은 동남만에서 활동하며 조선 북부로 공격해 들어간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명도에서는 최현도 들 수 있지만 김일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일성은 소련 측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최용건과 김책만큼 깊지 않았던 것도 평가되는 점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극성이나 부하의 장악도 면에서 김일성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상과 같은 김일성의 자산을 고려할 때 최용건과 김책이 김일성을 앞에 내세움으로써 만주의 유격대파가 해방 후 조선 혁명의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야말로 해방 후 김일성을 음으로 양으로 보좌하여 그를 찬양하고 유일한 '수령'으로 치켜세웠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고서는 될 리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3형제의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장남과 차남은 조건이 좋은 막내에게 집안의 상속을 잇게 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막내의 현명함을 칭송하며 자기들도 스스로를 낮추어 막내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집안과의 엄혹한 대항 속에서 집안을 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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