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4대강 살리기'에 대한 이야기는 범국민적 관심사이다. "잘하는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잘~하는 짓"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책의 제목인 <하상(河殤)>(소효강·왕노상 지음, 홍희 옮김, 동문선 펴냄)은 "황하(黃河)의 죽음"을 뜻한다. 지금 내가 '4대강'의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목도해야 하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위기감이 서재의 구석진 틈바구니에서 이 한 권의 책을 꺼내보게 한 이유이다. 5000여 년 전에 시작한 황하의 치수 사업이 중국에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4대강 사업이 무엇을 남길 것인지가 보이지 않을까?
중국의 역사는 치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수에 실패한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의 태평성대를 대표하는 요순우탕(堯舜禹湯) 시대에 우왕은 백성을 위해서 마정방종(摩頂放踵 :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노력함)하여 치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대업을 이은 탕왕이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모두를 위해 이룩한 성과가 한 집안의 사유물(私有物)이 되어버렸다. 탕왕에 의해 중국의 고대 노예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禹)왕의 황하 치수 사업 이후 중국에서는 몇 가지 큰 토목 공사가 있었다.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몇 천 년을 이어온 대토목 공사들이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만리장성 공사는 20세기 초,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만리장성은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화유산이지만, 동시에 중국 문화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중국 내륙을 횡단하던 강들을 종단으로 연결하는 대운하 공사를 했던 수양제는 결국 측근들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항주의 늪지대를 배 띄우고 놀기 좋은 서호(西湖)라는 호수로 만든 송나라는 몽고에게 망했다.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는 결국 그 역사적 건축물을 여진족에게 바치고 말았다.
왜 사회적 가치를 독점하고 여론을 진압하던 그들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했는지.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아주 조심스런 방식으로.
<하상>은 어떤 책인가?
이 책에는 크게 다큐멘터리 <하상>의 시나리오와 24개의 논평이 실려 있다. 필자가 우선적으로 읽어보기를 권하는 것은 <하상>의 방송 대본에 해당하는 1부이다.
시나리오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제1집 '꿈을 찾아서, 심몽(尋夢)'은 "중국 민족의 토템인 용을 통해 민족의 오랜 문화심리를 분석"하는 것이고, 제2집 '운명(運命)'은 "장성(長城)이라는 내부 방어형 문명의 산물을 제재로, 대륙 민족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운명과 미래를 제시"하고, 제3집 '신령스러운 빛, 영광(靈光)'에서는 "문명의 빛을 통하여, 대외 개방으로 외래 문화의 자양분을 섭취하는 민족이 창조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천명"한다.
제5집 '우환(憂患)'은 황하의 "주기적인 범람"이 "중국 사회의 주기적인 변혁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우환의식(憂患意識)인데, 이것은 황하가 범람할까 노심초사하는 옛 지식인의 정신을 통해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동의 10년을 보내고 난 후 새롭게 만들어질 중국이 어떤 중국이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화두(話頭)라 할 수 있다.
한족(漢族) 왕조였던 명나라가 만주족(滿洲族)인 후금(청(淸))에게 망했던 시기의 지식인 고염무는 "천하흥망(天下興亡), 필부유책(匹夫有責)-나라가 망한 것에는 벼슬을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한족의 왕조가 무너지고 세상이 혼란해진 것에는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자책(自責)이다. 비록 정치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知性)은 무지(無知)만 못하다. 고염무의 일갈(一喝)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6집은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하상>의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전제 정치의 특색은 신비성, 독재성과 수의성(隨意性)이다. 민주 정치의 특색은 마땅히 투명성, 민의성과 과학성이다. (…) 황하는 반드시 대해에 대한 공포를 없애야만 한다. 황하는 반드시 고원의 백절불굴의 의지와 충동을 지켜나가야 한다. 생명의 물은 대해로부터 와서 대해로 흘러 들어간다. 천년 고독 속의 황하는 마침내 짙푸른 바다를 보게 되었다.
부록(Ⅰ)에서는 <하상>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김관도의 하상에 대한 평가, 연출자 하준의 연출 후기가 있으며, 부록(Ⅱ)와 부록(Ⅲ)은 대륙과 대만에서 보인 하상에 대한 평가들이 실려 있다.
