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평등에 관하여>(김순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민주주의 이론 분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로버트 달이 91세의 나이에 저술한 책으로, 거의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과 사상을 집약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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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달의 민주주의 이론 속에서 이 책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가 마지막 책의 주제를 '정치적 평등'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지향점이 책의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달은 민주주의 이론 분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또는 대의민주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그 한계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자세를 끊임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입장이 시간이 갈수록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으로 변화되어 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에서, 달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더 심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달은 이 책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더 절박하게는 정치적 불평등의 확대를 막고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대기업의 영향력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시민 개개인의 의식과 문화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소비주의 문화를 극복하고 이를 대체할 시민권의 문화를 역설하고 있다.
달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달은 시장 경제가 탈중앙 집중화된 결정을 통해 운영되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중앙 집중화된 국가 계획 경제 체제보다 민주주의와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가져오는 정치적 불평등 효과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고, 이 점에서 그는 대기업이 평등의 원리를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데 최대의 관심을 갖고 있다.
민주적 가치와 양립하는 기업의 소유 및 운영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젊은 시절부터 달이 평생의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달은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현실 밖에서 문제를 보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자본주의 시장 경제 내지 시장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자 개혁자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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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로버트 달 지음, 김순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로 달의 관심은 훨씬 현실적이다.
"어떻게 하면 큰 규모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확장하면서도 여전히 소규모의 데모스에서 얻을 수 있는 대표의 질을 유지할 수 있을까? 평생 나를 매료시킨 문제였다."
달은 일련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대표의 선출, 자유롭고 공정한 주기적 선거, 표현의 자유, 대안적인 정보 원천, 결사의 자유, 모든 데모스의 구성원을 포괄하는 보통선거권-를 통해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달은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과 그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이를 향해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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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달의 학문적 입장의 연장선에서 볼 때 이 책은 그의 연구의 총괄이자 정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달은 자신이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로 설정한 정치적 평등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한다.
왜 정치적 평등이 요구되는가, 정치적 평등은 이성적으로 합당한 동시에 경험적으로 실현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정치적 평등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이며, 반대로 정치적 평등을 제약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런 제약 요인들은 향후 우리의 노력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달은, 정치적 평등이 도덕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이성적으로 합당한 목표 내지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 또 지난 18세기 이래 인류가 정치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향해 진전해온 성취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정치적 평등이 실현 가능한 목표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달은 결코 민주주의의 미래를 막연히 낙관하거나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진전할 것이라는 어떤 결정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달은 현대 사회가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강력한 장애물-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비롯한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시간의 제약, 정치 체제의 규모, 시장 경제의 위세, 비민주적인 국제 체제, 테러리즘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불평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래는 다음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러한 논의 중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사람들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라는 그의 질문이다. 달이 이 질문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가 인간이 가진 어떤 기본적인 본성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평등이라는 목표나 이상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은 인간 본성과 인간 사회에는 어떤 기본적인 한계가 있고, 그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조차 정치적 평등이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정치적 평등이란 결코 완전히 달성될 수는 없는 하나의 이상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정치적 평등을 향해, 민주주의를 향해 커다란 진전을 이룩해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달은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평등을 지지하고 이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인간의 행동을 추동하는 인간의 어떤 근본적인 특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달의 기존 연구를 뛰어넘는, 그의 마지막 저작에서 새로이 개척된 연구 영역으로서, 가히 이 책의 핵심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도록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 달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정서나 감성 또는 열정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어떤 숭고한 감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혐오, 질투심, 시기 등과 같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동료 인간들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그런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달은 이러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의나 공정함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힘으로서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임마누엘 칸트를 비판하면서, 감정과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이비드 흄의 이론을 끌어 온다. 주지하듯이 흄은 영국 경험론을 완성한 철학자로서, 인간의 구체적 경험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선험적 능력으로서의 이성의 힘을 부정한다. 흄에 의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목표나 윤리적 목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열정에 의해 추동된다.
결국 흄의 논의를 근거로 하여 감정과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근본적 특성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모두 갖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의 이러한 논의는, 정치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지혜와 실천을 중시해 온 그의 민주주의 이론에 하나의 완결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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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이 갖는 의미는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이론과 대비해 보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사적·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개인의 자유의 영역을-특히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지키는 것이 우선시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적 평등 달리 표현하면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일반 시민들로서는 부차적인 관심사가 된다. 그것은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갖는 정치적 인간-또는 정치 엘리트-이 주로 관여하는 영역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사적 영역에만 치중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면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헌신하려는 '시민적 덕성'을 키우고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의 논의는 이러한 주장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달에 의하면 정치적 평등에 대한 요구는, 인간의 본성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며 특별히 어떤 시민적 덕성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과 열정 등 평범한 시민 모두가 갖는 인간의 어떤 특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이 결론 부분에서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위한 시민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어떤 규범적 차원의 요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달은 결론에서, 인간은 소비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행복이나 복지를 위해 정치에 개입하려는 또 다른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소비주의 문화'가 전자에서 연유한다면, '시민권의 문화'는 후자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권의 문화가 소비주의 문화보다 우위에 서게 될 때 정치적 평등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결론 맺고 있다.
이 짧은 한권의 책은, 평생 보통 시민들의 현실적 조건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달의 정치적 이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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