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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코드'로 보는 오싹하고 질긴 사대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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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코드'로 보는 오싹하고 질긴 사대주의 역사

[親Book] 계승범의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

어릴 때부터 나는 한국사보다 세계사-사실은 서양사-가 좋았습니다. 위풍당당한 로마제국사, 드라마틱한 프랑스 혁명사, 어쩐지 로맨틱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마음을 뺏긴 내게, 만날 침략이나 당하고 중국에 사대(事大)나 하던 한국사가 눈에 찰 리 없었지요.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한국사는 그런 통념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조공과 사대는 중국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특징짓는 외교 방식이며, 조선은 무기력하고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내적으로 상품 경제와 민중 문화가 발전하던 역동적인 사회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운 민족주의 사학의 입론들을 통해 나는 한국사에 대한 긍정과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요즘 회의가 듭니다. 정말 한국사가 내적인 발전 동력을 갖고 있었는지, 조선 지배층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 불신이 생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긍정적 해석과 달리, 당쟁은 정치의 부패를, 사대는 외교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무능과 부패는 DNA처럼 한국사에 새겨져 틈만 나면 재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자칫 식민사관을 옹호할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은, 최근 한국 외교가 보여주는 난맥상이 수백 년 전 조선이 보여준 외교적 무능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역사학자 계승범이 쓴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라는 책을 읽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나라가 망할 만도 했구나 싶고, 앞날을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계승범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계승범은 이 책에서 조선 시대 해외 파병이라는 주제를 통해 조중 관계, 나아가 조선 양반 지배층의 중국(명·청) 인식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해외 파병'인가 하면, "파병에 따른 현실적인 손익 계산 과정을 통해 그들의 중국관이 비교적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파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사적 결정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결정"이며, "현재의 대한민국도 해외 파병 문제에 계속 직면"하는 현실에서 "시대를 관통해 한국 사회의 한 성격을 알려주는 좋은 코드가 바로 해외 파병"이라고 설명합니다.

조선이 정식으로 명의 조공국이 된 1401년부터 개항(1876) 직전까지 470여 년 동안, 조선 조정에서 명·청의 청병 문제를 의논한 것은 약 15차례에 이릅니다. 그 첫 번째는 세종 31년(1449), 명이 몽골 원정을 추진 중이니 10만 병력을 파견해 도우라고 한 것입니다. 허나 조선은 파병을 하면 여진이나 왜가 그 틈을 노릴지 모른다며 거절합니다.

얼마 뒤 원정에 나섰던 명 황제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조선은 위로의 사신과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만 보낼 뿐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몽골군이 조선을 침입한다면 힘으로 대응하기 어려우니 강화를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을 만큼 철저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봅니다.

이런 현실주의는 파병을 승낙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467년(세조 13년), 명은 건주여진을 치겠다며 조선에 군사를 청합니다. 세조는 별다른 논의 없이 바로 군대를 파병하는데, 필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전부터 여진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파병을 미룰 이유가 없었고, 둘째 명이 건주여진과 조선의 결탁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머뭇거리다간 명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이 한편으로는 명의 요청대로 파병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건주여진을 제외한 다른 여진족과 독자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설득력 있는 설명이지요.

그런데 현실적인 실리에 따라 파병 여부를 결정하는 이런 전통은 중종 대에 와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1543년(중종 38년), 북경에 간 사신으로부터 명의 순무어사가 여진 정벌을 위해 조선 청병을 건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보고를 받은 중종은 바로 파병을 명했고, 전국적인 징병이 실시됩니다. 정식 요청이 있기도 전부터 파병을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간 겁니다. 달포 뒤 청병도 정벌 계획도 억측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파병 준비는 흐지부지되지만, 이 일은 달라진 조선의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사실 중종은 파병만이 아니라 의전에서도 명에게 과공(過恭)의 예를 다한 왕이었습니다. 원래 조선 왕은 명의 조서를 받으면 궁궐에서 4배 3고두(叩頭)의 예를 행했습니다. 명이 5배 3고두를 요구했지만 조선에서는 전례가 아니라며 거부했지요. 그런데 1537년 명의 태자 탄생 조서를 받을 당시, 중종은 도성 밖까지 나가 5배 3고두를 행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종은 시도 때도 없이 명에 진하사(進賀使)를 보내 황제의 환심을 삽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기는' 이런 저자세 외교에 대해 필자는 중종이 가진 태생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즉,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중종은 처음부터 자신의 지위에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허약한 권위를 상쇄하기 위해 '천자'를 내세웠다는 겁니다. 명 황제의 권위에 의지해 자신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지요.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런 인식은 중종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종 대 이후로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내복(內服)' '배신(陪臣)' 같은 말이나, 명을 부모의 나라로 표현한 것 따위는,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명에 대한 사대를 현실적 고려에 따른 외교 정책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天理)'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반영합니다.

('내복'은 조선이 중국의 일부임을 뜻하는데, 중종 30년 처음 실록에 나타난 이후 매우 빈번히 등장합니다. 또 천자의 책봉을 받은 제후의 신하는 천자의 신하이기도 하다는 뜻의 '배신'이란 용어는, 삼전도의 항복 이전까지 조선 조정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양반층의 이런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광해군 때의 파병 논의입니다. 명이 쇠퇴하고 청이 흥기하던 명·청 교체기를 맞아 조선의 양반 지식층은 초지일관 '대명사대' '존명의리(尊明義理)'를 내세웁니다. 망해가는 명이 파병을 요구하자 그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병을 주장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명이 군대를 보내 도와줬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현실을 무시한 그들의 주장에, 광해군은 파병을 했다간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며 반대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전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조(天朝)에 득죄할 수는 없다"며 왕의 명을 거역합니다. 파병을 거부하는 광해군에게 그들은, "(명의) 칙서에 따르지 않는 것은 200년 충순(忠順)을 거스르는" 것이며, "산해관 밖이 다 함락되었을지라도 번국(조선)이 천자의 조정을 섬기는 도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며 공격합니다.

누구의 신하이고 누구의 백성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인데, 무참하게도 15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마음속 깊이 명 황제의 신하요 명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선도 조선 백성도 늘 두 번째였으니, 우리가 지폐에 얼굴을 새겨 기리는 퇴계도 율곡도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일전쟁이 일어나 선조가 피란할 때 도성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운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결국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명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인조 정권 아래서 조선은 두 차례 전쟁을 겪고 왕이 무릎을 꿇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겪습니다. 그러나 인조와 그 신하들에게 치욕은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상대가 청이라는 오랑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청의 속국이 되어서도 그들은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하고, 죽은 명 황제를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낸 것이지요.

종주국이 망해 없애졌는데도 종주국에게 의리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공맹의 가르침도 아니요 세계 외교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 조선의 양반 사대부가 그런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사대를 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수백 년 동안 고집했고 결국 나라를 남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는 제 안위를 위해 현실을 기만하고 명분을 내세워 무능을 감춘 조선 지배층의 죄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때문에 건조한 제목의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슴에선 불이 나고 입에선 한숨이 끝없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외교는 현실임을 무시하고 은혜와 의리만 강조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과거의 정신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들추기도 민망한 부끄러운 역사를 새삼 일깨우는 이유는, 아직도 재조지은을 운운하며 외교가 아닌 사대를 고집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대주의는 사대주의일 뿐 외교가 아니라는 것, 그런 무능과 부패 때문에 결국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치욕의 역사가 남긴 이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치욕을 겪게 될지, 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습니까?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으니, 책 읽는 자의 책임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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