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동지를 지키고 헌신했던 이들이 혁명 이후 왜 서로를 의심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게 되었는가?"
아서 쾨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Darkness at Noon)>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이 책은, 가장 정의롭고 혁명적인 어떤 사회를 꿈꿨던 사람들이 혁명 이후 권력을 갖게 되면서 대면하게 되는 권력의 어두운 속살을 이보다 잘 표현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이 책의 주인공 루바쇼프는 1938년 스탈린에게 숙청된 니콜라이 부하린이 모델이다. 부하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프라우다>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스탈린과 함께 트로츠키 실각에 힘을 보탰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1938년에 총살되었다.
책으로 다시 돌아가, 혁명 정부의 2인자였던 루바쇼프가 어느 날 반역과 최고 지도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고, 그로부터 한 달여 동안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옛 동지였던 이바노프, 혁명이 낳은 새로운 세대이자 냉정하고 이성적인 전형적 인물 글레트킨, 그리고 또 다른 자기 자신과, 혁명·대중·도덕·양심·권력·정치 등에 대해 논쟁을 한다.
글레트킨은 루바쇼프에게 혁명을 지켜 내기 위해, (결백할지라도)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대중들이 당에 대한 반대파를 경멸할 수 있게 하는 것, 옳은 것은 보기 좋게 도금하고, 틀린 것을 검게 칠하라고, 그것이 당이 루바쇼프에게 요청하는 마지막 봉사라고 말한다. 루바쇼프는 고민한다. 침묵 속에서 죽을 것인가, 마지막까지 당에 봉사할 것인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의 선택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혁명 이전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지만, 혁명이 성공한 뒤, 오히려 모든 것이 불분명해진 상황에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후마니타스는 전부터 '민주화 이후 정치의 문제'를 다뤄보고 싶었다. 정치라는 것이 다른 분야와 구별되는 것은 권력, 폭력을 다룬다는 점일 것이다. 한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정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도 민주화 이후 이른바 '가까워진 권력의 문제'를 경험했다. 전에는 권력과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민주화 이후에는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후마니타스 |
조효제는 얼마 전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반공 작가로 치부되었던) 솔제니친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우리 진보·개혁 진영의 지적 역량에 얼마만한 여유 공간이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모든 정치 권력은 어떤 이념이든 억압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고, 그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는 복합적인 인식을 가져보면 어떨까? (…) 최근 어느 출판인으로부터 아서 케슬러의 <한낮의 어둠>을 번역·출간할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복합적인 현실 인식의 좋은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은 독일어 원본이 상실되는 바람에 영어 번역본만 남아있으며 이를 토대로 번역을 했으나, 문광훈의 번역이 쾨슬러의 독일식 문체를 잘 살리고 있다는 점도 다행이다. 이 책이 나오자 혹자는 "후마니타스가 소설도 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책은 '후마니타스의 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후마니타스에서 책다방을 열었습니다. 책다방 안에 출판사도 있고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와 커피, 강독 모임, 저자와의 만남도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이터처럼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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