내가 <하상>에 주목하는 이유
<하상>은 문화열(文化熱)에 대한 대중적 홍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열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나아가야 할 미래적인 방안을 창출하고자 이루어졌던 철학계의 논쟁을 지칭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는 이 논쟁에 대한 연구 결과물을 <현대 중국의 모색>(동녘 펴냄)이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하상>은 철저 재건론을 대표하는 "김관도"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관도는 중국 사회를 끊임없는 생성과 해체를 통해 장기적으로 초안정 구도를 유지해 온 사회라고 보는데, 이는 마치 농경 사회의 한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한 왕조가 세워져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결실을 이루고 나면, 겨울이 와서 붕괴되고 새로운 왕조의 봄이 오는 것처럼 시스템의 변화 없이 왕조 교체만 반복되어 온 것이 중국의 역사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는 중국의 초안정 구조를 가져온 시스템이 1980년대의 중국 사회에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혁개방의 속도 조절에 대해서 내부적인 갈등을 겪고 있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김관도의 입장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마른 대지에 기름을 부은 것이 <하상>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하상>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이미지와 문학적 내러티브로 나타난다. 철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왔으면 하는 부러움도 있다. <하상>은 학자들부터 노백성(老百姓 :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의사 결정에서 밀려나 있는 인민들을 이를 때 사용하는 말)들까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세계 최고의 치수 사업은 무엇을 남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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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소주를 잇는 운하에서의 경험은 예상 밖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인근 주거지보다 높은 강바닥과 느린 유속(流速) 때문에 생활하수와 오물들이 썩어 부영양화되는 지천(支川), 물은 많은데 먹을 물을 구할 수 없는 강변 마을 등.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장강의 물은 맑아질 줄을 모른다. 진시황과 수양제에 의해 기획된 대운하라는 문명사적 대사업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5000년도 전에 시작된 이 대토목 사업과 같은 사업이 이 땅에서 현대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속도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상>은 치수 사업이라는 문명사적 공동의 목표가 내재하는 폭력성에 의해 공동체를 파괴하였고, 성과에 대한 불공정한 분배를 통해 중국 사회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이행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은 얼굴마담만 바꾸어 가며 동일한 지배 구조를 장기적으로 지속시켰고, 창조와 파괴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창조성을 발현할 기회를 빼앗았다.
이 모순들은 중국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다른 문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서구 열강과 최초의 전면전이었던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기저의 문화 심리 구조로 기능하였다. 문화 심리 구조라는 용어는 이택후(李澤厚)가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지나치게 이성적이어서 비이성적인 듯이 보이는' 역사의식을 표현한 용어이다(<중국 현대 사상사론>, 리쩌허우 지음, 김형종·임춘성·정병석 옮김, 한길사 펴냄). 합목적성이 합리성을 압도하는 사회적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과정상의 합리성은 무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4대강' 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도 이것이다. '4대강' 담론은 여전히 4대강 사업의 목적이 정당한가에 머물고 있다. 담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더 이상 4대강 사업의 합목적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4대강 살리기'는 환경의 문제이기만 한가?
현재까지 4대강 문제는 주로 토목·건축 관련의 학자나 관료, '토건족'이라 불리는 기업, 환경학자나 환경단체 등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환경의 문제로 국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하상>에서 다루고 있는 '황하의 죽음'은 환경에 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의식의 밑바닥에서 중국인들의 삶을 규제하는 어떤 것을 드러낸다. 그 어떤 것을 문화 심리 구조라고 해도 좋고, 헤게모니의 관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4대강 문제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규율 질서의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하상>은 질문한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중국의 메달리스트는 왜 인민에게 죄인이 되고, 왜 중국인들은 미국이나 일본과의 경기에서 지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할까? 그 이유는 1차적으로 앞선 세기에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다른 문명에 의한 패배의 기억이 각인되었기 때문이고, 더 근원적으로 천자의 상징인 용(龍)의 표상을 통해 용의 본체(本體)인 황하를 다스리기 위한 인민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정당성 있는 공포를 인민에게 강요했던 중국의 지배자들이 남긴 유산이라는 것이다.
진시황 이래로 황제가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한 짐(朕)이라는 말은 지배자가 자신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아야 지배하기가 쉽다는 의미이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인민을 직접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표상(表象) 뒤에 숨는다. 지배받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통치의 표상을 용이라고 본다. 용은 황하의 추상화된 모습이다. 결국 개인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전체(全體-天子)를 위해 끊임없이 복종의 의무를 다 해야 했다.
일본의 한 시골 마을 의회가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에 온 국민이 치욕(恥辱)을 느끼고, 당장 집 한 칸 없으면서 부동산 경기 하락에 노심초사하는 우리들도 <하상>이 이야기하는 중국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내 팍팍한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국가백년지대계(國家百年之大計 : 조국 근대화, 정의 사회 구현, 선진국 진입, 4대강 사업 등)라는 보이지 않는 꿈을 함께 꾸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일이다.
중국의 현대사가 겪어야 했던 서세동점의 고난은 중국의 과거 왕조들이 그들의 후손에게 남겨준 것이다. 그들은 지속적인 대토목 공사를 통해 자신의 표상을 대리하는 대리인을 키우고, 그들을 통해 인민이 가지고 있는 것들(토지, 가족, 공동체)을 지속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박정희 정권 이후 '조국 근대화'라는 전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삶과 가족, 마을 공동체를 해체해왔다.
'4대강 살리기'를 떠들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환경평가만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탐욕이 역사에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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