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델처럼 가상의 상황을 이용해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을 철학 용어로 '사고 실험'이라고 한다. 사고 실험은 대체로 "이러이러하면 어떨까?"라는 질문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이러이러하다'에 어떤 가상의 상황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러이러하게 상상해보면 어찌어찌한 결론이 도출되므로 우리는 요러요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최훈의 사고 실험 원고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도 고민에 빠졌다. 원고에는 100가지가 넘는 사고 실험이 실려 있었지만 모두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만 제기할 뿐 어느 것 하나 명쾌한 정답이 없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고민하다가 답을 못 내리고 다음 사고 실험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원고의 끝이었다.
▲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최훈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
"일찍이 칸트는 철학을 배울 것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우라고 말했다. (…) 철학함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철학자들이 실제로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작업은 추상적이고 논증적이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사고 실험은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6쪽)
그렇다면, 어떻게 사고 실험을 통해 철학함을 배울 수 있는지 한 가지 예로 살펴보자.
사고 실험 1. 훈이는 병원 7층에 입원한 친구 병문안을 갔다가 엘리베이터 단추를 잘못 눌러 6층에 내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훈이를 마취시켜 의식이 없는 봉이와 복잡한 장치로 연결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사정을 들어보니 봉이는 훈이와 아홉 달 동안 연결되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다. 원래는 지원자가 오기로 했는데 마침 6층에 내린 훈이를 지원자로 착각했다. 한번 연결한 이상 분리하면 봉이는 죽는다.
사고 실험 2. 훈이는 길을 걷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 그리고 어느 병원으로 옮겨져 위와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앞에서 사고 실험은 가상의 상황을 이용해 어떤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고 실험 1은 무엇을 주장하는 걸까? 이 사고 실험은 낙태를 옹호할 의도로 만들어졌다. 연결에 동의할지 말지는 훈이가 결정할 문제이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고 실험의 주장이다. 물론 낙태 반대자들은 이 사고 실험의 잘못을 지적할 것이다. 피임 실패는 엘리베이터에서 단추를 잘못 누른 것보다 책임이 훨씬 크다고 말이다.
그러면 사고 실험 2를 보자. 사고 실험 1에서는 훈이가 약간의 실수라도 했기 때문에 훈이에게는 연결을 끊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고 실험 2에서 훈이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냥 길을 걸었을 뿐이다. 사고 실험 2에서 훈이에게 연결을 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봉이는 훈이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사고 실험 2는 성폭행에 의한 원하지 않는 임신의 경우를 보여준다. 피임 실패 때문에 낙태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사람도 아마 성폭행에 의한 임신 때문에 낙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실험 1과 2에서 봉이는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런데 사고 실험 1에서는 훈이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반면에 사고 실험 2에서는 없다.
그렇다면, 실수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는 있던 태아의 생명권이 성폭행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 갑자기 없어진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쯤에서 저자가 어떤 결론을 내려주면 좋겠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레 중립을 지킨다.
그래서 편집하는 내내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이 주장의 논거는 타당한가?' 같은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미심쩍은 주장에 관해서는 저자에게 묻기도 했다. 특히 낙태, 안락사 등 민감한 도덕적 문제를 다루는 3장과 4장을 읽으면서는 내가 상충하는 가치들 중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곰곰이 자문했다. 편집하면서 자연스레 철학적 사고방식을 따라갔던 셈이다.
이 책에는 제목에 쓰이기도 한 라플라스의 악마 사고 실험을 비롯해 기게스의 반지, 테세우스의 배,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통 속의 뇌, 고장난 전차 등 철학사의 굵직한 사고 실험이 117가지 실려 있다. 사고 실험이 제기하는 정답 없는 문제를 즐길 마음만 있다면 사전지식 없이 읽을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